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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다툼을 쉬어라
    金剛經 2012. 1. 7. 11:05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진리라고 할 것이 없음을 이름하여
    아라한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하면
    이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는 것입니다.

    아라한이란
    수행 사과 가운데 가장 수승한 경지이다.

    부처님 또한 경전에서 자신을
    ‘대아라한’이라고 표현하셨던 적이 있다.
    욕계 색계 무색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해탈을 이룩한 경지로,
    아라한을 불생(不生),
    즉 다시는 생을 받게 되지 않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아라한이란
    온갖 깨달음의 경지 가운데 가장 수승한 경지를 말한다.

    하물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에게도 있지 않은 생각이
    아라한에게 있겠는가.
    아라한이라는 생각은 오직 중생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아라한은 아라한을 모른다.
    아라한은 진리를 모른다.
    진리라고 이름지을 것이 도무지 없는데
    애써 진리라는 이름을 내세울 것은 무엇인가.

    아라한이란 진리라고 할 것이 없음이다.
    그렇다고 아라한은 진리를 모른다고 하는 말도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니다.

    아라한은 깨달았는가 깨닫지 못했는가.
    이는 참 어려운 물음이다.
    깨달았다고 해도 어긋나고 깨닫지 못했다고 해도 어긋난다.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가.
    오직 침묵만이 그것을 증명해 줄 뿐이다.

    만일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고 한다면
    이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는 것이다.

    ‘나’는 절대 아라한도를 얻을 수 없다.
    아라한에는 ‘나’가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아, 인, 중생, 수자가 사라졌을 때 온다.
    오고 감이 없이 온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를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며,
    욕심을 여윈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세존이시여,
    저는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다’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무쟁삼매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다툼이 없는 삼매를 말한다.

    우리 마음 속에는 끊임없는 다툼이 일고 있다.
    끊임없는 다툼, 끊임없는 싸움,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다툼이란 무엇인가.
    다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둘로 대립되어 있어야 한다.
    둘로 대립되면 그 사이에서는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나뉨이 있으면 곧 다툼이 일어난다.
    불행한 자는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쓴다.
    그러나 행복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이 때 다툼이 일어난다.
    행복을 구하지만 행복을 얻지 못하는데서 마음은 괴롭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사랑을 구하지만
    그것은 쉽게 찾아오지 않기에 괴롭다.
    무언가를 구하면 그것은 벌써 다툼이다.

    구하고자 하는 어떤 것과
    아직 구해지지 않은 현실 사이에
    간격이 벌어진다.
    그 간격, 그 대립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난다.

    소유와 무소유 사이에서,
    부와 빈곤 사이에서,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일체의 모든 나뉨 속에서 무수한 다툼은 일어난다.

    그 어떤 것도 구하지 말라.
    그 어떤 것도 바라지 말라.
    구하고 바란다는 것 자체가 나뉨이고 분별이며
    그것은 곧 다툼과 싸움을 불러온다.

    다툼으로써 행복해질 수는 없다.
    다툼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
    싸움에서 이겼을 때 행복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부와 권력과 사랑을 구하면서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행복이 찾아온다고 쉽게 믿고 있지만
    그것은 참된 행복이 아니다.

    무언가를 딛고 일어선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무언가를 희생시켜 얻은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둘로 나누어 놓고,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어 놓고
    싸움을 일으켜 승리하는데서 오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다툼으로써, 다툼에서 승리함으로써 평화는 오지 않는다.
    오직 다툼을 쉬었을 때 평화는 찾아온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생사와 열반, 무명와 깨달음,
    중생과 부처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난다.

    어리석은 중생이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지만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마음 속에는 끊임없는 다툼이 일어난다.
    깨닫고자 애쓰는 바로 그 마음이 다툼이다.

