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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장을 깨끗이 맑힘金剛經 2012. 2. 3. 06:40
업장을 깨끗이 맑힘
“또 수보리야,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도
만일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 이유는 응당히 악도에 떨어질 만한 전생의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곧 소멸될 것이고,
따라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내가 과거 무량 아승지 겁 전의 과거를 생각해 보니
연등부처님 뵙기 전에도
팔만 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어 헛되이 지냄이 없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내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과 내지 어떤 산술적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녀인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여 얻는 공덕을 내가 다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가히 헤아릴 수 없다.
업을 깨끗이 맑히는 법을 설해 놓은 이 분이야말로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살아야 하는지를
인과와 업보의 관점에서 쉽게 설해주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수행을 하고 금강경 공부를 하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이미 나는 깨끗해졌고 맑아졌으며
모든 괴로움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수행과 기도를 하며, 절에도 다니고, 경전 공부도 하니까
나에게는 괴로움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이제 막 수행을 시작해 놓고,
혹은 이제 겨우 몇 년에서 몇 십년 마음공부를 실천해 놓고
‘이제 나는 행복해 질 것이다’라고 바라지 말라.
절에 다니니까 나쁜 일은 모두 사라질 것이고
좋은 일만 올 것이라고 믿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은 새벽에 기도를 하고 출근했으니
오늘 하루 재앙은 말끔히 소멸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도 수행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진리란 그렇게 단편적이지 않다.
물론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지금 이 순간 수행하고 있고, 마음을 관하고 있으며,
순간 순간 깨어있을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영락없는 깨달음의 향기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느 한 쪽으로 고정지으면 안 된다.
내가 바라는 쪽으로, 좋은 일만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수행 잘 하고, 마음 관찰 잘 하면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쪽으로 고정을 지으면
그 어리석은 마음으로 인해 깨어있음의 향기는 곳 사라지고 만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더라도
업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업이란 과거 우리가 몸과 말과 뜻으로 지어 온 온갖 행위이기 때문에
그 업의 힘은 여전히 남아서 우리의 현실을 투영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마음을 비추어 보고,
수행하고,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업의 문제까지 다 소멸시킬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이다.
경전을 통해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또 수보리야,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도
만일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 이유는 응당히 악도에 떨어질 만한 전생의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곧 소멸될 것이고,
따라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만약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열심히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하자.
이 금강경을 열심히 서사하고 수지독송하며 위인해설한다고 하자.
금강경을 늘 수지독송하며 깨어있는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
분명 이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진리 속에서 숨쉬고 있으며,
진리 안에서 환희심과 기쁨에 넘쳐 있을 것이다.
매일 금강경을 사경하고 7독씩 독경 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금강경을 공부하고 남을 위해 해설해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 사람들은
‘내가 금강경 수행을 열심히 하니까 좋은 일들만 많이 생길 것이다’ 라거나,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는데 나쁜 일이 설마 일어나겠어?’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내가 이만큼 수행하니까
그만한 보상은 따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뒤따른다.
그리고 그 보상은 내 관점에서
내가 좋은 쪽의 일들이 많이 일어나 주고,
나에게 나쁜 일들은 일어나지 않고 비켜가기를 바라는 쪽으로
생각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좋은 일’ ‘나쁜 일’이라는 것은
‘내 생각’일 뿐이다.
내 생각에 좋은 일이고 나쁜 일일 뿐이지
법계의 생각이거나, 진리의 생각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돈도 잘 벌리고, 남들에게 칭찬도 많이 들으며,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을 생각하고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진리의 견해가 항상 ‘내 생각’과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지 말라.
진리의 생각은 다를 지 모른다.
물론 진리 또한 그러한 내 생각과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도울 수도 있다.
그리고 물론 기꺼이 그렇게 해 주곤 한다.
기도하는 자의 밝고도 간절한 서원은
법계를 감동시킬 수 있기 때문에
분명 진리의 세계에서는 수행하는 자의 원을 듣고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법계의 견해는 당장에 ‘내 생각’과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내 생각’이란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기 쉬우며,
좋고 나쁜 두 가지를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좋은 것을 선택하는 데에만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계에서는 좋고 나쁨이 없는 대긍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법계에서 수행하는 자의 원을 들어주는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좋은 쪽일 수도 있지만
나쁜 쪽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분명 그것은 대긍정을 위한 일시적인 나쁨이란 말이다.
