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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金剛經 2012. 1. 25. 06:29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라고 했는데,
    색성향미촉법이란 다시말해
    우리 인간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 육근의 대상,
    즉 빛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을 말한다.
    다시말해 ‘나’라는 주관이 접촉하여 만날 수 있는 일체의 외계 대상을 말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 몸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육근의 대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게 마련이다.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고,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색이란 눈에 보이는 대상인 빛깔과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즉, 우리는 바깥 대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는지에 마음이 머물길 좋아한다.

    사람을 만나더라도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고,
    못난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가.
    그래서 좋은 사람은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쓰고 집착하면서
    싫은 사람과는 떨어지지 못해 안달한다.

    그렇게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이 사람들의 일상이다.
    그러나 몸이라는 것도 어떤가.
    사람의 몸은 그저 똥주머니일 뿐이라는 선지식의 말씀이 있다.
    그야말로 이 몸이라는 것은 온갖 오물같은 오장 육부와
    모든 것들을 집어 넣어 놓은 똥주머니일 뿐이다.

    좀 비위 상하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몸 속의 모든 내장 기관들을 다 끄집어 내 보라.
    그것이 어디 예쁘고 좋을 것이 있겠는가.

    얼굴이 예쁘다는 것도 눈코입 중 어느 하나가
    조금만 살짝 옆으로 옮겨 달렸더라면 못난 얼굴이 되지 않았겠는가.
    이 몸뚱이라는 것, 외모라는 것도
    다 인연따라 잠시 그렇게 몸을 받을 것일 뿐이다.
    어떻게 마음을 쓰는가에 따라
    이 똥주머니의 생김새도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몸에 집착할 것이 무엇인가.
    100년도 못 살다가 대지의 지수화풍으로 돌아갈 육신이거늘
    어디에 집착해 내 것이라고 단정 짓고 소유할 수 있겠는가.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낸다는 것이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낸다.
    칭찬이나 비난을 들을 때 울고 웃으면서
    우리는 그 소리에 많이 휘둘린다.

    칭찬을 들으면 좋아하고 비난을 들으면 싫어하기 때문에,
    칭찬은 더 듣고 싶어 안달이고, 비난은 듣기 싫어 안달이다.
    그러나 칭찬과 비난이라는 소리 또한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다만 소리일 뿐이지 않는가.
    인연따라 잠시 칭찬도 들을 수 있고 비난도 들을 수 있는 일인 것이지,
    칭찬을 들었다고 내가 정말 칭찬받을만한
    실체적인 무엇이 되는 것도 아니고,
    비난을 들었다고 스스로가 비하되거나 못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말에, 소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말에 휘둘린다는 것이 얼마나 짐승스러운가.

    또한 냄새에, 맛에, 감촉에, 생각의 대상인 법에
    우리는 늘 휘둘리면서 산다.
    늘 그러한 육근의 대상에 이끌려
    자기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고,
    그 중 좋은 데 탐심을 내어 집착하고,
    싫은 것에는 진심을 내며 미워하곤 한다.

    그러나 좋고 나쁜 것이 본래 없다.
    그 어떤 육근의 대상도, 그 어떤 색성향미촉법이란 대상도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연따라 잠시 그렇게 꿈처럼 나툴 뿐이다.

    우리가 집착할 그 어떤 실체도 아닌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니 치심이 들끓어 마음을 머물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탐심, 진심, 치심이란 삼독심 생겨나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이 본래 텅 비어 공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다.
    바른 지혜만이 탐진치 삼독심을 끊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일체의 상을 타파하는 길이다.
    일체의 상이 타파될 때 삼독심이 소멸하며
    그 어떤 집착의 대상도 없게 된다.

    그래야 자유롭다.
    어디에도 걸림 없이,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고 집착할 것 없이
    자유롭게 휘적휘적 삶의 길을 내딛게 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십이연기에서는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라는 지분으로 설명하고 있다.
    명색이란 색성향미촉법 육경을 말하며,
    육입이란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말한다.

    육입이 명색을 촉할 때 수가 일어나고
    수는 곧 애를 불러오며 애는 취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촉이란 육근과 육경이 접촉하는 것을 말하며,
    수는 느낌, 감정을, 애는 애욕, 취는 집착을 말한다.

