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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을 떠난 것이 실상이다
    金剛經 2012. 1. 18. 06:33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해지면
    곧 실상을 깨달을 것이니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임을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설해오신
    이 가르침을 얻어 듣고 그 가르침을 믿는 마음이 청정해 진다면
    그 사람은 곧 실상을 깨달을 것이며,
    이 사람은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이라고 했다.

    이 가르침, 즉 사상을 비롯한 일체의 상을 여의는
    이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맑아지면
    곧 실상을 깨닫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체 상을 여의게 되면
    좋다 싫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등의
    일체 모든 시비 분별을 쉬게 된다.

    시비 분별이 없다면
    좋다고 더 집착하여 잡으려 할 것도 없고,
    싫다고 미워하여 버리려 할 것도 없게 된다.

    일체의 모든 상에 대해
    잡으려 하지도 않고 버리려 하지도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한없이 고요한 적멸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좋은 것(시비분별)을 더 붙잡아(집착) 두려고 하고,
    그래서 그것을 ‘내 것’(아집)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 원인은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아상)

    내가 있으니 ‘내 것’을 더 늘리고 싶고,
    ‘내 것’을 더 늘리려다 보니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집착이 일체의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과정 때문에 사람들은 괴로움에 허덕이고 아파하는 것이다.

    그러니 반대로 그 모든 근본 원인이 된
    ‘나’라는 ‘아상’만 여의게 된다면
    일체 모든 괴로움은 소멸되고 만다.
    ‘나’라는 아상이 없어지면
    ‘내 것’을 늘리려는 마음을 여의게 되고,
    ‘내 것’을 늘리려는 마음을 여의게 되면 자연스레 ‘집착’도 사라지며,
    모든 집착이 사라지면 자연스레
    좋고 싫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분별심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어느 한 가지 상도 내세울 수 없는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상’을 깨달을 것이라고 했는데,
    실상을 깨닫는다는 말은
    따로이 실상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을 깨닫는다는 뜻이 아니다.

    상이 본래 상이 아님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 바로 실상이다.
    상을 여의게 되면 일체 그 어떤 상도 남지 않게 되는데
    그것을 이름붙여 실상이라고 방편으로 표현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라고 했다.

    다시말해 실상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실상이라는 이름을 방편으로 붙였을 뿐이지
    실상이라는 상은 따로 없다는 말이다.

    실상이라는 표현에 어떤 모양을 짓고 상을 짓는다면
    그것은 벌써 실상에서 벗어나 있다.
    실상은 그 어떤 상도 아니기에 실상일 수 있는 것이다.

    흡사 이 말은, 불성은
    그 어떤 상도 아니기에 불성일 수 있다는 말과도 같다.
    보통 사람들은 불성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느냐고 질문을 하곤 한다.
    그 질문에는 ‘내가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어떤 불성이라는 모양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즉 불성이라는 상을 어떻게 만들어 둘 것인가
    하는 마음으로 불성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는 말이다.
    그랬을 때는 그 어떤 답도 내려줄 수 없다.

    불성은 허공과 같다거나, 거울과 같다거나
    억지로 방편으로 그렇게 표현은 해 줄 수 있겠지만
    어찌 불성을 어떤 모양, 어떤 상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불성이란 일체의 상을 여의었을 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 없는 자리가 바로 불성이며 실상이기 때문인 것이다.
    깨달음이 어떤 모양이냐고 묻는다면
    도무지 대답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모양 없는 모양을 어찌 모양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어떠한가.
    실상을 깨달았을 때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이 말도 방편일 뿐이다.

    실상을 깨달아, 일체 모든 상을 여의었다면
    공덕이라는 것도 방편의 말일 뿐이지,
    별도로 공덕이 있을 리 없다.

    일체의 상을 여읜 마당에
    어찌 공덕이라는 또다른 상이 붙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무량한 공덕이라거나 하지 않고,
    ‘희유한 공덕’이라고 했다.

    공덕은 공덕인데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거나,
    어떤 보상이나 댓가로써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듯
    억만장자가 되는 보상이 따른다거나,
    능력과 외모, 성격 등이 출중해 진다거나 하는
    그런 공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체의 상을 여의어 실상이 밝게 드러나면
    그 어떤 공덕도 없다.
    아니 공덕이라는 방편을 쓸 필요조차 없어진다.

    그냥 여여부동하며 성성적적하여
    어떤 한 법도 일으킬 것이 없어지고,
    어떤 한 말 조차 붙일 틈이 없어진다.
    그야말로 텅 비어 충만할 뿐이다.

    그렇기에 공덕이라는 말의 표현을 빌릴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희유한 공덕’이다.