법계란 늘 좋고 나쁨을 뛰어넘는
무분별의 진리만을 나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경전을 독송하고 금강경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도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열심히 수행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업신여기며 미워하고 심지어 욕을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길까?’
하고 괴로워할 것이다.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해 그런가’ 싶기도 할 것이고,
‘수행을 해도 별 소용 없구나’ 싶기도 할 것이며,
때때로 ‘이 수행이, 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리석은 중생들의 마음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당장에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만
좋은 일인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계의 입장은 다르다.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좋은 일이 다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인과응보의 이치, 업보의 이치를 관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근원적인 ‘좋은 일’
다시말해 좋고 나쁨을 뛰어넘는 대긍정의 진리를 나투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수행을 열심히 하는데도 사람들이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전생의 업에 대한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
전생에 내가 지은 업을 언젠가는 받아야 할 터인데,
금강경 수행을 열심히 할 때 받음으로써
그 업은 금강경의 밝은 광명에 녹아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금강경 독경을 열심히 하는데도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것은 업이 녹느라고 그러는 것이다.
업장이 소멸되느라 그러는 것이란 말이다.
수행하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면
마땅히 악도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아야 할 것인데,
다행히도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수행공덕으로
가볍게 남의 업신여김을 당하는 정도에서 그칠 수 있는 것이다.
악도에 떨어질만한 업장을 과거에 지어 놓았다면
그 결과를 받지 않을 수는 없다.
업이란 반드시 그 과보를 받아야 녹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업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수행하는 사람은 업보를 받지도 않고
나쁜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라는 기대는
인과응보를 모르는 어리석은 이의 얄팍한 이기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악도에 떨어질만한 악업을 지었지만,
이렇게 금강경 밝은 가르침을 얻어 듣고 수지독송하게 되면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정도로
그 과보를 받음으로써 업장을 말끔히 소멸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소멸될 것이고
전생의 죄업이 모두 소멸되어야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업장이 무겁게 남아 있는데
어찌 깨달음과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이처럼 진리는 항상
무량수 무량광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절대 긍정의 차원에서 모든 일을 진행시킨다.
당장에는 욕을 얻어먹거나, 남의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나쁜 일이 일어나는 듯 해 보여도
사실은 그것이 내 업을 녹이는
‘능정업장’의 길임을 이 분에서는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금강경 수지독송의 공덕이다.
일반적으로 수행을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는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수행을 시작하면서 더욱 마장도 많이 생겨나고
자꾸만 나쁜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능정업장,
업장을 능히 맑히기 위한 법계의 배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100일 기도를 시작했는데
오히려 기도하지 않을 때보다
더 좋지 않은 일들이 자꾸만 생긴다면
그것이야말로 기도의 힘으로 업장을 녹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셈이다.
가만히 놔둔다면 지옥에 떨어질 지 모르는 업장을
기도 중에 오는 온갖 마장을 받아들이고
내 안에서 기도로써 녹임으로써 맑게 해탈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자는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당당히 가야할 길만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
사사로이 눈앞의 좋고 나쁨을 따져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란다면
대장부의 걸림없는 지혜의 길이라 할 수 없다.
참된 지혜는 좋고 나쁨을 초월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하는 수행자는 굳게 믿고 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좋고 나쁜 그 모든 일이
모두 다 진리의 길이며,
부처님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끌기 위한 길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당당해 진다.
완전히 내맡기면 자유로우며 걸림이 없다.
사사로운 ‘나’를 놓아버리고,
내 안의 참나, 내 안의 자성 부처님께
일체 모든 것을 완전히 내맡기고 살아간다면
우리 앞에 놓인 그 어떤 경계나 그 어떤 역경과 괴로움 조차도
즐거운 대 긍정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수행자의 힘은 이와 같은 마음에서 온다.
이같은 대 긍정의 마음, 대 수용의 마음, 대 신심의 마음에서 오며,
나를 놓아버리고 내 안의 본래자리에 완전히 믿고 맡기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이 정도의 마음이 수행자의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면
얼마나 걸림 없고 자유로울 것인가.
그 어떤 일이 우리를 휘두를 수 있으며,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이처럼 금강경 수행자의 길은 당당하고 훤칠하며 걸림없는 길이다.'金剛經'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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