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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金剛經 2012. 1. 9. 07:05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앞 장에서 수행 사과라는
    깨달음의 계위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러한 깨달음 조차 놓아버려야 함을 언급했다.

    수행 사과의 깨달음이라는 것도
    본래 얻은 바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장에서는
    과거 연등부처님에게 수기를 받은 선혜 비구 또한
    어떤 특별한 법을 얻은 것이 아님을 밝혔다.

    이렇듯 모든 보살들이
    얻은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다.

    여기에서는 보살의 깨달음의 사회화의 과정인
    불국토 장엄에 대한 물음이 이어지고 있다.

    깨달은 자는
    스스로 깨달았다는 생각이 없다.
    하물며 깨달은 자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깨닫지 못한 중생이나 할 수 있는 것이 불국토의 장엄이다.
    깨달은 자는 불국토를 장엄하지 않는다.
    장엄하지 않음으로써 장엄하고 있다.

    불국토는 별도로 장엄할 필요가 없다.
    불국토는 더없이 완전하다.
    더 이상 손 댈 곳이 없다.
    어떤 장엄이 따로 필요한 곳이라면 그곳은 불국토가 아니다.
    스스로 완전한 곳 그곳이 불국토요 정토다.

    우리 마음 그대로가 부처인 것 처럼,
    번뇌에 물들어 있는 그대로로써 보리인 것 처럼,
    번뇌즉 보리, 생사즉 열반
    그와 같이
    이 사바예토가 그대로 불국토요
    완전히 장엄된 부처님의 청정한 국토다.

    그러므로 보살은 정토를 장엄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다.
    장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장엄이라는 말 자체가 매우 생소하다.
    그런 말이 필요없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불국토며 정토이기 때문이다.

    불국토, 정토는 어떤 곳인가.
    부처님의 땅이며, 깨끗한 땅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땅이란
    어떤 특정한 장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공간이 아니다.
    만약 어떤 특정한 공간을 가지고 정토라고 했다면
    그곳은 더 이상 정토가 아니다.
    정토는 영역이 정해지지 않은 곳이다.

    별도로 경계선을 그을 필요가 없다.
    정토의 경계를 긋는 순간 이미 정토는 사라지고 만다.
    깨달음에는 시공(時空)의 차별이 없다.
    하물며 어떤 특정한 공간을 가지고 정토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지역을 정토라고 했다면
    그 지역에서 벗어난 곳은 예토(穢土),
    즉 더러운 땅이 될 것인데,
    그렇게 깨끗하고 더러움을 나누고,
    이쪽 저쪽을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깨끗한 쪽을 택하는 그런 상대적인 곳을 가지고
    어찌 정토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부처는 차별이 없다.
    깨달음에는 그 어떤 나뉨도 없고, 극단도 없다.

    그러니 정토를 장엄한다는 말은
    어리석은 중생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보살은 정토를 장엄할 이유가 없다.
    그들 자체가 그대로 정토이다.
    정토를 장엄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온갖 정토를 무한히 장엄하고 있다.

    정토의 장엄은 정토의 장엄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토의 장엄이다.

    불교를 어느 정도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알음알이로 지식을 축적하면 할수록
    더욱 깨달음과는 멀어진다.

    불교를 많이 공부한 사람들은
    주로 자신이 수행을 많이 했고,
    경전도 많이 보았으며,
    깨달음과도 가깝고,
    부처님의 좋은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많이 가르쳐 주며,
    포교도 많이 한다고 생각한다.

    즉 그러한 모든 행위가
    정토를 일구는 장엄한 깨달음의 길이요,
    하화중생의 길이며,
    포교의 길이라고 여긴다.

    스스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원을 잘 성취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에 비해 더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복도 더 많이 짓고,
    공부도 더 많이 했으니까
    지옥에 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더 빨리 깨달음을 얻어 성불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깨달음과는 멀다.
    오히려 초심자들의 발심보다도 더욱 멀어져 있다.

    초발심의 행자들은 하심하며 지극히 겸손하다.
    스스로 수행을 많이 했다거나,
    불교를 좀 안다거나, 깨달음과 가깝다거나,
    포교도 잘 한다거나 하는 일체의 상이 없다.

    오직 그런 마음을 비우고
    하나에서부터, 낮은 마음에서부터 정진할 뿐이다.
    이러한 초심자의 하심은 고참자의 그것보다 깨달음에 더욱 가깝다.

