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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경에 내가 사라지다
    金剛經 2012. 2. 6. 06:23

     

    구경에 내가 사라지다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와 선녀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면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마음을 내라.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리라.
    그러나 이렇게 일체 중생을 다 멸도에 들게 하였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라고.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수보리야,
    그 까닭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킬
    어떤 한 법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이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에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있지 않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면
    연등 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하시기를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
    고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어떤 법이 있지 않은 경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기에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
    고 수기하셨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라 함은
    모든 법에 여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설한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일체법이라 함은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 까닭에 이름이 일체 법인 것이다.

    수보리야, 예컨대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 같다.”
    수보리가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몸이 아주 크다는 것도
    실은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일 뿐입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를 보살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은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다’고 한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진실로 보살이라고 부를 것이다.”


    17분, 구경무아분은 금강경의 가르침이
    구경에는 무아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임을
    지금까지 앞서 설했던 예들을 들어가며 설하고 있다.

    발심한 보살들은
    마음을 항복받고 수행하며 일체 중생을 제도할 때에도
    ‘나’라는 상에 머물지 말아야 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한 법도 얻은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하고,
    불국토를 장엄했다는 것도
    실은 장엄이 아니라 이름이 장엄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는
    비유를 들어가면서
    그 어떤 경계에도 마음이 머물러서는 안 되고,
    ‘나’라는 상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여래는 ‘무아법’ 즉 ‘내가 없다’는 법에 완전히 통달하였을 때
    그 사람을 보살이라 부르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거나,
    ‘내가 깨달았다’ 혹은 ‘내가 법을 얻었다’거나,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하는 등
    일체의 ‘내가’라고 하는 감옥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이 분에서 끊임없이 설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내가 한다’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을 때
    비로소 보살이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금강경에서 지금까지 설해 온 가르침은
    오직 한 가지로 귀결된다.
    아상을 타파하라는 그 한 가지의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아상을 타파해야 하는 이유는,
    ‘나’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항상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나라는 것이 항상하고 실체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따를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위해 온 존재를 바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것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며 항상하지 않는다.
    즉 무아이며 무상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곧 괴로움을 동반한다.

    다시말해 ‘나’의 실체는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라는 삼법인의 법칙을 따른다.
    나는 항상하지 않고[제행무상],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으며[제법무아],
    그렇기에 나라는 것은 곧 괴로움[일체개고]인 것이다.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바로
    ‘나’라고 하는 집착에서 오는 것이다.

    물론 ‘나’ 이외의 것들에서 괴로움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나’를 근원으로 하고 있다.
    ‘나’라는 집착에서 ‘너’라는 상대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라는 주관의 성품이 삼법인으로 공하기 때문에,
    ‘너’라는 상대 또한 삼법인의 성품으로 똑같이 공한 것일 뿐이다.

    ‘나’도 삼법인이며, ‘너’도 삼법인이고,
    ‘일체제법’ ‘삼라만상’ ‘우주’ 전체가
    모두 항상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괴로움인 삼법인의 성품을 동반하는 것이다.

    이처럼 ‘나’라는 주관도, ‘상대’라는 객관도
    모두 삼법인으로 항상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렇기에 ‘나’에 집착하는 것도 결국엔 괴로움을 가져오며,
    ‘상대’에 집착하는 것도 괴로움을 가져온다.

    돈이나 명예, 지위, 권력, 이성, 사랑, 학벌, 소유물 등
    그 어떤 것이라도 집착하는 것은 곧 괴로움을 의미한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항상하거나 실체적인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깨달음, 멸도, 해탈, 그리고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 까지도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내가 수행한다’거나, ‘내가 깨달았다’거나,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거나, ‘내가 법을 얻었다’거나,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거나 하는 등의 말에도
    ‘내가’라고 하는 아상이 전제되어 있는 한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며 무아법의 통달이 아니다.
    무아법에는 그 어떤 ‘내가’라는 상도 붙어서는 안 된다.

    결국에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무아’라는 진리를 깨닫는 데 있다.
    무아의 진리를 깨닫는다는 말은
    삼법인을 깨닫는다는 말이며,
    공성을 깨닫는다는 말이고,
    연기법, 중도를 깨닫는다는 말과도 같다.

