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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된 인욕이란?[
    金剛經 2012. 1. 20. 06:31

     

    수보리야,
    여래는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잘림을 당했을 적에
    내게는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과 수자상도 없었다.

    만약에 내가 옛적에 사지를 마디마디 베이고 잘렸을 때
    만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다.

    수보리야, 또 여래가 과거에 오백 생애 동안
    인욕 성인이 되었을 때를 기억해 보더라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일체의 상을 타파한 사람이다.
    일체의 상을 타파했으므로 이러한 가르침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더 이상 반야바라밀에도 집착하지 않고
    보시바라밀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인욕바라밀에도, 육바라밀에도,
    나아가 부처님의 그 어떤 가르침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지만 그 모든 가르침을
    집착함이 없이 다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또 제일바라밀에 이어 또 하나의 비유로써
    인욕바라밀을 들고 계신다.

    인욕이란 어떤 괴로움이라도 잘 참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억지로 참는다거나,
    마음 속에 꾹꾹 눌러 놓고 쌓아 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참된 인욕이란
    참되 참는다는 생각마저도 다 소멸된 참음이다.
    참는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참는 나’가 있다는 말이다.

    즉 ‘나’라는 아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참음이 아니라
    ‘나’라는 것이 완전히 소멸되고,
    일체의 상 또한 모두 소멸된 가운데 참는 것을 말한다.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라고 했다.
    인욕바라밀이라고 말하면서 인욕바라밀을 행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인욕바라밀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인욕바라밀을 행하는 자는
    ‘내가 인욕바라밀을 행한다’는 상이 없다.
    그러한 수행자에게 인욕바라밀은 인욕바라밀이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에 인욕선인으로 계실 때,
    고요한 숲 속 나무 아래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는데,
    마침 그 나라의 왕인 가리왕이 사냥을 나와 있었다.

    가리왕이 산 중에서 사냥을 하다가 잠을 자고 깨어 보니
    함께 온 시녀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 때 함께 온 시녀들은
    나무 밑에 앉아 선정에 들어 있는 인욕선인을 발견하고는
    그 모습이 너무나 청정하고 고귀해 보여
    친견하고 예를 올리고 있던 차였다.

    이 광경을 본 가리왕은 질투심으로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말하기를,
    “어찌 방자하게 남의 여색을 탐하는가” 라고 하니,
    선인은 답하기를
    “나는 여색을 탐하지 않습니다. 나는 인욕을 닦는 수행자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얼마나 인욕을 잘 하는가 두고보자’ 싶은 마음에
    인욕선인의 코를 베고, 팔을 베고, 다리를 베면서
    사지를 갈기갈기 잘라 놓고는
    “네놈이 이래도 화가 나거나, 원망하는 생각 없이 참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었다.

    이에 인욕선인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거늘 어찌 화를 내거나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답하였다.

    인욕 선인은
    육신이 ‘나’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육신이 베이고 잘림을 당하였지만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억지로 참아 가슴 속에 화를 담아 둔 것이 아니라
    청정한 인욕바라밀을 실천할 수 있었다.

    그것은 화를 낼 ‘나’가 없으며,
    원망할 ‘나’가 없다는 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의 인욕선인으로
    사지를 찢기고 베일 때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다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지만,
    부처님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에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육신이란 다만 인연의 모임에 불과한 것이다.
    밥과 반찬이 내 앞에 있을 때
    우리가 그것을 먹는다는 인연에 따라
    밥과 반찬이 인연따라 내가 된 것일 뿐이다.

    밥과 반찬이 나로써 윤회를 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대소변으로 빠져 나가거나,
    땀으로 빠져 나갔다면 그것은 다시금 인연따라 대지로 돌아간 것이다.

    이와같이 일체의 모든 모양 있는 것들은
    인연따라 잠시 우리 몸으로도 변했다가, 흙으로도 변했다가,
    나무로도 변하고, 꽃으로도 변하는 것일 뿐,
    어느 한 모습을 가지고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사과 하나가 있을 때 그것을 칼로 자르면 우리는 화를 내지 않는다.
    사과는 그저 사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과를 내가 먹고 사과가 우리 몸의 살로 변했다고 치자.
    그랬을 때 칼로 살을 자르면 우리는 화를 내고 원망할 것이다.

    그것은 ‘내 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그 몸이 ‘내 것’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다만 사과가 변한 것에 불과하다.
    내가 먹은 것이 내 몸으로 잠시 변화하여 인연따라 나툰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내 몸을 칼로 그었을 때 괴롭거나 화를 내려거든,
    사과를 칼로 자르거나, 나무를 칼로 자를 때도
    똑같이 화를 내고 원망해야 할 것 아닌가.

    이처럼 세상의 모든 모양 있는 것들은
    다만 인연따라 끊임없이 모양을 변화시킬 뿐,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다.

    내가 죽어 다음 생에 개나 돼지로 태어났다고 치자.
    그러면 이번 생의 내가 나인가, 다음 생의 개나 돼지가 나인가.
    또 그 다음 생에는 천상에도 태어날 것이고,
    또 그 다음 생에는 지옥으로도 태어날 것이며,
    어떤 생에는 여자 몸을 받았다가 또 어떤 생에는 남자 몸을 받게 될 것인데,
    어느 한 때를 콕 찝어 ‘나’라고 고정지어 말 할 수 있겠는가.

    어느 것도 ‘나’가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변화하기만 할 뿐.

    이와같이 부처님께서는 과거 오백 생 동안 인욕 선인이 되었을 때에도,
    수없는 생을 윤회하고 육신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한 번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지니,


    그러므로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무상정등정각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마땅히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보리심을 일으키되
    일체의 상을 떠나서 일으켜야 한다.

    일체의 어떤 상에도 얽매임 없이, 집착함이 없이,
    머무름이 없이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보리심을 일으킨다.
    수많은 이들이 다 깨달음을 추구하며,
    위없는 대 보리를 증득하고자 수행하고 정진하며 또 보시하고 있다.
    지혜와 복덕을 얻고자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리심을 일으킨 수행자라 할지라도
    그 이면에는 상에 머무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깨닫고자 하는 보리심을 일으키긴 하는데,
    거기에 또 ‘나’를 내세우게 된다.
    ‘내가 깨닫겠다’ ‘내가 보리를 이루겠다’
    하는 아상에 머물러 깨달음을 추고하곤 한다.

    ‘내가 깨달아서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큰 행복을 이루겠다’거나,
    ‘내가 깨달아서 많은 중생을 구제하겠다’거나 하는 등
    깨닫고자 하는 주체를 ‘나’라는 상에 꽁꽁 묶어 두곤 한다.

    혹은 부처라는 상을 만들어 두고, 진리라는 모양을 만들어 두고,
    내가 깨달아 가야 할 이상향을 마음 속에 설정하여
    모양을 만들어 두고는 그 길로 향해 나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진리는 없다. 그런 부처는 없다.
    어떤 모양을 가진 진리, 어떤 상을 가진 부처는 없다.
    모양을 짓고, 개념을 붙이며,
    생각하는 그 속에는 결코 진리도, 부처도 있지 않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상에 머물러 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키되,
    그 어떤 상에 머물러 보리심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참된 구도자의 길이 아니다.

    수행자는 일체 모든 상을 다 타파할 수 있어야 한다.
    ‘나’라는 상도, 부처라는 상도, 진리라는 상도,
    참나라거나, 불성이라거나, 주인공, 진아, 본래자성, 본래불
    그 어떤 말을 가져다 붙일지라도
    그것이 다 방편인 줄 알아야지 거기에 얽매여 집착하고 머물러서는 안 된다.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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