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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처님께 선근을 심으라
    金剛經 2011. 12. 29. 04:48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
    셋 넷 다섯 부처님께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수많은 선근을 심어 놓았으므로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왜 그럴까요?
    왜 부처님께서 멸도 한 지 후 오백세가 되도록
    불법이 멸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계정혜를 닦으며 정법을 수행하는 자가 있다고 말씀 하셨을까요?

    그 답변이 바로 이 구절에서 나옵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꾸준히 남아 이 세상을 밝게 비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연법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인연은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과 지은 인연,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면서 지은 인연,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는 수많은 선지식과 지은 인연은
    아무리 수많은 세월이 흐르더라도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선한 인연의 뿌리,
    즉 선근을 심되 과거 전생 또 그 전생을 이어오면서
    수많은 부처님과 그 인연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수많은 부처님과 불법인연을 맺어 놓았기 때문에
    이렇게 지금까지도 불법을 만나 수행할 수 있고
    나아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 생에 선근을 심었다고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수행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정진하는 마음으로 선근을 심어 나가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과의 인연을 잘 가꾸는 일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부처님과 좋은 인연을 맺음으로써
    아무리 험한 말법 시대가 오더라도
    정법을 잊지 않고 수행해 나가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처님께 선근을 심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세상에 태어나
    직접적으로 부처님과 인연을 짓고, 법문을 듣고,
    가르침을 청함으로써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시대라고,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이 시대라고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이란 몸으로써 나투신
    화신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참된 부처님이란 법신을 의미합니다.
    법신이란 진리의 몸으로써
    이 세상 삼라만상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써 진리이고
    부처님의 몸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법신을 바로 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몸으로 나툰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은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겉모습으로써의 부처님을 친견했다고 하더라도
    내 안의 부처님, 또 일체 삼라만상 속에 깃든 부처님을 바로 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부처님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부처님은 법신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진리를 가까이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든 친견할 수 있고, 선근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 세상 삼라만상 속에서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일체 모든 존재와의 인연을
    부처님과 인연 짓듯 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체 모든 업연이 선하고 텅 비어 있을 때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인연을 짓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과 인연을 짓는 것이지만,
    그 업을 짓는 주체인 몸과 말과 뜻이
    맑고 텅 비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바로 보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이 세상과의 인연이 아닌
    이 세상의 근본 당체인 법신과 인연을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단순한 모습으로써,
    화신으로써만 보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은 세상에 태어난
    수많은 중생들의 마음은 얼마나 공허하고 실망감이 크겠습니까.
    이 금강경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부처님과 인연을 짓지 못함을 얼마나 가슴 아파 하겠습니까.

    지금 금강경에서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신으로써의 부처님과 많은 인연을 짓고, 선근을 맺어야 한다,
    그러니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은 세상에 사는 수많은 중생들도
    부처님의 출현을 기다려야하고
    부처님이 출현하셨을 때 놓치지 말고 좋은 인연을 심으라는
    그런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님과 선근을 맺을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일체 모든 존재는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일체 삼라만상을 그대로 부처님으로,
    진리로 바로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밝은 눈, 정견의 시야를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내 이웃과의 인연도
    부처님과의 인연이 되고,
    나무 한 그루와도 부처님과의 인연이 되며,
    대자연과 일체 모든 존재와의 인연이
    그대로 부처님과 맺는 선근 공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불교라는 종교가 없는 나라에서도
    부처님과의 선근공덕은 지을 수 있습니다.

    사실 진리를 ‘불교’ 속에 한정짓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며,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 안에만 진리가 있고, 부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저 불교에서는 진리의 가르침을 이름지어
    ‘법’이라고 하였고,
    진리를 깨달은 자를 ‘부처님’이라고 이름지었으며,
    그 부처님을 올바로 따르고 수행하는 이를
    ‘승’이라고 이름지었을 뿐이며,
    그러한 불법승 삼보를 믿고 수행하는 종교를
    ‘불교’라고 이름지었을 뿐이지,
    ‘불교’라는 이름 자체에 불교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이라는
    그 이름 자체에 부처님이 있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라는 종교가 없는 나라에서도 진리는 있으며,
    또한 부처도 있고, 참된 깨달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랜 역사 속의 인물들을 살펴보면
    ‘깨닫고 보니 그 내용이 불교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일체 모든 진리는
    결국 하나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불가에서는 그것을 편의상 이름지어 ‘불교’라고 한 것 뿐이지,
    ‘불교’라는데 집착하고 얽매여
    그것만이 진리이고 그것만이 우리를 깨닫게 해 준다는
    틀에 갖히라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이야기는
    금강경 전면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가르침입니다.

