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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가지 금강경 수행법金剛經 2012. 1. 31. 06:26
3가지 금강경 수행법
첫째,
서사라는 것은 베껴 쓴다는 말로
다시 말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경수행법을 말하는 것이다.
경전의 가르침을 하나 하나 베껴 쓴다는 것은
그만큼 그 가르침에 집중하고 몰두할 수 있는 방법이다.
보통 사람들은 경전을 보더라도 소설책을 읽듯이 그저 읽어내려가곤 한다.
그러나 경전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니다.
경전은 단순히 읽어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하나가 되는 작업이다.
경전의 가르침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면
온 마음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 생각이나 판단, 혹은 이전에 배워 온 것들로써
경전을 해석하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저 있는 그대로 하나도 남김없이 베껴야 하는 것이다.
책을 베낀다는 것은 똑같이 다시 쓴다는 말이다.
그처럼 우리가 경전을 볼 때도 똑같이 베껴야 한다.
내 안의 생각이나 판단, 관념들로써 걸러 들어서도 안 되고,
내가 원하는 부분만을 가려 읽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듣는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내 생각이며 편견들을 경전에 비춰
보다 견고히 하는 아견을 증장시키는 일 밖에 되지 못한다.
경전을 볼 때는 반드시 사경을 해야 한다.
스승의 가르침을 들을 때도 사경을 해야 한다.
사경이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베끼는 작업이다.
의심하지 말고, 해석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
다만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베껴야 한다.
그래서 그 가르침이 그대로 내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 가르침이 내 안에서 물결치도록 내버려 두라.
가르침을 내 생각으로
간섭하려 하거나, 취사선택하려 하지 말라.
그저 가르침이 내 안에서 활짝 꽃피어나도록 놓아두라.
내식대로 가르침을 취사선택해서는 안 된다.
있는 그대로 글자 하나 빼놓지 말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경 수행을 하는 이유다.
다만 글로써 베끼고 쓰는 것만이 사경인 것은 아니다.
마음 안에 베낄 수 있어야 한다.
내 견해를 다 놓아버리고, 맑고 텅 비게 한 다음
아무런 시비 분별이나 판단 없이 다만 경전을 내 안에 베껴 새기라.
경전을 올바로 베껴 사경할 때
그 사경은 그 어떤 고정된 견해가 아니다.
그대로 베꼈을 때 자유롭다.
내 견해로써 색안경으로 투사한 것을 베꼈을 때는
내 견해 속에 스스로 빠지게 되지만,
완전히 베끼고 사경했을 때
그 가르침은 물처럼 유연하며 허공처럼 활짝 열려있는,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대 자유의 가르침으로 물결친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는
사경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부처님께서 몸소 행하셨던 사경을 설해 주고 계신다.
“선남자여, 항상 부처님을 본받아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사바 세계에 오시기까지 법신인 부처님께서
처음 발심한 때로부터 정진하여 물러나지 않으시고
수없이 많은 몸과 목숨을 보시하고,
살갗을 벗겨 종이를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서 경전 사경하기를 수미산만큼 하셨다.
부처님께서는 법을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에
사경을 위해 이렇게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왕의 자리나 궁전, 정원 등의 일체 소유와
갖가지 어려운 고행이 무슨 장애가 될 수 있었겠느냐.”
살갗을 벗겨 종이를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서 경전 사경하기를 수미산만큼 하셨으며,
그만큼 법을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에 사경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다.
목숨은 유위이며 다만 인연따라 오고 가는 것일 뿐이지만,
부처님의 법을 지니고 사경하는 공덕은 무위이며
일체 윤회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수지독송을 말씀하셨다.
수지독송은 말 그대로 잘 받아 지니고 독송한다는 말이다.
서사하고 사경함으로써
내 안에 법이 있는 그대로 편견없이 받아들여지고 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잘 받아지닌 것을 독송함으로써 항상 잊지 않아야 한다.
신구의 세 가지로써 업을 짓고 사는 우리들은
몸과 말과 생각을 통해 이 세상을 만들어 간다.
수행 또한 이 세 가지를 방편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몸으로써 서사하며 마음으로써 수지하며 말로써 독송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듯 몸과 말과 뜻으로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신구의 삼업이 맑게 정화되고 진리로써 하나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금강경을 수지하고 독송하는 공덕은 유위가 아닌 무위이다.
그렇다고 수지하지 않고 독송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유위의 공덕에 머물고 만다.
즉, 내 안에 그 참 뜻을 올바로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나날 동안 금강경을 독송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흡사 이해하지도 못하는 책을
입으로만 외워대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것은 참된 수지독송이 아니다.
그래서 독송에는 꼭 수지라는 말이 함께 따른다.
마음으로 온전히 그 뜻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참된 앎과 이해, 즉 경전에 대한 밝은 지혜 없이
입으로만 독송한다 한들 그것이 어찌 무위의 공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금강경의 수지독송 수행법 때문에
오래도록 불가에서는 금강경 독송을 주요한 수행법으로 알고 실천해 왔다.
