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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얻을 진리가 없다
    金剛經 2012. 1. 8. 07:04

     

     

    장엄정토분
    정토를 장엄하다


    第十 莊嚴淨土分
    佛告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昔在燃燈佛所 於法 有所得不 不也 世尊 如來 在燃燈佛所 於法 實無所得 須菩提 於意 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 云何 是身 爲大不 須菩提言 甚大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 부처님 처소에 계실 적에 어떤 법도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지니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을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의 일상무상분에서는
    깨달음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말아야 함을 말하였는데,
    이 분 장엄정토분에서는 그러한 가르침을
    정토장엄이라는 우리들에게 익숙한 표현을 빌어
    다시한번 강조하시면서
    정토를 장엄한다는 상을 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정토를 장엄한다거나,
    불교를 수행한다거나,
    중생을 구제한다거나 하는
    일체의 상을 깨버릴 것을 강조한다.

    깨달음에도, 정토에도, 부처에도,
    그 어디에도 머무는 마음을 내면
    그것은 온전한 깨달음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눈귀코혀몸뜻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
    그 어디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하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일상 생활 속에서 ‘함이 없이 하는 도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 부처님 처소에 계실 적에 어떤 법도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에 대한 일화들을 다룬 경전에서는
    공통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과거 인행(因行)의 시기에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수기(受記)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연등부처님께서 꽃을 공양하는 선혜 비구에게
    장차 사 아승지 십만 겁 후에
    석가모니라는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을 내리셨다고 한다.

    이러한 수기로 인해 일반적으로
    연등부처님께서 과거에 선혜 비구에게
    이미 어떠한 특별한 법을 주었으며
    그 법을 얻어 결국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셨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기는
    불본행집경, 자타카, 육도집경, 본생경 등에 등장하는 것으로써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왜 수보리는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도 얻은 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가.

    금강경은 일체의 모든 방편을 파하고
    근본을 드러내는 경전이다.
    금강경 앞에는 일체의 그 어떤 방편도 설 자리가 없다.

    깨달음을 전해줄 수 있는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참된 깨달음은 전해주거나 전해받는 어떤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고 받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항상 현존하고 있다.
    그대 앞에 항상 참된 모습으로 꽃을 피워내고 있다.
    아니 그대의 존재 그 자체가 그대로 깨달음의 증거이며 부처의 현현이다.

    우린 이미 완성되어 있다.
    이미 깨달아 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받을 필요도 없고 얻고자 애쓸 것도 없다.

    진리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여여부동하게 오고 감이 없이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런데 어찌 두 부처님 사이에 법이 오고 갈 수 있단 말인가.

    중생과 부처 사이에 법이 오고갈 수 있는가?
    중생과 부처가 따로 나뉠 것이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오고 갈 법 또한 없다.

    그런데 어찌 중생과 부처 사이에,
    혹은 부처와 부처 사이에 오고 갈 어떤 법이 있겠는가.
    주고 받고 할 어떤 수기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은 없다.

    아무것도 나뉘지 않은 텅 빈 적멸의 세계에서는
    그저 부처만 있다.
    이름을 부처라고 해서 그렇지 오직 ‘그것’만 있을 뿐이다.

    오직 영원의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
    오직 성성적적의 적멸만이 가득 차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이미 부처이다.
    당신은 과거에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는가.
    어떤 깨달음을 선물로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

    주고 받을 것이 없는데
    어찌 이런 물음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나는 부처님께 수기를 받지 않았고,
    어떤 특별한 법을 받지도 않았는데,
    저 선혜라는 비구는 부처님께 이미 수기를 받았구나 하고
    부러워 할 것도 없다.

    선혜가 수기를 받는 순간
    우리 모두는 함께 수기를 받았다.

    아니 선혜가 연등부처님께 수기를 받았다는
    그 표현 자체가 일체 모든 중생이 수기를 받았다는 방편의 설법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완전한 부처라는 방편의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무엇이 문제기에 깨달은 완전한 부처가
    이렇게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왜 우리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중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어떻게 하면 그 사실을,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가.
    어찌 하면 얻을 수 있는가.

    간단하다.
    진리는 너무나도 단순한 데 있다.
    일체를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얻어진다.

    그냥 놓아두면 된다.
    놓아버리는 순간 영원한 대자유가 찾아온다.
    그것은 얻는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그냥 본래의 고요를 되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 깨닫게 되어있다.
    깨닫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이미 부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은
    항상 깨달음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만히 놓아두면 누구나 저절로 깨닫는다.
    그냥 놓아두기만 하면 된다.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내면 깊은 곳에서 깨어있음의 빛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생각하고,
    애쓰고,
    안달하고,
    수행하고,
    고민하고,
    노력하려는
    그 모든 ‘나’의 행위들을 다 놓아버려라.

    겉에 드러나 있는
    거짓의 ‘나’가 행하는 모든 활동들을 멈춰라.
    껍데기의 ‘나’를 놓아버려야
    본래의 ‘나’가 활동을 시작한다.

    ‘나’를 가지고 어떻게 해 보려고 애쓰지 말라.
    깨달음을 얻고자 안달하지 말라.
    ‘어떻게’ 해 보려는,
    깨달아 보려는 마음을 푹 쉬기만 하면 된다.

    푹 쉬었을 때
    이 가짜의 ‘나’는 활동을 멈추고
    내면의 ‘그것’이 드러난다.

    ‘그것’을 한마음이라고 해도 좋고,
    ‘참나’라고 해도 좋으며,
    ‘부처’라고 해도,
    ‘자성’이라고 해도,
    그 어떤 표현을 써도 좋지만 거기에 머무르지는 말라.
    그 표현에 집착하지 말라.

    다만 다 놓아버리고
    그 어떤 것도 붙잡지 말며,
    그저 푹 쉬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꾸만
    ‘나’를 가지고
    ‘어떻게’ 해 보려고 한다는데 있다.

    그냥 있으면,
    그냥 푹 쉬면 저절로 이루어지는데,
    공연히 붙잡고,
    깨닫고자 애쓰며,
    부처가 되려고 노력한다.

    모든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냥 놔두지를 않는데서 모든 문제가 생긴다.

    모든 괴로움이 생기며,
    모든 번뇌가 생기고,
    모든 욕심과 집착이 들끓는다.

    그냥 놓아두라.
    애쓰지 말라.
    애쓰려는 마음을 놓으면 그냥 얻어진다.
    이미 얻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래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얻을 것’이 생기면 결코 얻을 수 없다.
    ‘얻고자 하는 것’이 없을 때 그 때 비로소 얻게 된다.
    아니 그냥 ‘얻음’이란 말 자체가 끊어지고 지고한 평화만이 현현한다.

    선혜 비구가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을 얻었다고 생각지 말라.
    그 때 선혜 비구가 연등부처님께
    무언가 얻은 특별한 법이 있었다면
    선혜 비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법도
    얻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부처를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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