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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아릴 수 없는 공덕
    金剛經 2012. 2. 5. 09:17

     

     

    수보리야,
    내가 과거 무량 아승지 겁 전의 과거를 생각해 보니
    연등부처님 뵙기 전에도
    팔만 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어 헛되이 지냄이 없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내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과 내지 어떤 산술적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아승지란
    도무지 산수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한량없이 많은 수를 뜻하며,
    겁이란 마찬가지로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시간을 말한다.
    나유타 또한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숫자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아승지 처럼 무량한 수를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다시말해 부처님께서는 과거 연등부처님 뿐 아니라
    그 이전에도 무량한 시간 동안
    무량한 수의 부처님을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되 헛되이 보내지 않았을 만큼
    그 공덕이 무량하신 분이다.

    한 부처님께만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더라도
    그 공덕이 한량없을 터인데,
    무량한 세월동안 무량한 부처님께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었으니
    그 공덕이 얼마나 셀 수 없이 많을 것인가.
    이 비유는 그만큼 부처님의 공덕이 많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부처님께서 한량없는 세월동안 한량없는 부처님을
    공양하고 받들어 섬긴 그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산술적인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만큼의
    더욱 무량한 공덕이 있다는 말씀이시다.

    다시 말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이야말로
    도무지 말이나 그 어떤 산수의 비유로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는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렇게 금강경 수지독송의 공덕을
    크게 말씀하시고 찬탄하는 이유는
    금강경이라는 경전에 그 어떤 상을 두고 절대시하거나
    금강경만 독송하면 모든 공덕을 다 얻는다는 등의
    그런 단편적인 말씀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금강경이란 ‘아상을 타파하는 가르침’이며,
    ‘완전히 아상을 깨고 참나를 발견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불법의 대의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가르침을
    수지하고 독송해야 한다는 말이다.

    수지란 완전히 체득하여 그 가르침의 지혜를 깨닫는 것이며,
    독송이란 그러한 깨달음의 바탕 위에서
    그 가르침을 끊임없이 읽고 외움으로써
    보다 완전히 체득하며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는 일은
    곧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인 것이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유위의 공덕도
    깨달음이라는 무위의 공덕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무궁무진한 산술적인 비유로 그 공덕을 표현하더라도
    그것이 유위의 공덕인 이상
    그 어떤 수학자의 비유라도 무위의 공덕에는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녀인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여 얻는 공덕을 내가 다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가히 헤아릴 수 없다.


    아마도 금강경을 처음 공부하는 이들은
    이와 같은 금강경의 표현을 보고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것이
    한량없는 세월동안 한량없는 부처님을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는 것에 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가.

    또 앞서 말했듯,
    형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공덕이
    동서남북과 네 간방과 위아래의 가히 생각할 수 없는 허공과도 같이
    셀 수 없다고 하시는가.

    처음 금강경을 공부하는 이들은 똑같이 하는 말이
    너무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뿐인가.
    금강경에서는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원동력이 되었던
    ‘나’를 놓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또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 되었던
    욕심과 집착을 다 버리고
    일체 중생을 위해 보시하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 왔던 삶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러한 가르침에 어찌 마음이 혼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여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위에서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을 말씀하셨지만,
    아직도 모자란 것이 있으신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을 전부 다 말한다면
    아마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부처님께서는 말이라는 것이
    진리를 전부 담을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신다.
    그렇기에 그렇게까지 말로써
    수지독송의 공덕을 표현하시고도
    ‘수지독송하는 공덕을 다 말한다면’ 이라는 표현으로
    여전히 말로써는 다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 계신다.

    무위는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함이 없는’ 무위이기 때문에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
    말로써 표현하는 순간 벌써 어긋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방편을 빌리지 않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표현하고 계시는 것이다.

    계속해서 부처님의 당부는 이어진다.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헤아릴 수 없다.

    이렇게 금강경을 해설하고는 있지만
    이 해설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 해설 속에 금강경의 뜻이 잘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면
    벌써 어긋나고 만다.

    이 경은 그 뜻을 가히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은 머릿속으로 헤아린다고 헤아려 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수지독송이라는 수행을 통해,
    즉 완전한 내적인 깨달음으로써 수지하고,
    그러고 나서도 끊임없이 독송함으로써
    완전히 가르침이 나와 하나가 될 수 있을 때만이
    그저 체험되어지고, 하나되어지는 것이지,
    이 경은 뜻을 헤아린다고 헤아려 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실천과 수행만이
    그 뜻과 하나될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완전히 나를 놓아버리고
    아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으로써
    내가 곧 전체가 되었을 때
    그 때 이 뜻이 그대로 내가 되고 전체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뜻을 헤아릴
    ‘나’라는 주체가 완전히 소멸해야지만
    이 뜻은 전체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 뜻을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 뜻을 헤아리는 ‘나’가 있는 이상
    이 뜻은 여전히 이해되지 못한다.

    과보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과보는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수지독송의 과보는
    깨달음이라거나, 무량한 복덕이라거나 하는 등의
    원인과 결과로써의 어떤 과보를 생각하겠지만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과보는 완전한 무(無)이다.

    완전히 무이기 때문에 완전히 전체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도 없기 때문에 한량없이 많을 수 있는 것이다.
    과보가 있다면 그것은 셀 수 있는 것이며,
    있고 없음의 틀 안에 갖힌 과보일 뿐인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유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과보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다.
    과보를 헤아리는 순간 이미 그 과보는 참된 과보일 수가 없다.

    과보를 받을 ‘나’가 없어졌을 때,
    내가 받을 ‘과보’ 또한 완전히 공하다.
    ‘나’가 없다면 내가 받을 과보 또한 어디에 붙여 둘 것인가.

    ‘나’만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항상 무량한 과보로써,
    무량한 복덕으로써 충만한 곳이다.

    이 세상은 항상 부처님의 무량한 광명으로 충만한 곳이며,
    무량한 복덕이 넘치는 곳이다.
    아니 광명 그 자체이며, 복덕 그 자체이고, 부처 그 자체인 것이다.

    다만 거기에 광명을 받으려는 내가 있고,
    복덕을 누리려는 내가 있으며,
    부처가 되려는 내가 있는 이상
    참된 광명도 복덕도 부처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아상을 완전히 타파했을 때,
    그 자리가 금강경 수지의 자리가 되며,
    그 때 헤아릴 수 없는 뜻도, 헤아릴 수 없는 과보도
    그대로 하나로 어우러져 광대한 법해(法海)를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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