    저 숲 속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며
    바람과 구름과 태양 그리고 흐르는 물이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첩첩쌓인 푸른산은 부처님의 도량이요,
    맑은하늘 흰구름은 부처님의 발자취며,
    뭇생명의 노랫소리 부처님의 설법이고,
    대자연의 고요함은 부처님의 마음이니
    불심으로 바라보면 온세상이 불국토요
    범부들의 마음에는 불국토가 사바로다’

    하는 말씀은
    이 세상 그대로가 부처님이라는 것을
    아름답고도 분명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산하대지현진광’이라 하여
    ‘산하 대지가 그대로 참빛이다, 즉 부처님 생명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지식 스님들은
    흘러가는 구름에게 설법을 듣고,
    계절따라 변해가는 숲 속에서 진리를 터득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부처님과 인연을 맺는 선근 공덕의 장이라는 말입니다.
    따로 부처님이 출현하신 세계에서만,
    혹은 절에 가서만, 스님들을 뵙고 법을 들었을 때만,
    경전을 볼 때만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부처님과 인연을 맺고 있음을 확연히 알고
    우리의 모든 인연을 부처님과의 인연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번뇌를 버리고,
    욕심과 탐욕을 버리고,
    집착을 비우고, 텅 빈 마음으로,
    맑고 청정한 마음으로 세상과 인연을 지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것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듯 모든 삶 그 자체를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삶으로 산 사람은
    이러한 경전의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입니다.

    내 안에서 진리를 체득한 사람,
    혹은 삶 속에서 진리를 체득한 사람이
    문득 경전을 보고
    자신이 깨달은 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났을 때
    그 때의 환희심과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경전의 글귀 하나만을 듣고도
    분명 한생각에 바로 청정한 믿음을 일으킬 것입니다.

    또한 수많은 생을 부처님과의 인연을 지어왔고,
    경전 공부를 하고, 선지식을 찾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번 생에 태어나서도
    그 부처님과 지은 마음공부의 공덕과 선근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쉽고 빠르게 이해하고
    청정한 믿음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신도님들을 대하다 보면
    아무리 부처님 가르침을 쉽게 알려주려 하여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바로 믿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어떤 신도님들은 한두번만 경전의 가르침을 말씀해 드려도
    바로 이해하며 신심을 내는 분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래도록 부처님과의 선근을 많이 심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의 차이가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에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욕심을 비우고,
    집착과 번뇌를 비우고
    텅 빈 시선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시작이며,
    도량을 찾아 기도를 하고 스님들을 찾아 법을 들으며
    경전을 읽고 좌선을 하는
    이 모든 일이 또한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것입니다.

    경전 공부를 하면서, 설법을 들으면서도
    지금 당장에는 이해하기 어렵고 모르겠더라도
    퇴전하는 마음을 일으킬 것이 아니라
    ‘이것이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끊임없이 공부인연을 맺으면
    언젠가는 밝게 깨달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선근을 맺어 놓는다면 언젠가는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날이 분명 다가 올 것입니다.

    다음 경구로 넘어가기 전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선근(善根)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과거 수많은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다고 해석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착한 인연의 뿌리를 심었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구마라집과 현장의 번역에서도 똑같이 선근으로 되어 있다 보니
    한글로 해석할 때도 악의 반대 개념인 선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즉 과거 수많은 부처님께 착한 인연의 뿌리를 심어 놓았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렇게 해도 해석하는데 큰 불편은 없겠지만
    조금 더 주의 깊게 생각해 보면
    부처님께 착한 법을 심었다는 것이 조금 의아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과연 어떤 것이 착한 것이고 어떤 것이 악한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진리에 있어서는 선악이 서로 나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찌 선근만을 문제 삼고 있는가.

    물론 선에 대한 해석을 선악의 차별되는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선악을 초월하는 절대선, 초월선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각묵스님이 번역하신 산스크리트 원전 주해에 보면
    선근은 단순한 악의 반대로서의 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주의’로써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선이란 산스크리트어로 꾸살라인데,
    이는 꾸사라는 풀을 자른다는 의미로
    이 풀은 억새풀처럼 억세고 날카로워 자를 때
    마음을 주의집중하지 않으면 손을 베일 수도 있기 때문에
    꾸살라는 의미가 ‘지혜로운 주의’
    혹은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 ‘마음 집중’으로 이해된다는 내용입니다.

    즉 선근이란 마음을 기울여 주의 집중하는 수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번역된다면 한량없는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다는 말은
    한량없는 부처님께 마음을 기울여 주의집중하는
    정념의 수행, 관의 수행 인연을 심었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즉 수많은 부처님에게 악한 인연이 아닌 선한 인연을 심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많은 부처님에게 지혜로운 주의
    즉 마음을 주의 집중하여 분별없이 관하는 수행의 인연을 심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되었을 때 비로소
    이 분의 가르침이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과거 수많은 부처님과 마음집중의 수행인연을 지었으니
    그 수행의 인연으로 인해 여래가 멸한 뒤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같은 글귀,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라는 가르침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길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 선근, 선법에 대한 해석과 의미는
    뒤에 23분 정심행선분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로 하고
    다음 게송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것이다.


