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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정된 법은 없다
    金剛經 2012. 1. 2. 10:17

     

     

    무득무설분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

    無得無說分
    須菩提 於意 云何 如來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須菩提言 如我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뇩多羅三먁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수보리야,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제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모든 현인과 성인은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기 때문입니다.


    ‘무득무설’이란 말 그대로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는 뜻으로써,
    이 분에서는 본래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는
    무유정법의 이치를 밝혔다.

    부처님 가르침은 정해진 것이 아니며
    ‘이것이 진리다’라고 할 만한 고정된 법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앞 장에서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다.
    일체 모든 상을 타파하도록 이끌고 있다.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는
    이러한 부처님의 법을 듣고
    ‘이 말씀이야말로 진리구나’
    ‘이러한 법을 깨달으신 부처님처럼 나도 깨달음을 얻어야겠다’
    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지금 네가 생각하는 그런 법은 없으며,
    내가 설한 바도 없고, 또한 얻은 바도 없다는 말로써
    법은 어디에도 집착됨이 없음을 다시금 일깨우고 계신다.


    “수보리야,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제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최상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말로써,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혹은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라 번역한다.

    그 뜻은 ‘가장 높고, 바르며, 원만한 깨달음’으로,
    ‘무상’이란 더 높은 깨달음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고,
    ‘정’이란 객관적이고 타당성이 있는 치우침 없는 가르침이라는 말이며,
    ‘등’은 어느 한쪽에만 타당한 가르침이 아닌
    일체 모든 존재에게 두루하는 보편적인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부처님이야말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분이시며,
    부처님께서는 항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설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당연한 물음을 던지신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수보리의 답변은 ‘예 그러하옵니다.’ 가 되어야 하겠지만
    수보리는 부처님 질문의 의도를 바로 깨닫고 있다.

    수보리의 답변처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것 또한 언어적인 표현일 뿐이지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만한 고정된 법이 없다.

    왜 그러한가.
    부처님은 새로운 가르침을 펼치신 분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 내신 분이 아니다.

    이 세상은 언제나 진리 그대로일 뿐이다.
    진리는 항상 온 우주 법계를 골고루 비추며
    항상 참빛을 수놓고 있다.

    진리는 없어진 적도 없고
    다시 만들어 진 적도 없으며,
    아니 진리라고 이름붙일만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인간들이 텅 빈 진리의 세계를 보지 못할 뿐이다.

    스스로 삐뚫어진 생각과 분별로 괴로움을 만들어 놓고
    그 틀 속에 스스로 갖혀있을 뿐이다.

    괴로움도 스스로 만든 것일 뿐,
    본래 괴로움이란 없다.
    인간의 욕심과 집착 온갖 번뇌며 분별들이
    우리를 얽어매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여래의 눈으로 본다면
    그 또한 역시 진리의 모습으로 온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만 여래는 전도된 망상을 깨라고 하시고,
    어리석은 욕심과 집착을 놓으라고 말씀하고 계실 뿐이다.
    그것을 어찌 진리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 무거운 바위를 짊어지며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릴적부터 그 바윗덩이를 늘 짊어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또 남들도 그렇게 짊어지고 살기 때문에
    그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그렇지만 너무 무겁다.
    이렇게 큰 바위를 들고 살아가기가 너무 힘에 겹다.
    그래서 괴롭다고 야단이다.

    어느날 바위를 이렇게 붙잡고 살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된 한 사람이
    이 사람에게 놓아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한 번도 놓아본 적이 없었고,
    놓으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었으며,
    남들도 다 붙잡고 살아가고 있다보니 놓을 수 없다고 고집한다.

    안 놓으려고 꼭 붙잡고 살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이미 놓아버리고도 아무런 일 없이,
    아니 오히려 가볍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과감하게 스스로 놓아버렸다.

    놓고 나면 큰 일이 날 줄 알았는데
    놓고 나니 비로소 자유롭고 무거운 삶의 짐을 덜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괴로움은 없다.
    그렇다면 놓으라고 한 그 말이 진리인가?
    스스로 깨닫고 놓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인가?
    제 스스로 들고 있으니
    다만 놓으라는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말만을 했을 뿐이지만
    그 사람은 그로인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말을 진리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진리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이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괴로워하고 있는 실체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고정관념일 뿐이며,
    욕심이고 집착일 뿐이다.

    부처님은 다만 그것을 놓으라고 말씀하실 뿐이다.
    진리는 그 무엇도 붙잡고 있지 않다.
    항상 빈 손이며, 텅 비어 있고, 자유롭다.

    그런데 다만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붙잡을 것들을 하나 하나 만들어 내었고
    거기에 집착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괴로움은 시작되었다.

    부처님께서도 처음에는 붙잡고 사셨지만,
    비로소 깨달았다.

    붙잡고 있는 것만 놓으면
    그대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놓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지금 붙잡고 있는 것은
    다만 ‘집착’일 뿐이라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내 것’을 늘리려고 집착하고 욕심부리고,
    그래서 스스로 아상과 아집을 만들어 내지만
    그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신 것이다.

    그래서 아주 간단하게 말씀하신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놓아라”
    “그것이 너가 아니다. 놓아라”

    본래 우리는 아무것도 잡지 않고 있었다.
    그 때는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고, 무거울 것이 없고,
    삶이 힘들 것이 없었다.
    다만 진리만이 있었고, 평화만이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하나씩 하나씩 잡기 시작했다.
    실체인 줄 알고 잡기 시작했다.
    그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 되었다.

    집착하여 붙잡기 이전에는
    오직 진리만이 있고, 고요만이 있으며,
    일체 모든 존재는 그대로 법신이고 부처였다.

    아니 이런 말 조차 필요 없는
    텅 빈 허공 그 자체였다.
    다만 진리만이 있을 뿐,
    다만 하나만이 있을 뿐,
    아무것도 나뉘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 것’이라고 나누기 시작하면서 분별하고,
    자신의 것을 가지려는 집착과 소유, 욕심을 일으키면서부터
    이 세상은 괴로운 곳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이 세상은 온전한 진리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그 괴로움은 그 사람의 문제다.
    다만 그 사람이 스스로 착각하여 스스로 만들어 낸
    괴로움일 뿐이고, 고정된 상일 뿐이다.

    스스로 붙잡아서 괴로운 것이니
    스스로 놓아버리면 다시 본래자리로써 여여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만 그것이다.

    “잡아서 괴롭다면 놓아라”

    이렇게 평범한 말이다.
    이것을 진리라고 할 것인가?
    법이라고 할 것인가, 법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이것을 깨달은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은 것이라고 할 것인가?

    물론 다 언어의 장난일 뿐이니,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여전히 우리가 만들어 낸 약속이고
    비실체적인 것일 뿐이다.

    그것 또한 놓았을 때
    비로소 완전한 본래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보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만한 정해진 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며,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깨달아 있는데
    거기에 또다시 깨달음이라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이름을 붙일 것은 무엇인가.

    이해를 위해 방편으로 그런 이름을 붙이기로 약속했다면
    이해된 뒤에는 그 약속 또한 놓아버려야 한다.

    여래가 ‘이것이 진리다’라고
    고정된 진리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멀었다.

    그것조차 놓아버렸을 때
    여래의 참 뜻을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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