    중생과 부처를 나누지 말라.
    우리는 깨닫지 못해서, 부처가 되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다.
    중생과 부처를 둘로 나누어 놓고
    이쪽의 중생이 저쪽의 부처로 가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쪽 저쪽은 없다.
    중생과 부처도 없고, 생사와 열반도 없다.
    오직 무분별로써, 무차별로써 큰 하나일 뿐이다.
    전체로써의 하나일 뿐이다.

    나눌 것이 없다.
    나누지 않으면 그대로 부처이지만
    거기에는 부처라는 생각조차 없다.

    어리석게 생각하지 말라.
    어리석게 깨닫고자 애쓰지 말라.
    깨닫고자 애쓰면 벌써 다툼이 생긴다.

    깨닫지 못한 ‘나’와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나’ 사이에
    간격이 생겨나고, 차별이 생겨난다.
    그 때 그 둘은 서로 끊임없이 다투게 된다.
    그랬을 때 깨달음은 멀어진다.
    깨닫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다툼은 더욱 커져만 간다.

    우리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깨달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바로 이것이다.

    ‘중생’이 ‘수행’을 통해 ‘부처’로 나아간다는 착각.
    바로 그 어리석은 착각 때문에 깨달음은 멀어진다.
    중생이고 수행이고 부처고
    이 모든 나뉨과 분별을 다 놓아버렸을 때
    깨달음은 향기롭게 피어난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중생과 상반되는 부처가 아니다.
    중생이 깨쳐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중생은 없어지고 깨달음을 얻은 부처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오직 텅 빌 뿐이다.
    부처도 중생도 다 사라지고
    오직 텅 빈 충만이 현현할 뿐이다.

    이처럼 둘로 나뉨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무수한 다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나눔과 분별은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다.
    나뉨이 사라지고, 분별이 사라지는 것이 깨달음이고 해탈이다.

    일체의 분별이 사라졌으니 깨달음이란 말도, 해탈이란 말도
    그 자리에서는 공한 것일 뿐이다.

    그러면 이러한 분별과 다툼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라는 틀에서 온다.
    ‘나’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안’으로 만들어 놓으니,
    자연스럽게 상대적으로 ‘상대’라는 것이 생기고, ‘밖’이 생겨나는 것이다.

    ‘나’가 있으니 내가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거나 하는 나뉨이 있다.
    ‘나’가 있으니 내 소유의 많고 적음, 빈부가 생겨난다.
    일체 모든 상대적 분별개념은 모두 ‘나’라는 틀, 즉 아상에서 온다.

    아상이 있는 이상 분별은 계속된다.
    그런데 바로 이 아상에서 아집(我執)이 생겨난다.
    ‘나’라는 상이 있으니 ‘내 것’이라는 소유와 집착
    그리고 욕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욕심이 있는 이상 분별은 계속되며 다툼은 계속된다.

    그래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라는 일체 모든 상이 깨지고 나면,
    일체의 모든 분별이 타파되고,
    일체의 모든 욕심과 집착이 사라지며,
    그랬을 때 비로소 ‘다툼이 없는 삼매’
    곧 무쟁삼매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쟁삼매는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
    번뇌와 삼매를 나누어 놓고 삼매를 얻고자 하면 또다시 어긋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라고 하셨으며,
    ‘욕심을 여윈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하셨다.

    이 말은 다시말해 ‘나’가 사라진 자라는 뜻이고,
    무아를 체득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이는 또다시 일체 모든 나뉨이 사라지고 욕심이 사라지며
    집착과 번뇌가 사라진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수보리는 스스로
    ‘나는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라는 생각이 없다.
    앞서도 말했듯이 무쟁삼매는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번뇌와 삼매를 나누어 놓고 삼매를 얻고자 했다면
    벌써 무쟁삼매와는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나’라는 것이 사라졌으며,
    번뇌와 삼매라는 분별이 사라졌고,
    ‘사람’이라는 분별도,
    ‘제일’이라는 분별도 다 끊어졌다.

    더 이상 그 어떤 말로도 수보리를 표현할 수는 없다.
    오직 묵연한 침묵만이 그를 대변해 줄 뿐이다.

