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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도 법 아님도 놓아라
    金剛經 2011. 12. 30. 06:27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에게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다.]

    연이어 그 이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며,
    그러한 중생들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중생들에게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고,
    또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상을 비롯한 일체 모든 상이
    다 끊어졌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란
    결국에 ‘아상’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상’이 끊어졌다는 것은
    ‘나와 전체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고,
    그말은 다시 복을 짓고 받는 주체가 소멸되었다는 말이며,
    그랬을 때 ‘전체의 복’이 곧 ‘나의 복’이 되기 때문에
    한량없는 무루의 복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 말은
    ‘일체의 모든 상’이 다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다고 한 이유는,
    부처님 가르침인 사구게 글귀,
    즉 법을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내었는데
    내가 청정한 믿음을 내어 무량한 복을 얻게 된 원인인 ‘법’에 대해서도
    머물러 집착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으로 인해 청정한 믿음을 내었으니
    자칫 법에 집착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이라는 상이 없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법이라는 상이 없다는 말은
    자칫 법이 아니라는 상으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또다른 하나의 상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이
    진리라는 상에 머물러 법에 집착해서도 안되고,
    또한 그것은 엄연히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고,
    청정한 믿음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에
    법이 아니라는 상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침이 있으면 진리가 아닙니다.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말한다면,
    법이라는 상, 진리라는 상에 집착하여
    ‘이것만이 진리다’라는 치우친 생각 때문에
    역사 속에서는 큰 갈등과
    심지어는 전쟁까지 일어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많은 종교에서는 그 종교만이 구원해 줄 수 있으며,
    그 종교의 가르침만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고
    실제 그런 ‘진리에의 집착’
    즉 ‘법이라는 상’ 때문에 얼마나 많은 다른 종교인들이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지금 이 시대에까지도 수많은 갈등이 조장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진리라는 집착’까지도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만이 진리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일체 모든 집착과 고집은
    그것이 진리가 아님을 뜻합니다.
    ‘진리’ 또한 집착하고 머물게 되면
    더 이상 진리가 아니게 된다는 말입니다.

    진리는 어디에도 있습니다.
    불교에도 있고, 기독교에도, 천주교에도,
    알라신에게도, 저 아프리카 오지에도,
    인디언이나 원주민들에게도,
    저 숲 속의 동물 식물에게도 진리는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 바로 이 말이 아닌가 합니다.
    ‘내 종교만이 진리’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이제 버려야 할 때입니다.

    특히 현재의 한국 교회에서는
    이 세계의 그 어느나라보다도 뿌리깊은
    ‘배타주의’ ‘극단적인 근본주의’ ‘문자주의’에 빠져 있다고 하는데요
    그러한 경향이 90%이상이라고 합니다.

    반면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30%도 안 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러한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다원주의’로써
    모든 종교들을 진리와 구원의 길에 함께 가는 동반자로 생각하고
    함께 배우고 협력하는 관계를 가진다고 합니다.

    제가 잘 아는 한 목사님도
    다원주의적인 입장에서 공부를 하고 계시는데요,
    현재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그러한 입장을 취하시면서 성직자 활동을 하기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성직의 길을 포기하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는 없다]라는 책에서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고 변선환 박사 같은 분은
    유럽이나 미국 신학계에서 공부하면서,
    지각있는 서양신학자 사이에
    ‘기독교만’이라는 배타주의적 생각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한국에 가서 이른바 ‘종교다원주의’를 선창하다가
    신학교 학장직은 물론 목사직까지 박탈당하는 ‘변’을 맞으셨다고 합니다.

