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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은 복이 아니므로 복이다
    金剛經 2012. 1. 4. 06:24

     

    의법출생분
    이 법에 의해 모든 가르침이 나온다

    依法出生分(제8.의법출생분)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所得福德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 卽非福德性 是故 如來 說福德多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 勝彼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 及諸佛 阿뇩多羅三먁三菩提法 皆從此經出 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수보리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널리 보시하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덕이 보시한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일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의법출생’이라는 이 분에서는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이 경의 가르침에서 나왔다고 밝힘으로써
    상을 타파하는 이 경전의 가르침이 수승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수승함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써 널리 보시하는 것 보다
    더 한 수승함이다.

    ‘일체 모든 상의 타파’를 밝히는
    금강경의 가르침이야말로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 즉 불법이라고 하는
    그 상 마저도 타파되어야 할 또다른 상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이를 불법이라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일체의 모든 상을 타파하는 것이 불법이며,
    금강경의 가르침이고,
    거기에는 불법이라는 상 또한 타파되어야 할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

    그렇듯 불법조차 모두 타파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불법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수보리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널리 보시하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용을 살펴보기 앞서 삼천대천세계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삼천대천세계라는 이 말에는
    불교의 세계관이 잘 나타나 있으며 경전에서도 자주 등장할 뿐더러,
    사찰을 지을 때에도 이러한 불교의 세계관에 기초하여
    도량을 건축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다.

    또한 요즈음의 현대 천체물리학에서 연구되고 있는 결과와도
    불교의 우주관은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다.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중심에는 수미산이 서 있고
    그 수미산을 동심원으로 일곱 개의 산과 여덟 개의 바다가 둘러싸여 있다.
    이 칠산팔해의 가장 변방의 산이 철위산이고
    철위산으로 둘러싸인 팔해의 마지막 바다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커다란 대륙이 있는데,
    이곳이 북구로주, 남염부주, 동승신주, 서우화주이다.

    수평적으로 보았을 때,
    이 네 곳의 대륙의 지표면에 인간과 축생이 살고 있으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남쪽의 염부주로
    이 곳이 가장 살기 어렵고 박복한 곳이라고 한다.

    한편 수직적으로 보면 인간과 축생이 사는 그 아래쪽
    철위산의 밑바닥에 지옥과 아귀의 세계가 차례로 있으며
    더 위로 올라가 수미산의 중턱에 사천왕천이 있다.
    사천왕천은 네 개의 천상으로 이를 다스리는 네 명의 천왕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이다.

    그리고 사천왕천에서 더 위로 올라가 수미산의 정상에는
    33천이라 불리우는 도리천(忉利天)이 있으며,
    이 곳의 천주가 제석천이다.

    또한 천상계는 아니지만 공중에 아수라가 있는데
    이들은 항상 분노와 진심이 많아
    인접해 있는 제석천의 천병들에게 계속해서 싸움을 건다.
    항상 지면서도 업이 그러하기 때문에
    늘 전쟁을 일삼아 아수라가 사는 곳은 늘 정신이 없고
    전쟁터처럼 폐허가 되어 있다.
    그래서 아수라장이란 말도 생겨난 것이다.

    그 다음이 야마천이고,
    그 위에 차례로 도솔천, 낙변화천, 타화자재천이 있는데,
    이상의 여섯 개의 천상을 욕계 육천이라고 한다.
    욕계란 식욕․수면욕․색욕과 같은
    온갖 욕망으로 뒤덮인 세계를 말한다.

    이 욕계의 하늘이 이상과 같이 여섯가지라
    욕계 육천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아래에는 앞서 말했듯이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이 살고 있다.

    욕계 육천 위로는 색계의 18천이 있고,
    다시 그 위로 무색계의 4천이 있다.
    색계란 욕계에서와 같은 온갖 욕망들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 물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존재들이 사는 세계로
    살아 있을 때 초선부터 사선까지의 4가지 선정을 닦은 사람이
    죽은 뒤에 태어나는 곳이며,
    무색계란 욕망은 물론이고 물질에서도 완전히 벗어난 곳으로
    공무변처정․식무변처정․무소유처정․비상비비상처정의
    4무색선정을 닦은 자가 태어나는 세계를 말한다.

    이렇게 수미산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지옥에서부터 시작하여
    위로 28개의 천상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세계를 '하나의 수미세계'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의 수미세계 1,000개가 모인 것을
    일 소천세계라 하며,
    이 소천세계 1,000개를 모은 것이 중천세계,
    또 이 중천세계를 1,000개 모은 세계가 바로 ‘대천세계’인 것이다.

    이 대천세계는 소천, 중천, 대천이라는
    세 종류의 하늘세계가 모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삼천대천세계’라고 불리운다.

