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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법하지 않았다
    金剛經 2012. 1. 13. 07:07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진리를 설한 바가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진리를 설했다고 생각하지 말라.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벌써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에 갖히게 되고 만다.

    부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설법은 설법이 아니다.
    그렇기에 설법일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설하셨지만
    단 하나의 진리도 설하신 바가 없다.
    함이 없이 행한 것이다.

    진리를 설하고도
    그 설한 진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리석은 중생은
    실천해야 할 계율이 있고,
    들어야 할 설법이 있지만
    깨달은 여래는
    행하는 바가 그대로 계율이고,
    설하는 말이 그대로 진리가 된다.

    여래는 스스로 법을 설한다는 생각이 없다.
    그저 함이 없이 행하고 있을 뿐이다.

    인연따라
    이렇게 설하기도 하고
    저렇게 설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선(善)을 행하도록 이끌기도 하고,
    선악을 다 놓도록 이끄시기도 한다.

    때로는 공(空)을 설하고,
    또 때로는 유(有)를 설할 수도 있다.

    아무런 걸림 없이,
    아무런 분별 없이
    인연따라
    이렇게도 행하시고, 저렇게도 행하시지만
    그것은 그대로 진리의 행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들의 입장에서는
    선을 행하라는 설법을 하셨다고 생각하고,
    선악을 다 놓으라는 설법을 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한쪽에서는
    선을 애써 행하게 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선을 행하는 것도 아니라고 고집하면서
    선악도 다 버려야 한다고 고집을 한다.
    그것이 사람들의 어리석은 분별지(分別智)다.

    사람들은 그것을 설법이라고 이름 붙인다.
    부처님께서 설해주신 법문이고
    그것이 경전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리고 나서
    이 경전이 더 좋은 경전이네,
    저 경전이 더 좋은 경전이네 하고 다툰다.
    이 법문이 옳으니
    저 법문이 옳으니 하고 분별한다.

    부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불성(佛性)이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한편으로는 그 어떤 종류의 실체도 있을 수 없는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셨다.

    무아와 진아(眞我),
    ‘나 없음’과 ‘참나’,
    얼핏 보기에는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모순이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불성에 어떤 모양을 정해 두거나,
    실체화 시키거나,
    상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불성을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그랬을 때 불성은 없다.

    그러나 불성이 불성이 아님을 바로 알았을 때
    그 때 온전한 불성은 드러난다.
    모든 존재는 불성이 있다.
    그러나 무아이다.

    고정된 실체로써의 ‘나’가 없다.
    ‘나’가 없는데 어찌 불성이 있는가.
    ‘나’가 없기 때문에 불성, 즉 ‘참나’가 있을 수 있다.

    ‘참나’를 ‘나’와 같은 어떤 존재로,
    어떤 모양으로, 어떤 실체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참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참나에 집착하지 않았을 때 참나는 있다.
    불성에 집착하지 않는 이에게 불성은 있다.
    즉 불성이 불성이 아닐 수 있을 때 참된 불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불성에 집착하게 되면 더 이상 불성은 없다.
    그것은 불성이 아니다.

    윤회하는 주체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무아이다.
    윤회하지만 무아인 것이다.

    여기에 무슨 모순이 있는가.
    참나와 무아 사이에 그 어떤 모순이 있는가.

    이름에 집착하지 않았을 때는
    그 어떤 혼란도, 그 어떤 모순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온통 모순 덩어리다.

    불교의 역사가 3,000여 년을 이어져 내려오면서
    아직까지 논쟁의 불씨가 되는 것이
    바로 윤회와 무아의 문제이다.

    이 두 가지가 도대체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말에 얽매이고 있기 때문이다.

    윤회는 윤회가 아니기에 윤회이고,
    무아는 무아가 아니기에 무아라는
    그 깊은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말에 속지 말라.
    윤회가 옳은 것인가,
    무아가 옳은 것인가 하고 다투지 말라.

    어리석은 이에게는 다 틀리지만
    충분히 지혜롭다면
    그것은 아무런 논쟁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 어떠한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법도 법이 아니지만,
    깨달은 이의 입장에서는 법 아닌 것도 그대로 법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 혹은 ‘진리’의 테두리에 가두지 말라.
    어떤 말로써든 그 ‘언어’ 속에 가두지 말라.
    언어 속에 가두게 되면
    끊임없는 논쟁과 다툼만을 만들게 될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설한 바 없다’고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실 때 까지
    끊임없이 법문을 들려주셨지만
    단 한 말도 설한 바가 없다.
    설했지만 설한 바가 없다.