    깨달은 자가 스스로
    ‘나는 깨달은 자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깨달을 주체가 없다.
    깨달은 자가 없는데 어찌
    ‘나는 깨달았다’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깨달은 자’는 없고,
    오직 ‘깨달음의 행위’만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나 다시금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라는 방편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을 것이다.

    부득이하게 말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말은 온전한 진리를 그대로 풀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나는 깨달았다’고 말할 수 없으니,
    ‘나는 깨닫지 못했다’고 표현해야 하겠는가.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저를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며,
    욕심을 버린 아라한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스스로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다’라는 생각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입니다’라고도 할 수 없으며,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 아닙니다’라고도 할 수 없다.
    다만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다’라는
    생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며,
    그러한 분별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찌 ‘다툼이 없는 삼매’를 얻은 자가,
    ‘나는 아라한이다’라는 어리석은 분별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렇게 분별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다툼이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아란나행을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긴다’고 이르신 것입니다.


    만약 수보리가 스스로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했다면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과 분별이 일어났다면
    수보리는 더 이상 아라한도를 얻은 자도,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도 아니다.

    스스로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는 생각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아라한도를 얻은 증명이 되는 것이다.

    아란나란 무엇인가.
    이는 범어 아란야(Aranya)의 음역으로,
    무쟁처(無諍處) 혹은 적정처(寂靜處)로써,
    다툼이 없고 번잡함이 없어 고요한 곳을 말한다.

    수행자들이 수행하기 좋은 곳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고요한 숲 같은 곳을 말한다.

    그런데 이는 어떤 특정한 장소를 부르기도 하지만,
    내면의 아란야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마음이 다툼이 없이 고요하여 무쟁삼매를 얻은 그 자리를
    무쟁처 혹은 적정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 앞에서 언급했듯이 무쟁처란
    그 어떤 시비 분별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텅 빈 본 바탕을 말한다.
    법신 자성이 그대로 무쟁처요 아란나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수보리가 아란나행을 즐긴다는 것은
    다시말해 무쟁삼매에 빠져
    본 바탕의 법신과 하나되는 즐거움을 즐긴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다.

    무쟁삼매로써 무쟁처에 이르는 것이
    그대로 아란나행을 즐기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긴다’고 말씀하셨다.
    앞서 말한 ‘수보리는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
    이라는 말고도 상통하는 말이라 하겠다.

    다시말해 이 말은
    수보리가 어떤 성스러운 수행을 하고 있다거나,
    위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 아니다.

    성스러운 수행이니, 위대한 깨달음이니
    이 모두가 다 어리석은 분별이고 망상일 뿐이다.
    그저 푹 쉬고 있을 뿐이다.

    억지로 번뇌와 무명을 깨뜨려 진리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번뇌와 무명을 깨뜨리려는 것이 바로 다툼이다.

    그런 일체의 모든 분별과 나뉨을 다 놓아버리고
    푹 쉬고 있는 자리야말로 무쟁삼매의 자리요,
    아란나행이다.

    이는 그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자리일 뿐이다.
    어떤 위대한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할 ‘나’도 없고, 할 ‘수행’도 없어진
    그저 여여한 자리인 것이다.

    그러니 수보리를 위대하다고 생각지 말라.
    저런 수보리에 비해 나는 왜 이렇게 초라한가 하고 생각지도 말라.

    그 모든 분별을 놓아버려라.
    이 세상엔 처음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무일도 없다.

    깨달음을 얻을 ‘나’도 없으며,
    내가 해야 할 그 어떤 ‘수행’도 없다.
    오직 쉬기만 할 뿐이다.

    아무것도 할 게 없다.
    아무것도 나눌 게 없다.
    무쟁삼매의 자리,
    아란나행을 즐기는 일은
    그렇듯 푹 쉬기만 하면 되는 자리이다.

    아니 그 말도 분별이라면
    그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침묵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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