매 예불과 기도 때마다 1독, 3독, 7독,
혹은 21독에서 108독씩 늘 독송하며 정진해 왔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도록 금강경 독송 수행이 내려져 오다 보니,
자칫 금강경 수행이 독송 그 자체에
그 어떤 공덕이 있고 영험이 있는 것인 줄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금강경의 뜻을 전혀 모르더라도
매일 3독, 7독을 하면 그 자체에 엄청난 공덕이 쌓인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 뜻을 모르고서라도
마음을 맑게 비우고 또한 밝게 비추면서 금강경을 독송하게 된다면
지관수행의 공덕이 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수지독송이란
금강경의 참 뜻을 올바로 깨닫도록 하기 위해
독송 수행을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혹 금강경 독송만 매일 하면
무조건 업장이 소멸된다거나, 밝아진다거나 하고
금강경 독송 그 자체에 그 어떤 상을 가져다 붙이고 있지는 않은가
비추어 볼 일이다.
그것은 금강경에 또 다른 상을 부여하는 일이다.
일체의 상을 타파하도록 이끄는 금강경의 가르침에
또 다른 상을 가져다 붙이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셋째로
위인해설의 수행법이다.
이것은 서사와 수지독송으로
우리 안에 금강경이 물결치고 꽃피우는 것을
일체 모든 중생들을 위해 회향하도록 이끄는 수행방법이다.
진리가 우리 안에 꽃피어날 때
저절로 우리 안에는 일체 중생을 향한 대자비의 동체대비심이
함께 꽃피어 나게 된다.
지혜는 곧 자비와 한 몸이기 때문이다.
금강경 수행을 통해 일체의 상이 타파되면,
‘나’와 ‘너’를 나누는 분별이 사라지고,
일체는 모두가 ‘전체로써의 하나’가 된다.
그러니 그 이전에는 내가 배고플 때만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데,
전체가 그대로 내 몸이 되다 보니
그 어떤 중생이 배고플 때 그것이 그대로 나의 일이 되며,
일체 중생이 어리석을 때
그것이 그대로 나의 어리석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동체대비심이 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체대비심이란 말 그대로 동체,
즉 같은 몸이라는 자각에서 나오는 대자비의 마음이다.
동체대비심은 일체의 상이 타파되는 금강경의 실천에서 나온다.
완전히 금강경을 깨닫게 된다면
물론 위인해설이라는 수행법을 따로 만들어 둘 필요도 없다.
저절로 동체대비가 성숙해 지면
남을 위해 연설하고자 하는 마음은 저절로 따른다.
완전히 깨닫고 난 뒤에 남을 위해 설법해 주면 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분별일 뿐이다.
완전히 깨닫고 난 뒤에는 그런 생각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직 서사와 수지독송이 완전해 지지 않은 중생들에게는
위인해설로써 동체대비심을 기르는 연습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때다.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자가
바로 나의 위인해설의 대상이다.
일체 중생에게 법을 설해주겠다거나,
법보시를 하겠다거나 하는 생각도 다 부질없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다만 지금 이 자리에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가 바로 내 전법의 대상이다.
유위의 세상에서는 유위의 공덕이 뒤따른다.
남에게 설법을 많이 해 주는 공덕을 짓는다면
설사 그 사람이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일지라도 유위의 공덕은 뒤따른다.
위인해설과 법보시, 전법의 공덕은
대선지식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는 공덕이 뒤따른다.
내가 알고 있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법을 전하라.
법보시의 공덕은 스승을 얻는 공덕을 얻고 나아가 깨달음의 공덕이 된다.
저 많은 수행자들이 스승이 없어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을 보라.
인류의 수많은 수행자들의 공통된 소망은 바로 참스승을 찾는 일이었다.
참스승을 바로 찾게 되면 애써 돌아가지 않고도 바로 성품을 볼 수 있지만,
스승 없이 깨달음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법보시로써 스승이 되어줄 때
그 유위의 공덕이 무르익는 어느날
저 인도의 석가모니와 같은 부처님을 나의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
열매가 열릴 것이다.
어쩌면 앞서 금강경 1분에서 금강경의 설법은 이미 끝마쳐졌다.
또한 구구절절한 설명 또한 14분까지 오면서 이미 다 설해 마쳤다.
지금부터의 금강경 강의는 앞서 했던 말씀에 대한
보충설명 정도이거나 부처님의 자비심에 의한 되풀이 되는 법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까지 공부해 온 독자 수행자들에게
금강경의 가르침은 저 깊은 심연에서의 어떤 나직한 떨림
혹은 아직 활찍 피지 않은 봉우리로써 꽃피울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봉우리가 우리 가슴 속에 몽우리져 있다.
물론 그것은 금강경을 공부하기 전에도 그랬고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그랬으며,
우리 뿐 아니라 온 우주 삼라만상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가 다 그러하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금강경을 공부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 꽃봉우리는 더욱 선연한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에서는 이 중요한 지금의 시점에서
금강경을 우리 안에서 완전히 꽃피우도록 할
이상의 세 가지 수행법을 제시해 주고 계신 것이다.
이제 앞으로 남은 금강경의 가르침을 주시하면서
한편으로 더 중요한 것은 그 가르침이 우리 안에서 고동칠 수 있도록
이 세 가지 수행법을 실천하는 일이 남아 있다.'金剛經'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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