    또한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 ‘무소득’을 깨닫는다는 말이기도 하며,
    화엄경의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법화경의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열반경의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의 가르침과도 같으며,
    조주스님의 ‘방하착’이나,
    무소유, 무분별, 무자성, 무소득의 가르침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의 가르침,
    ‘응무소주 이생기심’,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등의
    사구게의 가르침이기도 한 것이다.

    이 말을 간단하게 풀어보자.
    항상하지 않고 실체적인 것이 없으며 그렇기에 일체가 괴로움이라는
    삼법인의 가르침 때문에 무아인 것이고, 공인 것이다.
    ‘나’와 ‘세상’을 비롯한 일체의 삼라만상 오온이
    결국에는 다 항상하지 않고 실체가 없는 무아이고 공이다.[조견오온개공]

    ‘나’라는 실체가 있으려면 항상해야 하고 고정되어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지 못하니 ‘나’가 아닌 ‘나 없음’ 즉 무아인 것이다.
    항상하고 실체적인 것이 없으니 집착할 것이 없고[무집착, 방하착],
    얻을 것이 없으며[무소득],
    언제까지고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없다.[무소유]

    집착이란 언제까지고 항상하길 바라는 마음인데
    존재의 본질이 제행무상이고 제법무아이니
    집착은 결국 괴로움을 부를 뿐이다.

    그러면 그렇게 일체가 다 공이고, 무아라고 한다면
    도대체 이렇게 움직이는 ‘나’는 무엇이고,
    눈에 보이는 ‘대상’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무아라면 내가 없다는 말인데,
    분명 우리 눈앞에는 내가 있고 상대가 있지 않은가.
    그것은 다 인연[연기법]의 나툼일 뿐이다.

    수많은 크고 작은 인연들로 인해 잠시
    ‘나’도 만들어지고, ‘대상’도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연이 다 하면 누구든 사라지고
    또한 다시 인연이 모이면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즉, 내 눈앞에 펼쳐지는 생사와 윤회
    또 이 모든 존재들과 그 존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으며 환영과 같은 것일 뿐이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일체 모든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범소유상 개시허망]

    앞서 말했듯 그 허망한 상이 여러 모양으로 나투는 법칙이 바로
    연기법, 인연법, 인과응보인 것이다.
    바로 이 점, 일체 모든 존재는 다 환영과 같이
    허망한 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아는 것,
    그것을 바로 관하는 것이 바로 수행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즉 모든 상이 허망하며 무아이고 공하여 상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보면
    바로 여래를 보는 것이다.[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이와같이 다만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인연따라 잠시 모였다가 흩어질 뿐이다.
    고정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인연따라 많이 베풀었다면 부자로 태어나는 것이고
    인색하게 살았다면 가난하게 태어나는 것이다.
    인연따라 생사가 벌어지고,
    아름다움과 추함, 크고 작음, 옳고 그름이 생겨날 뿐이다.

    그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아름다움도 영원하지 않고 추함도 영원하지 않다.
    크고 작다는 것도 옳고 그르다는 것도
    다만 인연따라 그렇게 보일 뿐이지 고정된 것은 없다.

    그렇기에 연기법의 세계, 무아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분별할 것이 없다.[무분별]
    그렇기에 어느 한 쪽으로 고정짓는 극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크다거나 작다거나,
    잘났다거나 못났다거나 하는 극단은 어리석은 견해일 뿐이다.
    그렇기에 연기법, 무아의 세계에서는 어디에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
    오직 중도만이 지혜를 전해 줄 뿐이다.[중도]

    나고 죽는 것 또한 인연따라 잠시 변화하는 것 뿐이지
    영원한 마지막과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생사가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생사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생사는 껍데기의 변화에 불과하다.
    그 본질에는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나고 죽지 않는 영원한 안식처가 있다.[생사즉열반]
    일체 모든 존재는 본래부터 적멸의 모습이다.[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그렇기에 생멸에 집착함을 놓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생멸멸이 적멸위락]