    아무런 시비를 붙일 것도 없고,
    아무런 비교나 판단이나 집착이나 욕망도 일어나지 않으며,
    나와 너를 나눌 것도 없고,
    잘살고 못산다거나, 잘나고 못났다거나,
    아름답고 추하다거나, 좋고 나쁘다거나, 행복하고 불행하다거나 하는
    일체의 모든 분별상들을 다 비워버렸기 때문에
    둘 중 어떤 한 가지 좋은 쪽을 택해 많이 얻게 되는
    그런 공덕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좋고 나쁜, 양 극단을 초월한
    절대의 평화만이 있음도 없이 있을 뿐인 것이다.
    좋다거나, 잘났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행복하다거나 하는
    그런 상대를 가진 좋은 쪽의 공덕이 아닌
    그러한 일체 모든 양 극단을 뛰어넘은 ‘희유한 공덕’이 있다는 말이다.

    즉 좋고 나쁨을 뛰어넘는 ‘희유한 좋음’이 있고,
    긍정 부정 양 극단을 뛰어넘는 ‘대 긍정’이 있으며,
    공덕있음과 공덕 없음을 뛰어넘는 ‘희유한 공덕’이 있다는 말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 같은 경전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서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도 없고,
    중생상과 수자상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살아 계실 때라면
    직접 부처님으로부터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 듣고 지닐 수 있겠지만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같은 경을 신해수지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께 진리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 중에서도
    아라한이 되지 못한 자는 수도 없이 많았거늘
    어찌 오는 세상 미래세에
    이러한 희유한 가르침을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지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해수지하는 것도 희유할진데
    미래세에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희유한 사람일 것인가.

    앞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렇더라도 물론 올바로 믿어 이해하고 받아지니는
    희유한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만을 인연지은 것이 아니라
    수 억겁동안 수많은 부처님께 선근을 지으며
    가르침을 듣고 공부하여 실천한 까닭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신해수지 하는 희유한 사람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사람에게 아상은 더 이상 아상이 아니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 또한 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을 여의는 이 가르침에 있어
    깨달음이란 오직 ‘상을 여의는 것’이며,
    부처님이라는 것은 오직 ‘상을 떠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적멸이란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이상적멸]
    이 말씀이야말로 아주 중요한 이 경의 핵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한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이것이다.

    오직 상을 떠나는 것,
    오직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이 우리에게 주는 화두다.

    일상 속에서 우린 얼마나 상에 얽매여 살고 있는가.
    ‘나’라는 것이 본래 없는데
    다만 인연따라 거짓으로 만들어진 육신을 보고,
    또한 눈귀코혀몸뜻을 보고
    그것이 ‘나’라고 얼마나 고집하며 얽매여 살고 있는가.

    상을 떠난 관점에서 보면
    ‘나’와 ‘너’를 가를 것도 없으며,
    인간과 자연을, 신과 인간을, 인간과 우주를 나눌 것도 없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나’라는 상을 짓고, ‘너’라는 상을 지으며,
    ‘우주’라는, ‘자연’이라는, ‘신’이라는 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왜 나와 너를 갈라 놓고
    내가 너보다 더 부자가 되려고,
    내가 너보다 더 유명해지려고,
    내가 너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는가.

    왜 부와 가난이라는 상을 만들어 놓았으며,
    높고 낮음을 만들어 놓았으며,
    아름답고 추함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거기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는가.

    꽃은 꽃대로 완전한 진리의 나툼이며,
    나무는 나무대로,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공기는 공기대로 저마다 온전한 진리의 인연 따른 나툼임을 모르고,
    그들을 갈라 놓고 등수를 매기며,
    좋고 나쁜 것을 골라내야만 하는가.

    사람 또한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농부는 농부대로,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이는 가난한 이대로
    저마다 온전한 자신으로써의 나툼이 있건만
    스스로 너와 나를 비교하고 분별하며,
    비교 우위와 비교 열등에 목숨걸고 소중한 인생을 낭비해야 하는가.

    그래놓고 그렇게 만들어 놓은 상에 스스로 얽매여,
    좋다거니 싫다거니 개념을 붙여 놓고,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개념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렇게 만든 개념에 빠져
    좋은 것은 더 못 가져서 안달하고,
    싫은 것은 떼어내지 못해서 안달하는
    이런 어리석은 일을 왜 계속해서 하고만 있는 것인가.

    이 모든 문제는 오직 ‘상을 여의었을 때’ 끝난다.
    상을 여의었을 때 실상이 드러난다.
    상을 여읜 것이 바로 적멸이며,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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