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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반야바라밀
    金剛經 2012. 1. 12. 06:42

     

     

    여법수지분
    법답게 받아지니라.


    第十三 如法受持分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當 何名此經 我等 云何奉持 佛告須菩提 是經 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須菩提 於意 云何 如來 有所說法不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 須菩提 於意 云何 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是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須菩提 諸微塵 如來說非微塵 是名微塵 如來 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 布施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아 지니면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마땅히 이 이름대로 받아지니라.
    그 까닭은 무엇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진리를 설한 바가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미진(微塵)을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모든 미진을 여래는 미진이 아니라고 말하느니
    이것은 이름이 미진일 뿐이다.
    여래가 말하는 세계 또한 그것이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32상이란
    곧 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목숨을 바쳐 보시했다 할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이 더 많으니라.”


    여법수지분은 이 경의 이름과
    이 경을 어떻게 여법하게 수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의 이름을 밝혀주셨지만
    그 이름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언급하시면서,
    이 세상의 가장 작은 미진에서부터 이 세상에 이르기까지
    또한 나아가 부처님의 거룩한 상호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은 다 집착할 것이 없고, 머무를 것이 없음을 설함으로써
    다시한번 금강경의 무집착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

    이렇듯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가르침은
    일체의 모든 상을 타파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 어떤 티끌도, 세상도, 부처도, 경전의 이름도
    거기에 얽매여 집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한 일체 상의 완전한 타파의 자리에
    깨달음은 드러남 없이 드러난다.
    여기에 이 경의 위대함이 있다.
    그래서 세세생생 모래수와 같은 수의 목숨을 바쳐 보시하는 것 보다
    이 가르침 하나만을 받아 지녀 설하는 것이
    더욱 큰 공덕이 됨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아 지니면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마땅히 이 이름대로 받아지니라.


    지금까지 들어 온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수보리는 한없는 감동과 환희에 휩싸였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이러한 말 없는 위대한 말을 듣고
    수보리와 같은 깊은 제자가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금강경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러나 금강경을 이렇게 표현했을 때
    그 표현은 위대하지 못하다.
    그 표현으로써 위대한 것이 아니라
    가르침이 담고 있는 그 깨우침의 깊이는
    말이 가져다 주는 의미를 초월하여 위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수보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어떻게 이름 지으면 좋을지 묻고 있다.
    일체의 모양을 타파하고, 상을 버리도록 이끄는 이러한 가르침,
    일체의 그 어떤 이름에도 집착함이 없도록 일깨워주는 이러한 가르침에
    도리어 또 다른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
    얼핏 생각했을 때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름을 타파하도록 이끄는 이 가르침을
    어떻게 이름 지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름을 깨라는 가르침을 어떻게 이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모순 속에는
    무한한 ‘방편’과 ‘자비’가 녹아있다.

    앞서도 누누이 언급하고 있지만
    말이란 그 자체가 모순이다.
    부처님 말씀도 논리적으로 따지려 들거나,
    말 그 자체를 가지고 옳고 그른 진위를 가리려고 한다면
    한마디 말도 빼놓지 않고 전부 다 모순이고 잘못일 수 있다.

    그렇듯 말이란 온전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말을 하지 말 것인가?
    아무런 언어도 사용하지 말고 오직 침묵하기만 할 것인가.

    그렇다.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이미 단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고
    항상 사용되어져 오고 있다.

    본연의 침묵의 가르침은 항상 법계에 가득하다.
    다만 그 침묵의 소리 없는 소리를 우리가 듣지 못할 뿐,
    침묵의 법문이 사라진 적은 없다.

    그러한 침묵의 말 없는 가르침은 항상하고 있지만
    어리석은 이들은 듣지 못한다.
    어리석은 우리들은 침묵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말을 들을 수 있고,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혹자는 그러한 침묵의 가르침이면 되었지
    왜 애써 어리석은 이들을 일깨우고자 하는가 하고 묻는다.
    그것은 바로 ‘자비’ 때문이다.
    지혜의 본질은 자비에 있다.
    아니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니다.
    지혜가 충만하면 자비 또한 똑같이 충만하다.

    그러니 자비를 베풀지 않을 수 없다.
    깨달음을 얻은 이는 당연하게 자비를 실천하게 된다.
    고통 받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일깨우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나왔다.
    아직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이들을 위해
    법을 설하는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말’이라는,
    ‘언어’라는 방편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수보리는 질문을 하고 있다.
    부처님께 ‘자비’와 ‘방편’을 열어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마땅히 자비와 방편으로써 답을 하고 계신다.

    이름을 타파하고 깨뜨려야 한다는 이 가르침에
    금강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계신다.
    이러한 부처님의 모순은 자비에서 나온 것이다.

    그 수단으로, 그 방편으로 사용된 것이
    우리들 중생들이 좋아하고 이해하기 쉬워하는
    ‘말’이고 ‘언어’인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이라고 말씀해 주시고는
    그것이 방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설해 주고 계신다.

    다시말해 반야바라밀이라는
    이 이름에도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며 다만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반야바라밀이라고 여래가 설한 것
    그것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여래는 다시 설한다.
    그래서 말하기를 반야바라밀이라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다.

    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에 속지 말라.
    반야바라밀이라는 그 말 속에
    어떤 특정한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지 말라.

    몸으로는 나쁜 짓을 하면서
    입으로 반야바라밀이라고 외운다고 해서
    나쁜 업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는 어리석은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신격화하지 말라.
    반야바라밀이라는 이 단어에
    어떤 특별한 기운이 있고 신비로운 힘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지혜롭지 못한, 반야바라밀이지 못한 이해이다.

    반야바라밀이란
    이 이름에도 얽매이거나 집착하면 안된다.

    반야바라밀이라고 말하면서
    반야바라밀이 아님을 온전히 알게 될 때,
    그 때 비로소 반야바라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수행자가 ‘나는 수행자다’라는 상을 낸다면
    그 사람은 수행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수행자란 어떤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며,
    어떤 이름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이고,
    일체의 모든 고정된 집착에서 벗어난 자이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수행자이기 위해서는
    수행자라는 상이 없어야 한다.
    수행자는 수행자가 아닐 때 참으로 수행자일 수 있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도 마찬가지다.
    반야바라밀이란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지혜이며,
    어떤 이름에도 얽매이지 않는 지혜이고,
    일체의 모든 고정된 집착에서 벗어난 지혜이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기에
    진정으로 반야바라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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