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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리는 자유롭다
    金剛經 2012. 1. 5. 06:27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덕이 보시한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


    부처님께서는 단순히 물질적인 보시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보시도 무주상이 되었을 때는 이처럼 큰 공덕을 성취할진데,
    하물며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덕은 앞의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는 말을 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사구게란 앞의 제5분에 나왔던
    ‘범소유상 게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와 같은
    네 글귀로 된 게송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게송들이 시적으로 표현되다 보니
    네 글귀의 시적인 게송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고
    그래서 대표적으로 사구게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일 뿐,
    반드시 네 구절로 된 경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어떤 특정한 구절을 지정해서 의미하는 것일 수도 없다.
    여기서 ‘사구게’라는 것의 참된 의미는
    ‘이 경전 가운데 가르침을 잘 함축하고 있는 어느 한 구절’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본다.

    사실 5분에서의
    범소유상 게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도
    구마라집 번역에서나 사구게로 딱 떨어지도록 되어 있지,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 역에서는 네 구절로 딱 떨어지지는 않는다.

    이처럼 이 분에서 부처님 말씀의 핵심은 이것이다.
    앞서 언급한 칠보 보시의 비유는
    그처럼 많은 물질적 보시를 하더라도 공덕이 무량할진데,
    정말 소중한 진리의 말씀 한 구절을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보시하는 것은
    그보다 더한 공덕을 성취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물질적 보시보다는
    법보시가 더 수승하다는 말이다.
    왜 그러할까.
    그 답변이 다음 구절에 나온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일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보시보다도 법보시가 수승하고 공덕이 많은 이유는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일체 모든 상을 타파하도록 이끄는
    이 경전의 가르침을 깨달아야만 부처가 될 수 있으며,
    최상의 법이라는 것도
    상을 타파하는 금강경의 이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금강경의 이러한 가르침이야말로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 수 있으며,
    진리의 법을 얻도록 이끌어 줄 수 있다.

    아무리 많은 물질적인 보시를 하더라도
    그것이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기는 어렵다.
    물질적인 보시를 많이 행하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정신까지 부유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보시 중의 으뜸 가는 보시는
    물질적인 보시가 아니라 가르침의 보시이다.

    가르침의 보시는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타파해 주고,
    탐진치 삼독심을 버릴 수 있게 해 주며,
    일체 모든 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그러한 가르침의 보시 중에 가장 으뜸가는 가르침은
    금강경의 가르침,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비롯하여 법상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든 상이란 상은 다 타파해 주는’ 가르침이다.

    일체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깨달아 일체 모든 상에서 벗어나며,
    상에 얽매이지 않고 물들지 않을 때 비로소 깨달음이 오는 것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으로 깨달으신 분들이 부처님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부처님일 수 있는 이유는
    일체의 모든 상을 다 타파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을 말씀하고 계신다.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구마라집 역에서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다’라는 말로만 맺음이 되어
    뒷 부분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 부분의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 역에서는
    그 뒤에 ‘그러므로 불법이라고 여래는 설한다.’라는 부분이 나와있다.

    현장역에서는
    ‘수보리야, 여래가 설하길,
    모든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불법이라고 여래는 설한다.’라고 했고,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수보리여, 불법들이라는 것은 불법들이 아니라고 여래에 의해서 설해졌나니,
    그래서 말해지기를 불법들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이 뒷 구절이 나와 있어야
    비로소 아상타파를 위한,
    공 사상을 드러내기 위한 금강경의 논법인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라는 논법이 성립된다.

    그런데 문득 이러한 말이 왜 나오게 되었는가.
    법보시의 공덕에 대해 설하는 이 장의 맺음에서
    왜 갑자기 이러한 말씀을 하셨는가.
    그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 이 경전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 말은 일체 모든 상을 타파해야 한다는 금강경의 가르침에서
    모든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게송의 가르침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며,
    이는 다시말해 불법 속에서 부처님이 나왔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흡사 이 말은 이 금강경의 가르침인 불법만이 진리이며,
    이 법만이 부처님을 나오게 한다고 들릴 수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불법을 이해한다면
    이 사람은 불법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상을 타파하라는 불법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불법이라는 상에 얽매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불법 속에서 모든 부처가 나왔으며,
    이 불법을 보시하는 것이
    가장 수승한 공덕이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렇게 듣고 나니 어리석은 중생들은
    ‘아 이 불법만이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자칫 불법에 집착하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를 경계하고 계신 것이다.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
    즉 불법에도 집착하면 안되고,
    불법이라고 고정된 어떤 실체도 있지 않다는 말이다.

