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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른 법을 존중하라
    金剛經 2012. 1. 11. 07:13

     

     

    바른 법을 존중하라

    第十二 尊重正敎分
    復次須菩提 隨說是經 乃至四句偈等 當知 此處 一切世間天人阿修羅 皆應供養 如佛塔廟 何況有人 盡能受持讀誦 須菩提 當知 是人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 若是經典 所在之處 則爲有佛 若尊重弟子

    “또한 수보리야,
    이 경이나 내지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설한다면
    마땅히 알라.

    이 곳은 일체세간의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할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함에 있어서이겠는가.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그러한 사람은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이 경전이 있는 곳은
    부처님이나 존경받는 부처님의 제자가 있는 것과 같으니라.”


    이 분 존중정교분에서는
    금강경이라는 이 바른 법이
    그대로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이 경전을 부처님과 바른 제자를 존중함과
    똑같이 존중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것이 삼보이며, 삼귀의의 정신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제자,
    불법승(佛法僧) 이 세가지는 서로 다르지 않다.

    부처님을 존중하듯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훌륭히 수지독송하여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제자들
    또한 마땅히 똑같은 무게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이 분에서는 이와같이
    이 경전의 바른 가르침이야말로
    부처님과 존경받는 제자가 있는 것과 같음을 밝히면서,
    이 경전을 수지독송하게 되면
    천인과 사람 아수라가 마땅히 부처님 탑묘와 같이 존중할 것이며,
    결국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수보리야,
    이 경이나 내지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설한다면
    마땅히 알라.

    이 곳은 일체세간의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할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함에 있어서이겠는가.


    요즈음도 그렇지만
    오래전부터 금강경 독송의 신행은 계속되어 왔다.
    금강경 전체를 독송하거나,
    혹은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계속 반복하여 독송하는 수행의 방법은
    많은 불자들에게 쉽고 친근하며
    어렵지 않게 실천할 수 있는 수행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유독 다른 경전에 비해서
    금강경 독송을 더 많이 선호하며 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명확하게
    금강경 독경이라는 수행법에 대해 말씀해 주고 계신다.
    이 경이나 내지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독송한다면
    일체 세간의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기를
    부처님 탑묘처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금강경 독송의 수행은
    바로 이 분에서 이렇게 명확히 제시해 주고 계신 것이다.

    탑묘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많은 중생들은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신앙하게 되었다.
    그러한 그리움은 탑이라는 신행대상으로 나타나
    부처님을 대신하여 탑을 세우고
    탑 주위에서 기도하며 수행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갔다.

    탑묘는 그대로 부처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탑묘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공양하고 찬탄하고 찬양하며
    불탑을 중심으로 대승불교의 신행활동이 시작되게 되었다.

    그러면서 탑묘는 대승불교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었고
    이 곳을 중심으로 대승의 보살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탑묘는 일종의 상징이다.
    탑이나 사리가 어찌 부처님일 수 있겠는가.
    그것을 부처님과 동일시하고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도 하나의 상에 빠지는 일일 뿐이다.

    그러나 방편으로 하나의 상징으로써
    탑묘를 숭배하고 신앙하게 된 것이다.
    부처님을 법신으로써 본다면 탑묘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일체 모든 것들이 모두가 부처님의 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계신 곳은 사람 뿐 아니라
    온갖 불법을 옹호하는 선신들이 함께 하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천, 인, 아수라는 바로 그 호법선신들을 대변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육도를 윤회한다.
    육도는 다시 지옥, 아귀, 축생이라는 삼악도(三惡道)와
    천, 인, 아수라라는 삼선도(三善道)로 나뉜다.

    지옥, 아귀, 축생의 중생들은
    자신이 지은 전생의 악업을 받느라고
    끊임없는 괴로움과 어리석음 속에서 산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공양한다거나
    불법을 옹호하거나 기도하고 수행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천, 인, 아수라는
    과거세 지은 선한 업의 결과를 받기 때문에
    부처님 도량을 옹호하고 공양한다.

    그러면 천, 인, 아수라가
    불법을 옹호하기 위해 불탑만을 찾을 것인가.
    불탑은 부처님에 대한 하나의 상징일 뿐이라고 했다.
    불탑이 부처님인 것은 그것이 법신이기 때문이지,
    사리이거나 탑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그 곳이 부처님 가르침이 있는 곳이며,
    가르침이 설하는 곳이기 때문에 공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르침이 있는 곳은 어디든 그곳이 불탑이다.

    그렇기에 이 분에서는 사구게 하나만이라고 설한다면
    그곳이 불탑이 되어
    일체의 천, 인,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기를
    탑묘와도 같이 한다고 했다.

    하물며 이 금강경 전체를 받아지니고
    독송하는 공덕은 말할 나위도 없다.

    산스크리트 경전의 원문에서는
    금강경을 받아지니고 독송한다는
    구마라집 역의 ‘수지독송’에 대해
    좀 더 세심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하물며 이 법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상세하게 설명하여 줌에 있어서이겠는가.”

    사실 구마라집 역의 금강경에 등장하는
    ‘수지독송’이라는 번역은 이러한 표현의 짧은 번역이다.
    수지독송의 참된 의미는 이처럼
    이 가르침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상세하게 남을 위해 설명해 주는 것 까지를 포함하는 의미인 것이다.