    지식이 많을수록 깨달음과는 멀어진다.
    ‘공부했다’는 상에 빠질수록 공부와는 멀어지고 만다.
    그래서 수행자의 첫 번째 덕목은 하심이며 겸손이다.

    공부를 많이 했다는 말은
    공부와 멀어졌다는 말이다.

    해도 한 바가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을 많이 했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의 수행은 깨달음과는 정 반대로 치닫고 있다.

    포교를 했고,
    법보시를 했고,
    열심히 기도를 했으며,
    정토를 일구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공덕은 사라진다.

    그래서 달마는 전국에 온갖 불사를 이루어 놓은 양무제에게
    아무런 공덕이 없다고 했다.

    잘 해 놓고 잘 했다고 상을 내면 잘 한 것이 아니다.
    수행을 열심히 해 놓고
    열심히 수행했노라고 하면 수행한 것이 아니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을 얻었노라고 하면 그 깨달음은 가짜가 된다.

    아무리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더라도 불국토를 장엄했다는 상을 일으키고
    거기에 마음이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참된 장엄이 아니다.

    모름지기 함이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머무는 바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을 하고서도 수행했다는 바에 머물지 않아야 하며,
    베풀고서도 베풀었다는 상을 일으켜
    베풂에 마음을 머물지 않아야 한다.

    마음이 머물게 되면 썩고 만다.
    마땅히 마음을 일으키되
    그 일으킨 마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마음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지니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방하착하라.
    일체를 다 놓아버리라.
    다 놓아버렸을 때 그대로 진리는 드러난다고 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이 말을 자기방식대로만 해석을 한다.
    다 놓아버려야 하니 아무 일도 할 것이 없고,
    아무런 마음도 낼 것이 없으며,
    그냥 빈둥 빈둥 놀기만 하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또 다 놓아버린다면 저 강가의 돌이나 산의 바윗덩이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고 이 가르침을 의심한다.

    다 놓아버리라고 하고,
    얻을 것도 본래 없다고 하며,
    깨닫고자 애쓰지 말고,
    정토를 장엄할 것도 없다고 하니까
    불교는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거냐고 따질 지 모른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런 물음을 한 번 쯤은 던져 보았을 것이다.

    이 게송은 바로 그 점에 대한
    명확하고도 확연한 답변을 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모든 의문은 풀어질 것이다.

    아무 마음도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마음을 낼 것인가
    또한 어떻게 마음을 낼 것인가가 중요하다.

    마땅히 청정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청정한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는 것이며,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는 것이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어디에도, 어떤 바깥의 대상에도 마음이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즉 마음을 내되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이다.

    마음을 내고 나면
    보통 사람들은 거기에 얽매이고 머물러 집착한다.
    착한 일을 행하고도 거기에 마음이 머문다.
    ‘선행을 했다’는 상을 남기게 된다는 말이다.

    착한 일을 했다는데 마음이 머물러 상을 남기게 되면
    연이어 거기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게 된다.
    보상을 기대하는 그 어떤 바램도 우리를 괴롭게 할 뿐이다.

    기대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이고,
    바램이 있을 때
    그것의 성취 유무에 따라 괴로움과 즐거움이라는
    두 가지 극단의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착한 일을 행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마땅히 마음을 일으켜 착한 일을 행하되
    함이 없이 하라는 말이다.
    선행을 하고도 선행을 했다는 상을 버려야 한다.
    거기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세상 모든 일이 마찬가지다.
    돈을 열심히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돈을 벌되 돈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돈에 머무르는 마음으로 벌면 안 된다.
    그것은 곧 괴로움을 가져온다.

    돈에 대한 집착으로 돈을 벌면 많이 벌었을 때와 못 벌었을 때
    우리의 마음은 두 가지 극단으로 치닫는다.
    즐거움과 괴로움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린다.

    즐거움에 휘둘리는 것은 좋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즐거움도 일종의 괴로움이다.
    즐거움에 크게 휘둘리는 사람일수록
    괴로움에 크게 휘둘리게 마련이다.

    즐겁거나 괴롭기 보다는
    그 양 극단을 다 놓아버린 여여한 평화를 찾아야 한다.