    어리석은 이는 설했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설한 것이 아니다.
    그저 물 흐르듯 흘렀을 뿐이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 오면 초록이 물오르고,
    가을에는 단풍이 지며,
    겨울이 되어 호젓하게 잎을 떨굴 뿐이다.

    계절은 끊임없이 설법하고 있고,
    대자연은 끊임없이 설법하고 있지만
    그것은 말로 표현되어질 수 없다.
    그것이 말로 표현되어지면 논쟁을 낳는다.

    그 무한한 설법 속에서도
    설한 법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참된 설법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본래 설해 질 진리가 없다.
    ‘진리’라고 이름 붙일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런데 어찌 진리를 설할 수 있단 말인가.

    설해질 진리도 없으며,
    그 진리가 설 땅도 없다.
    이 세상이라는 곳 또한
    완전히 텅 빈 공화(空華)일 뿐이다.
    이 세상은 텅 빈 한 송이 꽃이다.

    또한 그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들, 세포들, 미진들, 티끌들
    또한 모두가 텅 비어 있다.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고,
    어떤 말로 설해질 수도 없다.
    진리도 없고, 세상도 없으며, 미진도 없다.
    그것이 바로 법이고 진리인 것이다.

    법도 없고 진리도 없는 것이 법이고 진리이다.
    그래서 다음 게송에서는
    삼천대천의 세계와 미진 또한 텅 빈 공일 뿐,
    그 이름이 세계이고 미진일 뿐,
    그 어떤 실체도 없다는 설법이 이어지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미진(微塵)을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모든 미진을 여래는 미진이 아니라고 말하느니
    이것은 이름이 미진일 뿐이다.
    여래가 말하는 세계 또한
    그것이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다.


    삼천대천세계가 텅 빈 공이고,
    그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티끌들, 미진들이
    실체가 없는 텅 빈 공일 뿐이다.

    다만 그 이름이 미진이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 그 실체는 없다.
    그러니 그 세계의 진리 또한 텅 빈 것이며,
    이름이 진리일 뿐인 것이다.

    삼천대천세계란 이 우주를 말하는 것이고,
    미진이란 그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의 티끌을 말하는 것이다.

    즉 가장 크고 가장 작은 그 모든 존재계가
    다 텅 빈 공일 뿐임을 밝히고 있다.
    다만 이름이 미진이고 이름이 세계일 뿐,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고 물거품과 같은
    가유(假有)에 불과할 뿐이다.
    거짓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거짓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인연 따라 잠시 일어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뿐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인연으로 말미암아 소멸된다.

    이 세상 속의 ‘나’라는 존재 또한
    실제 내가 아니다.
    나를 나라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인 것이다.

    ‘나’라는 존재 또한
    인연따라 잠시 만들어진 가유일 뿐이다.

    내 몸뚱이 또한 내가 지은 인연, 즉 업에 의해
    이번 생에 잠시 이렇게 인연화합되어 만들어졌을 뿐이다.
    이번 생 인연이 다하면 짐승으로 다시 태어날지,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지 누가 알겠는가.

    전생에 남자로 태어났다가
    이번 생에 여자로 태어나고
    다음 생에 짐승으로 태어났다면
    어떤 한 모습을 가지고 ‘나’라고 콕 찝어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도 내가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사람 모습으로도 태어났다가,
    짐승의 모습으로도 태어나고,
    부자의 모습으로도, 가난한 모습으로도,
    잘생긴 모습으로도, 못생긴 모습으로도 태어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이
    인연의 나툼일 뿐, 고정된 실체는 없다.

    이번 생에 많이 베풀고 살았다면
    부자의 인연을 받아 태어날 것이고,
    술을 많이 먹고 지혜의 종자를 끊어버린 사람이라면
    다음 생에 어리석은 바보가 되어 태어날 것이며,
    입으로 욕이나 거짓말을 많이 한 사람은
    목소리가 나쁘게 태어나게 될 것 아닌가.

    그렇듯 인연따라
    이런 모습으로도 저런 모습으로도 나투는 것이지,
    어떤 한 과정이 ‘나’의 실체인 것은 아닌 것이다.

    물을 한모금 먹으면 물이 나로써 나투게 되고,
    땀을 많이 흘리면 땀으로 빠져 나가게 마련이고,
    그것은 또다시 수증기로도 강물로도
    무엇으로도 나툴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이 삼라만상의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그와 같다.
    그러니 무엇을 가지고
    ‘미진’이라고, ‘세계’라고, ‘나’라고 이름 지을 것인가.

    나아가 무엇을 가지고
    ‘깨달음’이라고, ‘진리’라고, ‘여래’라고 이름 지을 것인가.

    이 모든 것이 다 꿈이고, 신기루일 뿐이다.
    하물며 여래의 32상호를 가지고 여래라고 이름지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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