    이점은 참으로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다.
    단순하게 금강경을 독송하고 사구게를 외는 것만이
    수행의 전부를 행하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어떤 사람은 단순히 금강경에 힘이 있기 때문에
    금강경 독송을 하면 저절로 복이 되고 지혜가 증장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무런 이해 없이도 무조건 금강경 독송만 하면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또한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하고 악업을 짓더라도
    금강경 독송만 하면 업을 녹일 수 있고, 깨끗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금강경을 또다른 상으로 만드는 일이고,
    절대화시키는 일이된다.

    물론 아무 뜻을 모르더라도
    금강경을 일념으로 독송하게 되면
    그것이 집중과 마음을 비우는 수행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이유가 그것이 금강경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금강경을 신비화 시키거나,
    금강경에 어떤 상을 만들어 두면 안 된다는 말이다.
    금강경은 일체 모든 상을 타파하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체 모든 상을 타파하는 이 금강경의 가르침에
    도리어 특별한 상을 가져다 붙인다.

    금강경을 3독 하고, 7독 하고, 108독을 하면
    저절로 업장이 녹는다거나,
    독경 그 자체가 지혜와 깨달음을 가져다 준다거나 하고 생각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은
    그것이 금강경이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가짐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마음가짐이 간절하고 온전히 집중되어 있으며
    깨어있는 마음으로 독경한다면 그것은 복과 지혜를 가져온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이라면
    금강경을 독송할 때가 아니더라도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늘 복과 지혜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금강경만이 그렇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금강경에 대한 상일 뿐이다.

    만약 금강경을 매일같이 독경하는 사람이
    삶이 청정하지 못하고,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며,
    온갖 악업을 행한다면
    금강경을 한 번도 살펴보지 않은 자보다 못하다.

    오히려 금강경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고,
    독송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 마음이 청정하며,
    무집착의 행으로 머무는 바 없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의 삶 그대로가 금강경의 실천이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라는 말은
    앵무새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금강경을 앵무새처럼 단순히 많이 독송하기만 하더라도
    성불할 수 있다면 금강경 테잎은 벌써 성불했을 것이다.

    내 삶이 금강경이 되도록 하라.
    금강경을 내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연주하라.
    금강경이 내 삶으로 꽃필 수 있도록 하라.

    그러나 금강경을 절대화하지는 말라.
    금강경에 그 어떤 특별한 상을 갖다 씌우지 말라.
    금강경에 머물러 안주하지 말라.
    금강경에 집착하지 말라.

    그것은 금강경을 잘 간직하는 사람이 아니라
    금강경을 파괴하는 사람이다.

    금강경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단순하게
    ‘금강경을 독송하면’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원전에서 말했듯이
    ‘이 경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남을 위해 상세하게 설명하여 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 뜻도 모르면서 무조건 독송만 할 것이 아니라,
    이 경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길 수 있어야 하며,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완전히 이해해야 하고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겨야 한다는 말은
    일체의 상을 타파해야 한다는 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
    스스로 일체의 상을 타파하여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를 완전히 이해하고,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완전히 실천하여 갖출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이해를 더욱 깊이 하고 새기기 위해 독송해야 하고,
    그 가르침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세하게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금강경 수지독송’의 본래 갖춘 의미이다.

    금강경에 또 다른 상을 갖다 붙이지 말라.
    부처라는 상을 내세우지 말라.
    깨달음이라는 상, 깨달은 자라는 상,
    깨달음의 절대적 가르침이라는 상을 가지지 말라.

    그것을 절대화하고, 그것에 머물러 안주하며,
    그것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일 수 없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라는 그 본 의미를 바로 새길 수 있어야 한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그러한 사람은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이 경전이 있는 곳은
    부처님이나 존경받는 부처님의 제자가 있는 것과 같으니라.”


    그렇게 금강경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상세하게 남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사람은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단순히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설하더라도
    그곳이 일체 세간의 천인아수라가 부처님 탑묘처럼 공양할 것인데,
    하물며 이와같이 금강경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상세하게 남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어찌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하지 않을 것인가.  

    이러한 가르침이 있는 곳은
    그대로 부처님이나 존경받는 부처님의 제자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 어떠한가.
    가르침이 있는 곳,
    그 가르침을 수지독송하는 이가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부처님이 계신 곳이며,
    부처님의 존중받는 제자들이 있는 곳과 다름이 없다.

    조금 확대 해석한다면
    금강경이 있는 곳이 그대로 법당이며,
    금강경을 수지독송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부처님,
    또 부처님의 존경받는 제자들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금강경과 부처님, 부처님의 제자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
    이 셋은 서로 다르지 않다.
    불법승 삼보는 하나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곳이
    그대로 부처님이 계신 곳이며
    존경받는 제자가 있는 곳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꼭 절에 가야지만 부처님이 계신 것이 아니다.
    집을 도량으로 만들고,
    회사를 도량으로 만들며,
    내 몸을 도량으로 만들려면
    늘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곳은
    언제나 부처님이 함께 하시며,
    부처님의 존경받는 제자들이 함께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은
    이와같이 한량이 없다.

    금강경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남을 위해 상세하게 설명하여 주라.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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