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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처를 닮고자 하지말라
    金剛經 2012. 1. 16. 07:06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32상이란
    곧 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이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최소의 단위인 미진도,
    나도,
    모든 것들이 다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일진데,
    부처라는 것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32상이란
    부처의 거룩한 모습의 특성을 말한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부처의 모습을 가지고
    부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부처는 상 없음을 이름한다.
    깨달음에는 그 어떤 모양도 이름도 실체도 없다.
    그럴진데 어찌 부처에게
    32상이란 특별한 상호가 있을 수 있겠는가.
    육신으로써 부처를 볼 수는 없다.

    부처를 어떤 특정한 모습이라거나,
    특정한 성격이라거나,
    특별한 무엇이라고 정의내리고자 하지 말라.

    사람들은 보통 부처님은 이럴 것이다,
    큰스님은 이럴 것이다라고 하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큰스님의 성격은 자비로울 것이고,
    한없이 어린아이처럼 맑을 것이며,
    성품은 온화하여 말도 없을 것이고,
    큰스님 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늘 가부좌하면서 좌선하고 있는 모습일 것이라는 등의
    온갖 모양을 규정짓곤 한다.

    그러나 깨달음은
    그런 모양에 있지 않고, 성격에 있지도 않다.
    어떤 모양에, 어떤 외모에, 어떤 성격에
    부처를 가두지 말라.

    그 어떤 틀에도 가두지 말라.
    틀에 갖힌 것은 더 이상 진리일 수 없다.

    부처는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으며,
    사람같을 수도 있고, 짐승같을 수도 있으며,
    산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고,
    티끌일 수도 있으며, 하늘일 수도 있다.

    그 어떤 가능성도 활짝 열어두라.
    어디에도 가두려 하지 말라.
    갖힌 것은 부처가 아니다.
    깨달음이 아니다.

    큰스님들을 보더라도
    어떤 분은 한없이 자비로우시지만,
    또 어떤 분은 사천왕처럼 엄하고 무섭기도 하지 않은가.

    말이 많을 수도 있고, 말이 적을 수도 있으며,
    걸음이 빠를 수도 있고, 걸음이 느릴 수도 있다.
    어떤 특정한 모습이 수행자의 참모습일 것이라고
    스스로의 틀을 만들어 두지 말라.
    그렇게 되면 갖히는 건 자기 자신이다.

    부처는 중생이 만들어 놓은 틀에 갖히지 않는다.
    다만 갖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수행자란
    누구를 닮고자 하는 이가 아니다.
    부처를 닮고자 하거나,
    큰스님을 닮고자 하거나 하는 그런 이가 아니다.

    참된 수행자는 ‘자기답게’
    ‘나 자신’으로써 살아가는 자다.
    자기 자신답게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고,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야말로
    가장 진리답게 사는 길이다.

    ‘누구처럼’ 살고자 하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목표치가 있고,
    아직 그렇게 되지 못한 내가 있기 때문에,
    그 간격만큼 마음은 괴롭고 무겁게 마련이다.

    오직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어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갈 수 있다.
    ‘다른 사람처럼’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미래의 일이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완전한 만족이 있을 때 깨어있을 수 있고
    그 깨어있음이란 ‘자기답게’ 사는 방식 속에서 나온다.

    그것은 어떻게 정해진 길이 아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거나,
    ‘저렇게’ 살아야 한다거나 하는 길이 있으면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괴로움이 동반된다.

    그러나 나답게 사는 것은
    아무런 노력을 필요치 않으며
    매우 자유롭고 걸림이 없다.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 아니다.
    ‘나 처럼’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부처님처럼 사는 길이 될 수 있다.

    ‘부처님’처럼 살지 말고
    ‘나’ 자신으로써 살아가면 된다.

    그러니 어떠한가.
    부처님의 외형적인 모습인
    32상 80종호를 닮고자 애쓸 일이 무엇인가.
    32상 80종호가 부처인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32상으로 모습을 바꾸고자 애쓴 분이 아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32상으로 모습을 바꾼 것이 아니다.
    부처는 부처라는 상도 없고, 32상이라는 상도 없다.
    다만 32상이란 우리들 중생들이 부처를 바라보고
    스스로 상을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32상이란
    중생들의 시선이지 부처의 시선이 아니다.
    부처가 32상을 갖추게 된 것은
    그것이 갖춘것이 아니라
    그저 아무런 걸림 없이 ‘자기답게’ 산 결과다.

    부처님은 그저 자신의 길을 걸었을 뿐이다.
    애써 32상을 갖추고자 애쓴 적도 없고
    또한 특별한 상을 버리려고 애쓴 적도 없다.

    그저 아무런 상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을 뿐이다.

    부처님은 ‘누구처럼’ 살고자
    전혀 애를 쓰지 않는다.
    과거 연등부처님이 훌륭하셨으니
    그 분처럼 살아야지 하고 생각한다거나,
    스스로 부처님처럼 거룩하게 살아야겠다는 등의 생각이 없다.

    그저 자기 자신으로써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다만 우리 중생들이 그 모습을 보고 상을 만들어 놓았고,
    불상도 만들어 놓았으며,
    32상 80종호도 만들어 놓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참된 부처님의 모습은
    법신(法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법신이란 어떤 특정한 모습이 아니다.
    특정한 모습 없음을 일러 법신이라 부른다.

    다시말해 법신이란
    진리의 몸이란 뜻으로
    특정한 모습이 없는 온 우주법계, 삼라만상의
    모든 모습을 부르는 이름이다.

    내 모습도 법신이며,
    산과 들도, 하늘과 바람도,
    짐승이며 하늘사람도 모두가 법신이다.