    즉 삼천대천세계는 10억개의 수미세계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로
    그야말로 무량수 무량광 한량없는 크기의 우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칠보는 수많은 경전에 등장하는 일곱가지의 보물로써
    [아미타경]에서는
    금, 은, 유리(다이아몬드), 파려(적백의 수정), 자거(백색의 산호),
    적주(붉은색 진주), 마노(짙은녹색의 보옥)를 들고 있고,
    [법화경]에서는
    여기에 파려와 적주를 빼고 대신에 진주와 매괴를 포함시키고 있는데,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진귀한 보배를 말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부처님께서는 무량한 세계인 삼천대천세계에
    가장 진귀한 보배인 칠보로써 가득 채워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을 복덕이 얼마나 많겠는가를 묻는다.

    이에 수보리는 매우 많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이유를 함께 말씀드리고 있다.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질문하신 깊은 의미를 알기 때문에
    그저 많다고 하지 않고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셨다’
    고 하고 있다.

    수보리는 지혜로운 답변을 하고 있다.
    그저 많다고 한다면
    그 답변은 반쪽짜리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나 수보리는 많다고 답변하면서
    그 이유는 ‘복덕은 복덕이 아니므로 복덕이다’고 하고 있다.

    이 논법은 금강경에서 전체적으로 나오고 있는
    논리 전개법이다.
    일반적인 생각에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도저히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
    라는 논법은 논리를 초월해서 지혜로써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논법이다.

    어리석은 이에게 있어서
    이 논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이 논법이야말로
    금강경의 ‘완전한 상의 타파’를
    그나마 언어로써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언어는 완전하지 못하다.
    완전하지 못한 언어를 가지고
    완전한 진리를 표현하기는 그만큼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도무지 성립될 것 같지 않은 논법이
    진리를 표현하는 금강경의 논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구마라집 번역에서는
    위의 번역에서와 같이 복덕과 복덕성이라는
    두 가지 표현을 씀으로써 앞의 복덕과 뒤의 복덕성의 차별을 두어
    산스크리트 원문에서 쓰여지는 논법인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라는 금강경 논법을
    조금 벗어나 있다.

    이 부분의 산스크리트 원문의 해석은
    ‘세존이시여, 선서시여, 그 선남자 선여인은 이로인해서
    공덕의 무더기를 쌓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공덕의 무더기라고 여래께서 설하신 것,
    그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설하시기를
    공덕의 무더기, 공덕의 무더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라고 되어 있으며,

    직역을 중시한 현장의 번역에서도
    이러한 해석은 계속되고 있다.
    [현장역, 世尊. 福德聚福德聚者
    如來說爲非福德聚 是故 如來說名福德聚福德聚]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번역이라기 보다는
    조금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구마라집의 의역일 것이라고 보여진다.

    다시말해 혜거스님의 강설에서 이해되었듯이
    유위법으로써의 복덕과 무위법으로써의 복덕성을 대비시킴으로써
    조금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다.

    즉, 유위법으로써의 복덕은
    무위법으로써의 ‘복덕의 성품’을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위법으로써의 복덕이 많다고 말할 수 있다.
    무위법으로써의 복덕의 성품이란
    본래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많고 적음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유위법으로써의 복덕이란 분명히 많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서는
    금강경의 본래의미를 확연히 드러내 주기에는 많은 부족함이 있어 보인다.

    앞서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의 해석에서처럼
    ‘그렇게 보시하면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공덕의 무더기라고 한 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공덕의 무더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라고 해석을 하면 다음과 같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보시를 하면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
    공덕의 무더기라는 것은 유위법으로 보았을 때 공덕이지만,
    무위법으로 보았을 때는 공덕이 될 수 없다.
    아니 공덕이라는 이름 자체도, 그 상 자체도 타파되어야 한다.

    앞서 4분에서 이해되었던 것 처럼,
    보시를 하지만 상에 얽매여 보시를 하지 않았을 때
    그 공덕은 무량한 것이다.
    다시말해 많은 공덕의 무더기를 쌓았지만
    ‘이것이 공덕의 무더기다’라고 스스로 상을 짓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공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덕의 무더기라 한 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다’
    라는 논법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공덕이다라고 상을 짓는 것은 공덕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르게 이해되었을 때만이
    비로소 진정한 공덕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공덕의 비유를 드심으로써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보시한 공덕이 무량함을 말하고 계신다.
    그 무량한 이유는 무주상이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보시하더라도
    ‘내가 보시했다’고 하는 상에 머물러 보시하고,
    ‘보시했으니 이것은 공덕이 될 것이다’라고 상을 짓는다면
    그것은 공덕이 되지 않을 것이지만,
    그 많은 보시를 했으면서도
    ‘공덕은 공덕이 아니다’라고 바로 이해를 했기 때문에
    비로소 그것은 많은 공덕이 될 수 있다는 말인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와의 문답을 통해서
    물질로써 무주상보시를 하는 것은
    이와 같이 복덕이 많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단순히 물질적인 보시가
    이처럼 복덕이 많은 것이니
    물질적으로 많이 보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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