    여래는 다 알고 다 본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부처님과 선근을 얼마나 심고 있는지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다 보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
    이라는 것 또한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그 어떤 생각과 말과 행동도
    부처님께서 보고 계시지 않거나 알고 계시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보통 우리들은 사찰을 찾아 기도를 드릴 때에도,
    108배를 하면서도,
    하나 하나 자신이 소원하는 바를 꼬박 꼬박
    다 부처님께 말씀을 드리려 하고,
    절을 하는 내내
    ‘남편은 진급하게 해 주시고, 자식은 대학에 합격하게 해 주시고,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게 해 주시고, 화목하게 해 주시고...’
    그러면서 수많은 부탁을 드립니다.

    그래야지만 부처님께서
    이 기도의 의미를 아시고 들어 주실 것이라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하면서 내내
    머릿속으로는 바라는 것들을 되뇌이느라 바쁩니다.

    한참을 말씀드렸다가도 조금 있다보면 또 하나 생각나고,
    집에 가다가도 또 하나 생각나고,
    한참 후에 ‘아차 그것 하나 말씀 못 드렸구나’
    싶은 것도 생기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말하지 않더라도
    다 알고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인연과 업도 다 보고 계시며,
    우리의 바램도, 우리의 발원도,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다 알고 다 보고 계십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미세한 분별심 또한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다 보고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자성부처님이 항상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저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분별이며 바램들을
    그저 텅 빈 마음으로 부처님께
    다 공양올리고 바치고 비울 것이지
    그것을 애써 다시금 되새기며
    부처님께 말씀을 드린다면 번거로운 일이고,
    오히려 참된 기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참된 기도며 수행은
    번뇌를 비우고, 분별을 비우며,
    바램도 놓아버리고 욕심도 놓아버리는 데서 옵니다.

    부처님은 이미 다 알고 다 보고 계시는데,
    애써 그것들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을 그냥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저 부처님께 다 바치고, 부처님께 다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 맡겨버렸을 때,
    내 마음은 맑게 비워지고 텅 비어 참된 울림이 있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부처님과
    진짜 선근을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잔뜩 짊어지고 복잡한 때에는
    부처님을 만날 수 없으며,
    부처님 또한 우리의 바램을 들어줄 수 없습니다.

    그 복잡하고 정신없는 바램과 소망들을
    그저 부처님께 다 바치고 공양올린 뒤
    내 마음을 평화롭게, 고요하게 텅 비울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참된 성취가 있을 것이고,
    참된 공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
    이라고 하였는데,
    그 글귀는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앞의 분에서 말했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라는 게송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게송 한 구절을 보고
    문득 청정한 믿음을 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한없는 복덕을 짓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복덕 중에 가장 큰 복덕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을 얻는다거나,
    바램을 성취한다거나, 지식을 얻는다거나,
    지위나 명예를 얻는다는 것들은
    유루복으로 유한한 것들이지만,
    청정한 믿음을 일으켜 진리를 깨닫는 일은
    무루복으로 한도 끝도 없는 무량한 복인 것입니다.

    유루복들은 짓는 내가 있고 받는 내가 있다보니
    내가 지은 복 만큼만 받을 수 밖에 없고,
    지은 복을 다 받고 나면 복의 텅 비고 말지만,
    무루복은 ‘나’라는 아상이 없기 때문에
    짓고 받는 주체가 공하게 되고,
    그랬을 때 비로소 온 우주법계를 다 먹이고도 남을 만큼의
    무량한 복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한 생각에 온 우주를 다 먹이고 남을 만큼의 복
    그 정도는 되어야 수행자의 복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옮기고 있습니다.
    ‘수보리여, 그들 모두는 측량할 수 없고
    셀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를 쌓고 얻게 되리라’
    다시말해
    ‘측량할 수 없고 셀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
    라고 하여 무량한 복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는 한 글귀를 보고
    한생각에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말씀이구나
    하는 청정한 믿음을 일으킨다면,
    한량없는 무량한 복덕을 얻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나’라는 형상도 형상이 아니며,
    무릇 일체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바로 보았기 때문에,
    복을 짓고 받는 주체도 사라지고,
    그 때 비로소 일체 모든 존재가 바로 내가 되고,
    이 세상 삼라만상 그대로가 나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무량한 복은 오는 것입니다.
    아상이 있으면 무루복은 없습니다.

    아상이 없는 텅 빈 깨달음 속에서
    무루의 복, 무량대복은 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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