    바다는 항상 고요하지만 물결은 날씨에 따라 항상 변화하는 것 처럼,
    우리의 본질에는 대 열반의 적요가 있지만
    우리의 껍데기는 항상 울고 웃고 변화한다.
    우리의 저 깊은 존재의 심연에 있는 바다와 같이 고요한 그것을
    열반이라고도 하고 해탈이라고도 하며 적멸, 혹은 깨달음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즉 삼법인이지만 그 본질, 근원에는
    무상, 무아, 고를 완전히 여윈 대 열반의 적멸이 있는 것이다.[열반적정]
    바다의 물결은 인연따라 거세게 몰아쳤다가 잔잔해지기를 반복한다.
    마치 우리의 삶과 같이 인연따라
    울고 웃고, 행복하고 불행하고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물결도 결국에는 바다 그 자체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울고 웃으며 중생으로써 살고 있는 듯 보여도
    사실은 지금 이 모습 그대로가 바로 참부처인 것이다.[자성불]
    본래부터 부처인 것이다.
    물결이 바다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이
    물결도 본래는 바다와 하나이듯,
    우리도 중생이니 부처가 되겠다고 애쓸 것 없는 본래부처인 것이다.[본래불]

    그런데 전도된 몽상[전도몽상] 때문에
    우리는 물결의 움직임에 울고 웃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물결이 곧 바다인 것을,
    중생이 바로 부처이며, 생사가 곧 열반인 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 방법은 오직 잘 지켜보는 길[관] 밖에 없다.
    물결이 바다가 되겠다고 자꾸만 애쓰고 고생하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다만 물결 스스로 자신의 성품을 잘 관찰해 보기만 하면 된다.

    있는 그대로 인연따라 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잘 관찰했을 때
    결국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이면에는
    본래부터 고요했던 대 적멸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결이 곧 바다였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일체 모든 존재들은
    대 적멸이라는 본 바탕 위에
    잠시 인연따라 나고 죽고, 울고 웃으며,
    온갖 행복과 불행의 연장인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이다.

    인연에 따른 변화가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에 순응해야지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응무소주 이생시심]
    즉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무집착, 방하착]

    그렇기 때문에 그 변화를 타고 흘러야 한다.
    그 흐름을 타야 한다.[수다원]
    변화[제행무상]야 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인 것이다.

    그러니 그 인연의 변화에 일체를 내맡길 수 있어야 하고
    순응하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섭수]
    일체의 인연을 받아들이면서 어떤 곳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방하착],
    오직 순간 순간 비추어 보고[관조],
    ‘나’라는 고정된 집착을 놓아버려
    본래 자성부처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자성불]

    이상에서 간단하게나마 가르침과 경전의 핵심 경구들을
    하나 하나 풀어 보았는데,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경전이든, 어떤 교리든, 또 어떤 선지식의 말씀이건
    모두가 하나로 회통되는 가르침이다.

    수많은 불교 교리가 다 따로 따로 떨어져 다른 가르침이거나,
    팔만사천의 수많은 경전이 다 다른 가르침이거나,
    스님들의 온갖 다양한 방편설법이 다 다른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도 회통되는 가르침인 것이다.

    다만 이러한 수많은 방편과 경전과 교리가 나오게 된 것은
    모두가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근기와 다양한 수준에 맞게
    방편의 설법을 하다보니 그렇게 복잡 다단해 지게 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불교가 복잡하고 어렵다고 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삶과 생각이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을 바로 보아야 한다.
    불교는 아주 단순한데 사람들이 너무 복잡하고 정신 없으며 어렵게 살다 보니
    부처님 가르침도 그 복잡한 사람들의 근기에 일일이 맞추어 법을 설하시다 보니
    불교가 어렵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어쨌거나 불교를 공부하는 수행자는
    단순하고도 명확하게 잘 회통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한 가지 가르침을 붙잡고
    그 안에서 일체 모든 경전과 교리가 다 나온 것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이 경전이 더 좋으냐 저 경전이 좋으냐라고 따진다거나,
    이 교리가 더 훌륭한지 저 교리가 더 훌륭한 지를 따진다거나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수행법이 더 좋은가 저 수행법이 더 좋은가를 따질 것도 없다.
    모든 수행법도 다 방편일 뿐 결국에는
    그 궁극의 한 곳으로 가는 수많은 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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