    이렇게 어려운 용어를 써서 그렇지
    쉽게 말하면,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여섯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각각 눈으로는 빛과 모양을, 귀로는 소리를,
    코로는 냄새를, 혀로는 맛을, 몸으로는 감촉을,
    뜻으로는 뜻의 대상인 법을 만날 때(촉)
    좋고 싫은 느낌을 가져오고 그 느낌의 결과 애욕(애)을 일으키며
    그것이 결국 집착(취), 취착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즉 위에서 말한 비유에서와 같이,
    사람이 육근 중 안근인 눈(육근)으로 예쁜 사람(육경)을 볼 때(촉)
    좋은 느낌(수)이 일어나고 연이어 애욕이 생겨나고(애)
    그 결과 그 사람에게 집착(취)하려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이런 집착이야말로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괴로움이 생겨나는 원인이
    이와같은 육근과 육입의 접촉으로 인해 생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금강경에서는 육근을 가지고 육경을 접촉하되,
    육경에 머물러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육근이 있는 이상 육경을 접촉하지 않을 수 없고
    접촉하게 되면 느낌과 애욕, 집착이 연이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육경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면
    십이연기의 중간 단계에서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요소를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조금 더 쉽고 실천적인 부분으로 나아가서,
    어떻게 하면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수, 애, 취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색성향미촉법 육경을 만날 때
    색에도 머물지 않고,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겠는가.

    그 해답을 부처님께서는 정념에 두셨다.
    즉 잘 관찰하고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바로 깨어있는 마음으로써
    잘 관찰함으로써 육경에 머물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눈이 대상을 볼 때,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코로 냄새를 맡을 때, 혀로 맛을 볼 때,
    몸으로 접촉할 때, 뜻으로 헤아릴 때
    항시 육근과 육경을 또 육근과 육경의 접촉을,
    그 접촉에서 오는 느낌을,
    그 느낌에서 오는 애욕과 집착을 마음을 모아 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근본불교의 사념처에서는
    신수심법 네 곳을 잘 관하라고 하고 있다.
    즉 육근이 머물러 있는 신념처,
    즉 우리의 몸과 몸의 감각기관을 잘 관하라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로 육근과 육경이 만날 때 일어나는 수념처,
    즉 느낌, 감정을 잘 관하라는 것이다.

    셋째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경계를 관하며,
    넷째로 법에 대한 관찰을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깨어있는 비춤으로 관하게 되었을 때,
    색에도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게 된다.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하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구마라집의 해석본에는 없지만
    연이어 산스크리트 원본에서는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라고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경전에서는
    법을 진리 혹은 존재로 번역하고 있다.
    제법무아에서의 법은 존재를,
    삼법인에서 법은 진리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 어떤 법이라도 마찬가지다.
    제법무아에서 보듯이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어 무아이고 텅 비어 있는 공 그 자체이다.
    그러니 일체 그 어떤 존재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비존재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을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진리에도 진리가 아닌 것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어디에든 마음이 머물 곳을 정해 두면
    그것은 집착이고 상에 얽매이는 것일 뿐이다.
    진리에도 머물면 안 되고, 부처에도 머물면 안 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일체 그 어떤 것에도 머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
    그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간에 이 마음은 집착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집착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대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여기, 무집착에 있다.

    금강경에서 상을 타파하라는 것도
    상에 얽매여 집착하는 것을 경계한 때문이며,
    근본불교에서 제법무아, 제행무상, 일체개고의 삼법인을 설한 것이며,
    사성제를 설한 것 또한 집착을 타파토록 하기 위함이다.

    선불교에서 방하착하라는 말 또한 집착을 놓으라는 말이고,
    인류의 모든 성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인
    ‘마음을 비우라’는 것 또한 일체 모든 애착과 집착을 비우라는 말인 것이다.

    집착이 없으면 어디에도 마음이 걸리지 않아 자유롭다.
    집착이 없으면 나와 너를 나누는 분별도 사라지며,
    내것과 네것을 나누는 분별도 사라진다.
    집착이 없으면 베풀어도 베풀었다는 상이 생겨날 수가 없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집착 없음에 있다.
    즉 마음을 내되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이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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