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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흐름에 들라
    金剛經 2012. 1. 6. 06:34

     

    일상무상분
    깨달음이란 상도 없다

    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 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須菩提 於意云何 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斯陀含 名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須菩提 於意云何 阿那含 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阿那含 名爲不來 而實無不來 是故 名阿那含 須菩提 於意云何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實無有法 名阿羅漢 世尊 若阿羅漢 作是念 我得阿漢道 卽爲着我人衆生壽者 世尊 佛說我得無諍三昧 人中 最爲第一 是 第一離欲阿羅漢 世尊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世尊 我若作是念 我得阿羅漢道 世尊 則不說 須菩提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提 實無所行 而名須菩提 是樂阿蘭那行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이름이 ‘흐름에 든 자’를 말하오나
    실은 들어간 바가 없습니다.
    그는 형상에 들지 않았으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든 것도 아니기에 수다원이라 이름합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이름이 ‘한 번 갔다 오는 자’를 말하오나
    실은 가고 온다는 생각이 없기에 이름하여 사다함이라 하였을 뿐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나함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이름이 ‘돌아오지 않는 자’를 말하오나
    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없기에 이름하여 아나함이라 하였을 뿐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진리라고 할 것이 없음을 이름하여 아라한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하면 이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를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며,
    욕심을 여윈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세존이시여,
    저는 제가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아란나행을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긴다’고 이르신 것입니다.


    ‘일상무상’의 의미는
    아무리 궁극적인 실체의 모양[一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모양으로써 취할 수 있는 상이 아니라는[無相] 말이다.

    ‘일상’이란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 즉 해탈과 열반의 모습을 말한다.
    우린 보통 해탈이다, 열반이다, 부처다 라고 하면
    어떤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위엄있고 근엄한 부처님의 모습을 떠올린다거나,
    해탈의 세계, 열반의 세계를 떠올리면서
    그것은 늘 행복하고 평화로우며 아름다운 천상일 것이라는 등의
    모양을 세우곤 한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곧 모양없음을 말한다.
    일체의 모든 상이 타파된 자리를
    해탈, 열반이라고 이름붙이기로 약속했을 뿐이다.
    그런데 상이 타파된 그 자리를 가지고
    또다른 모양을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이 분에서는 일상,
    즉 궁극의 마지막 하나의 실체까지도
    그것이 모양이 아님을 설하고 있다.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는 네 가지 단계를 설하면서
    그 단계 또한 모양이 아니고,
    그 단계의 깨달음 또한 모양으로 얻는 것이 아님을 설하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이름이 ‘흐름에 든 자’를 말하오나
    실은 들어간 바가 없습니다.


    수행 사과란
    수행을 통해 증득하여 얻는 깨달음의 결과인 과위(果位)로써
    수다원, 다사함, 아나함, 아라한을 말한다.

    우선 부처님께서는 그 첫 번째 과위인 수다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깨달은 자가 ‘나는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그는 깨닫지 못했다.
    깨달았다고 할 내가 없는 것이 깨달음이다.

    아상을 비롯한 일체 모든 상을 여읜 것이 깨달음이며,
    무아(無我)의 증득이 깨달음일진데,
    ‘나는 깨달았다’고 했다면 그것은 벌써 한참을 어긋난 것이다.

    깨달음을 얻을 주체가 없다.
    어리석은 중생과 깨달은 성인이 둘이 아니다.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
    그러한 툭 터진 텅 빈 깨달음의 자리에
    ‘나는 깨달았다’는 말은 끼어들 틈이 없다.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노라’
    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 바로 그것이다.

    수다원이란 말은 예류(預流), 혹은 입류(入流)라 번역한다.
    이는 곳 ‘흐름에 든 자’를 말한다.
    흐름에 들었다는 말은 무엇인가.
    류(流)는 깨달음, 성도, 해탈, 열반을 의미한다.
    즉 수행을 통해 이제 막 깨달음의 흐름에 든 자를 말한다.

    그런데 왜 깨달음을 류(流)라고 하였는가.
    흐름에 든다는 표현을 썼는가.
    이 표현은 참으로 진리를 설명하기에 흡족한 말이다.
    우리는 모두 흐름에 들어야 한다.
    흐름에 내 온 존재를 완전히 내맡길 수 있어야 한다.
    법계의 흐름, 진리의 흐름을 타고 함께 따라 흐를 수 있어야 한다.

    흐름이란 무엇인가.
    흐름이란 멈춤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 세상은 언제나 흐르고 있다.
    흐르지 않는 것은 없다.
    어디에도 멈추는 것은 있지 않다.
    어떻게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현상도
    언제나 흐르며 변화할 뿐, 멈춰서지 않는다.
    찰나 찰나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존재의 법칙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끊임없이 변한다는 진리이다.
    항상하지 않고 흐르므로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없다.[제법무아(諸法無我)]
    항상하지 않고 실체적 자아가 없는 것은 괴로움이다.[일체개고(一切皆苦)]
    이것이 이 세상 모든 존재의 변하지 않는 세 가지 법칙, 삼법인(三法印)이다.

