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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는 것도
    金剛經 2012. 1. 26. 06:44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는 것도
    즉 머무름 아님이 된다.

    마음이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고 했는데,
    사실 마음이 머물러 있다는 것도 사실은 머무름이 아니다.
    본래적인 진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디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고,
    머물 주체가 없으며, 머물 곳이 없거늘,
    어디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머물러 집착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집착할만 한 것도 없다.
    집착이라는 것 또한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꿈에 집착한다고 하지만
    실은 꿈을 깨고 보면 집착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집착한다고 생각하지만
    환상으로 환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환상은 환상일 뿐 실체가 될 수 없다.
    꿈 속에서 집착하고 아파할 수는 있지만,
    그래서 그 꿈 속에서는 죽을 것 같고 아파 미치겠지만
    꿈을 깨고 보면 그것이 실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금새 깨달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집착했지만 사실은 집착이 아닌 것이다.

    연극의 주인공은 사랑하고 아파하며 집착하고
    그 연극 속에서 필요한 모든 마음을 다 일으킨다.
    그러나 그것은 연극일 뿐 실제가 아닌 줄 알기 때문에,
    사랑하고 아파하며 집착하지만 마음이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다.

    집착 없이 집착하고 집착 없이 사랑하며,
    집착 없이 아파하고 즐거워하고 있을 뿐이다.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뿐이다.

    사실은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집착 없이 살고 있다.
    머물러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머무름 없이 살고 있다.

    그렇기에 선지식 큰스님들께서는
    깨닫고 보니 깨달을 것이 없고, 닦을 것이 없으며,
    집착을 버릴 것도 없고, 무언가 끊어낼 번뇌가 없다고 하셨다.
    이미 다 이룬 부처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생노병사에 얽매여 고통받고 있지만,
    사실은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가 꿈 속에서 일어나는 것 처럼
    환상이고 꿈이며 신기루와 같은 것임을 보신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이룰 것이 있는가.
    우리는 이 자체로써 이미 다 이룬 부처이며, 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진리를 깨달은 입장에서 본다면,
    더 이상 깨달을 것도 없고,
    무언가를 구할 것도 없으며,
    수행해서 진리를 깨닫겠다는 것도 다 허망한 말일 뿐이다.
    깨닫고자 노력하고 애쓰는 그 자체가 벌써 어긋나 있는 것일 뿐이다.

    이미 우리는 본래부터 부처였으며,
    본래 다 깨달아 있던 것이다.
    본래부터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고 있었으며,
    집착 없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머무름 있다는 것도 사실은 머무름 아닌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보살은 응당히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다’고 설했던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보시도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 것이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 보살이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보시할 수 있겠는가.

    보살은 보살도를 실천하며,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하화중생하지만,
    스스로 보시한다는 생각이 없다.
    스스로 보시를 하면서도 보시한다는데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다.

    이 몸(색)에 집착하여 이 몸을 더 편히 하겠다는 생각이라거나,
    이 몸이 깨달음을 이루자거나,
    내가 널리 보시하여 일체 중생을 구함으로써 큰 복덕을 누리자거나 하는
    그런 색에 머무는 보시를 하지 않는다.
    ‘나’에 집착하고, 육신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보살은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보시하지도 않는다.
    그 어떤 일체 육근의 대상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름이 없다.
    보다 좋은 소리를 듣겠다거나,
    보다 좋은 향기와 맛과 감촉이나 법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름이 없다.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함으로써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보살 스스로는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보시하겠다는 상이 없다.

    나와 너라는 상대 개념이 없으며, 좋고 싫다는 분별도 없고,
    중생과 부처라는 차별이 없고, 생사와 열반이라는 생각 또한
    텅 비어 공적할 뿐이다.

    보살은 어떤 한 생각도 일지 않는다.
    무심일 뿐이다.

    마음으로 무언가를 행하거나,
    마음으로 깨닫고자 하거나,
    마음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마음 자체가 없다.
    일으킬 마음도 없고, 닦을 마음도 없으며,
    깨달을 마음 또한 완전히 텅 비어 있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보살의 광대무변하고 원만한
    일체 중생을 향한 무분별의 보시이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상을 타파하라고 했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
    일체 모든 상이 개시허망이므로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것도 없다.
    타파할 상이 없다.
    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공연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가운데,
    중생들이 홀연히 꿈처럼 망상을 일으켜 상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 낸 상 또한 상이 아니다.
    상이라고 분별을 일으켰을 뿐이지 그것은 상이 아니다.

    상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
    스스로 그 상에 빠지고 걸리며 집착을 일으킴으로써
    울고 웃고 해 왔지만 여전히 상은 생겨난 적도 없고 소멸된 적도 없다.

    다만 저 혼자서 상을 만들고 깨고
    그러면서 상을 만들었을 때는 중생이라고 생각하며
    상을 깨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상을 깨버린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이름 짓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중생이 수행을 통해 열반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이 만들어 낸 공일 뿐이고, 망상일 뿐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중생도 마음도 부처도
    이 셋은 서로 차별이 없다고 했다.
    중생이 마음을 닦는 과정을 통해 부처를 이룬다는 것 자체가 공한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중생이고 무엇이 마음이며
    무엇이 수행이고 무엇이 부처인가.
    다 꿈 속의 일일 뿐이다. 다 신기루이고 물거품이며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중생이 따로 없고 부처가 따로 없다.
    부처님께서 지금까지 설하신 상이라는 것, 중생이라는 것은
    다만 방편일 뿐이다.

    홀연히 상을 만들어 내,
    그 상에 갖히고 집착해 있는 자신을 중생이라고 하여 얽매이니까
    ‘그게 아니다. 상이 상이 아니다.
    무릇 모든 상이 다 허망한 것이다.
    상이 상이 아님을 볼 때 부처를 볼 것이다.
    중생도 중생이 아니며 부처도 부처가 아니다.’
    라고 설하고 있을 뿐이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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