    수행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수행을 하되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수행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했다는 상을 내지 말고,
    이만큼 수행했으니 곧 결과가 있겠지 하는 바램도 놓아버리고,
    수행이라는 그 자체에 머물러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수행을 했으니 곧 깨닫겠지,
    혹은 이렇게 수행을 했는데도 왜 깨달음은 오지 않을까 하고
    탓할 것은 없다.

    다만 수행을 할 뿐이지
    수행의 결과를 바란다거나,
    내가 행한 수행에 대해 바라는 바를 가져선 안 된다.

    그것은 집착이며 집착은 괴로움이다.
    수행은 오직 지금 이 순간 행하는 것으로써 완성되는 것이지,
    그것이 미래의 어떤 깨달음을 위한 준비과정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직 할 뿐,
    바램을 놓아라.

    수행이라는 말 자체가
    머물지 않음을 뜻한다.
    그것이 함이 없이 하는 도리이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키는 법이다.

    금강경의 모든 구절은 바로 이 뜻을 함축하고 있다.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행해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주로 어디에 마음이 머물러 있는가.
    ‘나’라는 주관이 만날 수 있는
    일체 모든 객관의 ‘대상’들에 마음이 머물러 있다.
    주관은 무엇이고 객관계의 대상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이것을 십이처로 설명하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여섯가지 기관으로
    세상과 접촉하고 대화한다.
    그 여섯가지란 눈, 귀, 코, 혀, 몸, 뜻을 말한다.
    눈으로 모든 형상을 바라보고,
    귀로 세상의 소리를 들으며,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보며, 몸으로 감촉하고,
    뜻으로 모든 대상들을 분별한다.

    이 여섯 가지 말고 또 다른 세상을 접하는 기관이 있는가?
    오직 이 여섯 가지가 한다.
    바로 이 여섯 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을
    안이비설신의 육근이라고 한다.
    여섯 가지 내 안의 뿌리라는 뜻이다.

    주관인 이 여섯 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각각의 대상을 만나는데
    그 대상이 바로 육경이다.
    육근이 만나는 대상이 바로 육경이다.

    그것은 각각 형상과 소리, 냄새와 맛, 감촉과 대상이다.
    눈이라는 근(안근)으로
    형상이라는 경계(색경)를 접촉하며,
    귀라는 근(이근)으로
    소리라는 경계(성경)를 접촉하게 된다.

    이렇듯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바로 그 때 일체의 모든 괴로움과 즐거움,
    좋고 나쁜 느낌이 일어난다.

    그 느낌에 따라
    좋은 느낌은 더 많이 느끼기 위해 붙잡아 두려고 집착하고,
    싫은 느낌은 느끼지 않기 위해 버리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래서 좋은 느낌을 많이 얻을 때 즐거움을 느끼고,
    싫은 느낌을 많이 얻을 때 괴로움을 느낀다.
    이렇듯 좋고 싫은 느낌에 따라 모든 집착이 생겨난다.

    애욕이 생겨나고 증오가 생겨난다.
    좋은 것을 더 갖고 싶은 것도 집착이며,
    싫은 것을 버리고자 애쓰는 것도 집착이다.

    우리들이 괴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육근과 육경이 접촉하고,
    연이어 좋고 싫은 느낌이 일어나며,
    그에 따라 온갖 집착이 생기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 집착이 바로 머무름이다.
    어떤 경계를 대할 때라도 항상 집착이 생긴다.

    눈귀코혀몸뜻이 대상을 만날 때면
    항상 이렇듯 집착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즉 형상에 마음이 머물게 마련이고,
    소리에 마음이 머물게 마련이며,
    냄새와 맛, 감촉과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눈으로 좋은 것을 볼 때
    더 보고 싶은 집착이 생겨나고,
    칭찬을 받을 때
    더 받고 싶은 집착이 일어나며,
    좋은 냄새에도, 좋은 맛에도, 좋은 감촉에도
    집착이 생겨난다.

    이렇듯 모든 대상을 접촉할 때
    집착이 생기므로 마음이 머물게 되는 것이다.

    모든 수행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이 머무는 마음,
    집착을 놓아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일체 모든 대상을 만나고,
    대상과 접촉하면서도
    어떤 대상에도 머물러 집착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집착이 생겨나면 연이어 일체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

    금강경에서는
    이 가르침을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안내해 주고 있다.

    마땅히 모든 마음을 내되 머무름이 없을 수 있다면
    그 어떤 걸림도 있을 수 없는 대자유를 만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또 느끼고 있는
    일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바로 집착과 머무름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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