    이렇듯 이 세상은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나로 흐른다.
    변화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없다.
    변화하는 그 흐름에서 벗어나려 하지 말라.
    그 흐름에 몸을 맡기라.
    변화를 멈춰 세우려고 하지 말라.
    변화의 흐름을 붙잡아 두려 하지 말라.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려는 데서 온다.
    흐름을 타지 않는데서 온다.

    변화하는 것이 두렵고,
    지금 이 모습이 그대로 지속되길 바란다.
    이 몸이 지속되길 바라고,
    이 행복의 느낌이 지속되길 바라며,
    내 돈과 명예, 권력, 가족, 친구...
    이 모든 것이 지속되길 바란다.

    그것들이 변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변화하는 것 말고,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무언가를 바라면서,
    안주할 것을 찾게 된다.

    지속됨과 안주 속에 행복이 있을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것은 없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영원히 안주하여 머물 곳은 없다.
    오직 변화라는 흐름만이 있을 뿐.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
    몸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며,
    감정도 변하고, 사랑도 미움도 변한다.
    사상이나 견해도 변하고, 욕구나 욕심도 변한다.
    명예나 권력, 지위도 변한다.
    업(業) 또한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름다운 법계 본연의 모습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라.
    함께 변화하라.
    그 흐름에 들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수행은
    오직 이것 밖에 없다.

    모든 것을
    변하는 대로
    그저 있는 그대로 놔두라.

    어떻게 하려고 애쓰지 말라.
    어떻게 바꿔보려고 다투지 말라.
    그냥 변화라는 진리를 변하도록 그대로 놓아두기만 하라.
    그 흐름에 내 전 존재를 맡기고 함께 따라 흐르라.

    변하지 않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들 삶의 목적이
    ‘변치않음’의 추구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 세상을 그냥 놓아두라.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
    머물러 있지 말라.
    그저 흐르도록 놓아두라.

    이 세상을 그냥 놓아두면 저절로 알아서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은 정확하다.
    정확히 있어야 할 일이
    있어야 할 때에
    있어야 할 곳에서 흐르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법계라고 하는 것이다.
    명확한 진리, 법에 의해 흐르는 세계라는 뜻이다.

    변화에 의해 온전하게 흐르고 있다.
    그 흐름을 거부하지 말라.
    그대로 놓아두라.
    어떤 것을 애써 잡으려 하지 말라.

    깨달음도 잡지 말라.
    잡을 것이 없는 것, 고정된 것이 없는 것,
    모양이 없는 것, 안주할 것 없는 것,
    항상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깨달음이라 한다.
    그런데 왜 도리어 그것을 잡지 못해 안달하는가.

    부처님의 말씀은 오직 이것이다.
    부처님의 수행은 오직 이것이다.
    그냥 놓아두라.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변하는 대로 그냥 두라.
    다만 그 흐름에 들라.

    지금까지 우리들의 삶은 변화를 거부해왔다.
    변화를 거부하며 안주와 지속을 바랬다.
    흐름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수행이란 아주 단순하며 명쾌하다.
    다만 흐름에 들면 된다.
    지금까지의 온갖 집착과 안주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벗어나면 흐름에 들게 된다.
    이렇게 흐름에 든 자가 바로
    수행 사과의 첫 번째 과위인 수다원이다.

    수다원은 흐름에 든 자다.
    그러나 수다원은 제 스스로 흐름에 들었다는 생각이 없다.
    흐름에 든다는 것은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다.
    대단한 무언가를 얻은 것이 아니다.

    누구나 아무 일 없이,
    그저 편안하게 푹 쉬면 그대로가 수다원이고 흐름에 든 자다.

    그 어떤 얻음이나 수행의 결과가 아니다.
    다만 어리석은 이들은
    애써 붙잡으려 하고, 집착하려 하기 때문에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을 뿐이다.

    붙잡아 둘 수 없고,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것으로 붙잡아두려는 어리석음을 일으키고
    그로인해 모든 문제는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수다원에 드는 것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인가,
    어리석게 붙잡는 중생의 길을 택하는 것이 더 힘겨운 일인가.
    중생은 스스로 붙잡고 붙잡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애를 쓰며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괴롭다.

    공연히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고
    스스로 만든 괴로움에 스스로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냥 일시에 다 놓아버리기만 하면
    즉시로 흐름에 들게 되는데
    그것을 놓지 못한다.

    수다원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집착하고 붙잡으려 하는 중생들이 어리석은 것이고 이상한 것이다.

    수다원은 전혀 대단한 어떤 것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것이다.
    그러나 그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다.
    지극한 평범함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길이다.

    그러니 흐름에 든 수다원이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길 것이 없다.
    스스로 ‘내가 수다원과에 들었노라’고 선언할 것이 없다.
    그러한 선언은 스스로를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선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수다원은 ‘흐름에 든 자’를 말하지만
    실은 들어간 바가 없다.
    들어가고 나가고 할 일이 없다.

    그냥 쉬기만 했을 뿐.
    그냥 온전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다른 어떤 일을 하지 않고
    그 흐름을 타기만 했을 뿐이다.

    그것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무런 노력이 필요없다.
    수행은 그런 것이다.

    깨닫기 위한 노력은 수행이 아니다.
    수행이란 그저 쉬는 것일 뿐이다.
    그저 푹 쉬었을 때 완전한 법계의 흐름에 동참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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