    저 또한 성경을 미진하나마 공부하고 있는데요,
    성경 속에서도 진리를 찾을 수 있고,
    법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성경을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다르게 해석하다 보니 성경만을 문자적으로
    있는 그대로 믿게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문자를 넘어서서 담겨있는 깊은 뜻을 바로 보고 해석할 수만 있다면
    그 안에는 분명 진리의 숨결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실제 많은 스님들께서
    성경에 대한 아름다운 해석을 해 놓고 있으며,
    또한 목사님이나 신부님들도
    불경에 대한, 금강경에 대한 깊이있는 해석을 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정도까지만 해 두고,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구마라집 한역의 금강경 번역인데요,
    현장 역이나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이다 상이 아니다 하는
    그런 관념 또한 치우침이기 때문에 놓아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상도 없고,
    법상도 없으며,
    법상이 아님도 없고,
    또한 상 그 자체도 없고,
    상 아님도 없다고 함으로써
    일체 모든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모조리 불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체 모든 집착과 모양으로부터 완전히 떠나 있습니다.
    그야말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고요와 텅 빈 적멸이 있을 뿐입니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이 모든 중생들이 만약 마음에 어떤 상을 취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만약 법의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부연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마음에 ‘어떤 상’이라도 취하게 되면
    이는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한 티끌도 남김이 없어야 하고,
    마지막 한 가지의 ‘상’ 또한 다 불살라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법상도 비법상도 상도 비상도,
    ‘어떤 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취하면
    다시금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법의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이 진리의 글귀를 듣고
    ‘이것이 진리다’라고 법에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결국에는 아상에 집착하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법상도 또다른 아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상은
    일체 모든 상의 근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상이 완전히 소멸하고 나면
    이 세상 그 어떤 상도 함께 완전히 소멸될 것이지만,
    만약 그 어떤 미세한 상이라도 생기고 나면
    그것은 그대로 아상이 생기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집착을 한다고 했을 때,
    집착을 하는 주체가 바로 ‘나’입니다.
    집착이 생겼다 하면 그것은 벌써 내가 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나’라는 상에 집착해 있는 것이며,
    아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없는 마당에,
    나도 일체도 모두 공한 마당에,
    ‘진리다’라고 붙잡을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도 공하고 진리도 함께 공한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뜻에서 여래는 항상 말하기를
    ‘너희 비구들은 나의 법문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라’
    고 했으니,
    법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님에 있어서 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법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체 모든 ‘집착’은 다 떨쳐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도 놓아버렸을 때 진리이지
    잡고 나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부처님도 놓아버려야 하고,
    가르침도, 복도, 지혜도, 선정도, 깨달음도,
    일체 모든 것을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전체를 다시 잡을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생각, 이러한 표현까지도 일체를 다 놓아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부처님께서는
    ‘너희 비구들은 나의 법문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라’
    고 했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문이 뗏목 같은 것이기에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짊어지고 갈 것이 아니라
    버리고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아함경에 나온 비유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강을 건너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기슭에 서 계셨는데
    강에서 한 젊은이가 뗏목을 어깨에 이고 올라오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왜 그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가려고 하냐고 물으셨더니
    “이 뗏목 때문에 강을 건널 수 있었으니
    이 뗏목은 내게 고마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 젊은이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면서
    불법을 뗏목에 비유하였습니다.

    “강을 건너고 난 뒤에는
    뗏목을 버리고 가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내 가르침도 그와 같아서
    내 가르침대로 수행하여 생로병사의 고해바다를 잘 건넜거든
    내 가르침도 버려야 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 또한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환이다’라는데 치우친 사람에게는
    본래마음의 무한한 능력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치유해 주셨고,
    ‘마음이 실체다’라고 치우친 생각을 가진 이에게는
    마음의 공한 도리에 대해 말씀해 주심으로써 치유를 해 주고 계십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에 따라 응병여약으로 대기설법을 해 주십니다.
    그러니 어떤 한 가르침을 가지고 그것을 절대화하여
    그것만이 진리라고 집착한다면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보편적인 진리를 말씀하셨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집착을 하면 이미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진리는 집착하지 않음에 있는데
    진리에 집착을 하면 ‘집착하지 않음’의 진리에서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걸림 없고 자유로운 것이 진리의 참 모습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법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법 아님에 있어서 이겠는가’
    법도 놓아버려야 하며, 법 아닌 것들 또한 놓아버려야
    비로소 걸림없는 대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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