    저마다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써
    완전하게 살고 있다면 그것이 모두 법신이다.
    그래서 온 우주 법계에 법신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단 하나,
    사람들만이 ‘남들처럼’ 살고자 애쓴다.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써 나툰 법신 부처님을 버리고
    다른 사람처럼 살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사람들만이 열등감과 우월감,
    잘나고 못난 분별로 인해 괴로운 것이다.

    나무가 꽃을 닮지 못했다고 열등감을 느끼지 않으며,
    하늘이 땅을 보고 우월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다만 사람들만이 어리석은 분별심으로
    비교, 판단에서 오는 괴로움을 감당하고 산다.

    지금 이 자리에서 법신이 되라.
    법신 부처님으로 살아야지
    왜 어리석은 중생으로 살 것인가.
    누구든 ‘나답게’ 사는 사람은 법신불로 사는 것이다.

    법신부처님이 나로써 온전하게 나툴 수 있도록
    나의 모든 것을 몽땅 부처님께 맡기고 가라.
    완전하게 내맡기고, 완전하게 바치며,
    완전히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법신부처님의 향기가 내 안에서 피어오른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목숨을 바쳐 보시했다 할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이 더 많으니라.”


    일체는 텅 비어 있다.
    세계도, 미진도, 나도, 부처도 다 이름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가 나타나고 사라짐도 다만 인연에 따를 뿐이고,
    미진도 나도 부처도 모두가 인연의 가합에 의해
    이루어지고 사라질 뿐이다.

    그 어떤 것도 다만 이름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이름하여 진리라고 하고,
    그러한 진리를 깨달은 자를 부처라 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나고 죽는 것 또한
    인연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지,
    그것이 괴롭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슬프고 괴로운 마음은
    어리석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다.
    봄이 와 꽃이 피다가 꽃이 지고 여름이 온다고 해서
    봄은 죽고 여름이 살아났다고 할 것인가?
    봄이 죽어서 괴롭고 여름이 태어나서 즐겁다고 할 것인가?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면서
    강물은 죽고 바다는 살았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강물이 바다로 윤회했다고 할 것인가?

    그런 것들은 다 이름일 뿐이고 모양일 뿐이다.
    어떻게 이름지어도 좋지만,
    어떻게 이름 짓더라도 옳다고 할 수도 그르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다’라고 고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고, 머무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항하의 모래수와 같이
    많은 수의 목숨을 나고 죽고 반복하면서
    목숨으로써 보시했다고 한다면
    그 복덕은 어떠한가.

    내 소유의 물질로써 보시하더라도
    그 복덕은 많을 것인데,
    하물며 내 목숨을 바쳐 보시하였다면
    그 복덕은 무량할 것이다.
    앞서 말했던 칠보로써 보시하는 복덕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목숨으로써 보시한다는 것은
    벌써 나고 죽는다는 분별 속에서의 보시이다.
    내 삶을 바침으로써 보시한다는 것
    그것은 생사법에 빠져 있는 보시이다.

    그것은 참된 무위의 함이 없는 보시가 되지 못한다.
    본래 생사가 둘이 아니라면
    생을 사로 바꿈으로써 보시할 것이 무엇인가.

    차라리 생사가 본래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것이야말로 참된 보시가 될 수 있다.
    지혜야말로 보시의 다른이름이기 때문이다.

    세상도 없고, 미진도 없으며,
    나도 없고, 부처도 없다면, 열반도 없고, 생사도 없다.
    바로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가장 온전한 보시이다.

    본래 보시할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참된 무주상보시가 된다.
    그 사실을 깨닫는 지혜야말로 복덕과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혜와 복덕은 하나다.
    지혜가 복덕이고 복덕이 지혜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게송이
    바로 이 금강경의 사구게이다.
    그러한 지혜로 우리를 안내하는 게송이
    바로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왜 애써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수의
    목숨을 바쳐 보시해야 하는가.
    그 공덕은 유위의 공덕이 될 뿐이다.

    그러나 생사가 본래 없으며,
    보시할 것도, 보시할 사람도, 보시 받을 사람도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무량한 복덕이 될 수 있다.

    생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 한 가르침이라도 올바로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수도 없이 많은 생을 윤회하였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이만 많이 먹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간을 많이 흘려보냈다는 사실이
    그대로 나를 보다 더 깊이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수도 없이 윤회하며 생사를 반복했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은 커녕 업만 자꾸 쌓아왔다면
    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은 억겁의 세월을 허비하며 지낸 것이다.
    그 사람에게 깨달음의 빛은 날로 줄어갈 것이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단 한 가르침이라도
    올바로 믿고 받아지녀 남을 위해 연설해 준다면
    그 공덕이 더욱 수승하다.

    수도 없이 많은 생을 목숨 바쳐 보시하고,
    수많은 물질로써 보시하고,
    칠보로써 쌓아 보시한들
    그것은 단 한 가르침을 올바로 수지하며
    남을 위해 연설해 주는 공덕에는 미치지 못한다.

    유위의 복은 쌓는 공부지만,
    무위의 공부는 놓아가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선이라도,
    아무리 많은 복이라도 쌓는 것 보다는
    놓아버리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선을 쌓고자 애쓰지 말라.
    복을 짓고자 애쓰지 말라.
    아무리 선을 행하고 복을 지어 봐야
    유위의 복이고, 유위의 업일 뿐이기에
    그것은 결국 채우는 공부 밖에 되지 못한다.

    아무리 선이라 할지라도 채우는 것은 근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놓아버리는 것이다.

    본래 공한 줄 알고,
    본래 실체가 없는 줄 알며,
    본래 그 어떤 상도 상이 아닌 줄 알아
    다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놓는 공부는
    복덕이라는 유위를 뛰어넘는 무량복덕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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