    불법이라는 틀, 불법이라는 상까지도 타파했을 때
    비로소 참된 불법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불법을 불법이라고 하면 이것은 불법이 아니다.
    불법을 불법이 아니라고 바로 알았을 때
    비로소 불법은 빛을 발할 수 있다.

    불법도 하나의 이름일 뿐이다.
    불교도 이름이고, 부처도 이름일 뿐이다.
    그래서 옛 스승님들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했다.

    상의 타파에는 그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설령 부처가 되었든, 불법이 되었든,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고정되게 실체화하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될 수 없다.

    불교를 불교라고 하면 불교가 아니고,
    진리를 진리라고 하면 진리가 아니며,
    부처를 부처라고 하면 더 이상 부처가 아니다.

    불교라는 상을 세우면 이미 불교가 아니고,
    진리라는 상을 세우면 이미 진리가 아니며,
    부처라는 상을 세워도 이미 부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를 신행하는 불자들은
    스스로를 ‘불자’라는 틀에 가둬선 안된다.
    불법의 진리를 ‘불교’라는 틀에 가둬서는 안된다.
    가두어진 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고 진리가 아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고 신앙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불교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참된 불자라면 이렇게 활짝 열려있어야 한다.
    그 어디에도 걸려선 안된다.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불교라는 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고,
    진리라는 틀에서도, 부처라는 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을 때
    비로소 불교를, 진리를, 부처를
    바로 보고 믿으며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를 버렸을 때 비로소 불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어디에도 치우쳐져 있지 않은 이 세상의 종교이고,
    이 세상의 진리이다.

    믿건 믿지 않건간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건 그렇게 생각하지 않건간에
    불교는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의 공통된 종교인 것이다.

    다만 이름을 ‘불교’라고 해 놓았다 보니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일 뿐이다.
    이름이 불교일 뿐, 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그렇기에 불교이다.

    그렇기에 진리이고,
    그렇기에 일체 모든 존재의, 일체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종교이며 진리라는 말이다.
    그래서 천상세계의 종교는
    오직 ‘불교’만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 말은 다시말해 천상세계에는 오직 ‘진리’만이 있다는 말이다.

    어떤 다른 종교의 신자들이
    불교는 진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불교라는 이름을 보고 있거나,
    불교라는 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오해가 있는데는 불자들의 잘못이 크다.
    불자들 스스로 ‘불교’를 틀에 가두고
    그 틀 속에 많은 신자를 끌어모으기에만 바빴고,
    불법이라는 틀을 만들어 두고 그 안에 갖혀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불교는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으며,
    어떤 말로도 규정지을 수 없다.
    다만 이름을 ‘불교’라고 했을 뿐이다.

    보편적인 진리를 이름하여
    ‘불교’라고 이름짓기로 약속했을 뿐이다.

    그런데 요즘의 불자, 수행자들은
    간간이 그 약속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불교’라는 틀을 만들어 두고 그 안에 갖히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왜 불교신자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야 하는가.
    불교가 타종교에 비해 신자가 많아져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를 어떤 하나의 ‘종교’로 가두어 놓고
    사람들을 그 안에 많이 포섭시키기 위해 애쓸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어리석은 이들의 행동일 뿐이다.

    우리의 신자는 생명 있고 없는 일체 모든 존재이고 생명이며
    우주법계 그 자체다.

    심지어 소나 돼지나 강아지조차 우리의 신도이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구름과 바람과 하늘이
    다 우리의 신도이다.

    기독교 신자, 천주교 신자, 원불교 신자, 이슬람교 신자,
    그리고 종교가 없는 그 모든 이들이 우리의 신자이다.
    그들이 우리의 신자이며, 우리가 그들의 신자이다.

    이름을 불교라고 해서 그렇지,
    이 모든 존재와 생명이 그대로 진리의 신자이며,
    진리 속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좋은 도반들일 뿐이다.

    이렇게 툭 터진 마당에
    왜 억지로 ‘불교’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불교신자와 타종교 신자로 나누어 놓고
    불교신자로 만들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라는 틀을 깨야 한다.
    ‘불법’이라는 틀을 깨야 한다.
    그 틀만 깨면 아무런 장애가 없고, 다툼이 없으며,
    일체가 고요하고 평화롭다.

    불교신자라는 틀이 없으니
    타종교신자라는 틀이 있을 것도 없고,
    불교라는 틀에 가두지 않으니 일체 모두가 불교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종교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진리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의 보편적이고 온전한 가르침인 것이다.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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