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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을 떠나면 적멸이다
    金剛經 2012. 1. 17. 06:25

     

     

    이상적멸분
    상을 떠나면 적멸이다

    離相寂滅分 第十四
    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所得慧眼 未曾得聞如是之經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卽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一希有功德 世尊 是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若當來世 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 卽爲第一希有 何以故 此人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衆生相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佛告須菩提 如是如是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不怖不畏 當知是人 甚爲希有
    何以故 須菩提 如來說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須菩提
    忍辱波羅蜜 如來說非忍辱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何以故 我於往昔節節支解時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應生嗔恨 須菩提 又念過去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若心有住 卽爲非住 是故 佛說菩薩 心不應住色布施 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應如是布施 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須菩提 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思語者 不異語者 須菩提 如來所得法 此法 無實無虛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 入闇 卽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如人 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 卽爲如來 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 無量無邊功德
          
    그 때 수보리가 이 경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깊이 깨달아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 혜안으로는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경전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해지면
    곧 실상을 깨달을 것이니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임을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 같은 경전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서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도 없고,
    중생상과 수자상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는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잘림을 당했을 적에
    내게는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과 수자상도 없었다.

    만약에 내가 옛적에 사지를 마디마디 베이고 잘렸을 때
    만일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다.

    수보리야, 또 여래가 과거에 오백 생애 동안
    인욕 성인이 되었을 때를 기억해 보더라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지니,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는 것도 즉 머무름 아님이 된다.

    그러므로 여래는
    ‘보살은 응당히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다’고 설했던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한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나니,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상적멸분은
    말 그대로 상을 떠난 바로 그 자리가 적멸의 자리라는 뜻이다.
    상을 깨는 것이 적멸 즉 실상이며 깨달음의 자리라는 말이다.

    사실 부처님 가르침이
    무량하며 그 방편이 무한하다고는 하지만
    쉽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상을 깨라’는 한 가르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진리는 다양하게 표현되어질 수 있다.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방편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는 상을 여읨으로써
    깨달음 즉 적멸에 이르는 방편의 가르침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분에서는 지금까지 13분까지 이어오며 설해 왔던 가르침에 대한
    일종의 정리와도 같은 장이라 할 수 있다.
    이상적멸분으로써 그동안의 가르침을 정리해 보자.


    그 때 수보리가
    이 경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깊이 깨달아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 혜안으로는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경전입니다.


    불교 공부를 해 오던 분들 가운데는
    여기 이렇게 수보리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수보리 뿐이 아니다.
    누구든 어둡고 막연했던 삶에 대해 어리석었다가
    밝은 진리의 가르침을 듣고 나면
    환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 맑은 신심을 일으켜
    이 공부를 해 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눈물을 흘려 보았을 것이다.

    보통 눈물이라는 것이
    슬플때나 기쁠 때 나오기도 하지만,
    진리의 감동에 젖어 온몸으로 흘리는 눈물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흘러 나온다.

    그동안 온통 상에 물들어 세상을 왜곡해서 보고,
    분별 판단 시비하여 걸러 보았다 보니
    우리 마음에 온갖 때가 끼고 녹이 슬어
    좀처럼 상 이전의 맑고 순수한 본래심을 보지 못한다.

    그렇게 어리석게 살다가
    상을 여읜 진리의 자리에 대한 법문을 듣고 난다면
    누구든 상 이전의 본래 자리에서부터
    감로가 샘솟듯 온몸의 감동이 눈물로써 나오곤 하는 법이다.

    또한 법문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할 때,
    마음이 텅 빈 상태에서 모든 상이 잠시 떨어져 나가고 고요해 지면서
    온통 상으로 둘려 쌓였던 탁한 마음이
    잠시 적적한 세계를 맛보게 되는 순간
    우리는 온 존재로써 감동하지 않을 수 없고,
    때때로 그 감동은 눈물로써 표현되곤 한다.

    법문을 들을 때건, 수행을 할 때건,
    내면의 깊은 곳에서 눈물이 흘러 나올 때는
    오직 그 눈물에 내 온 존재를 맡겨라.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것도 없고,
    눈물을 억지로 닦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
    그저 몸과 마음의 떨림과 흐르는 눈물과 하나가 되어 함께 흐르라.

    눈물이 스스로 멈출 때 까지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해 보려는 의도를 버려라.
    그저 눈물과 하나가 되어 흘리기만 하라.

    그 눈물은 눈이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인연에 따라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아플 때, 혹은 너무 기쁜 일이 있을 때,
    그런 온갖 종류의 인연이 내게 다가올 때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인연따라 흘리는 눈물은 실체가 없어 공하다.
    인연이 다하고 나면 눈물도 매말라 버린다.
    기쁜 일이 가고 일상으로 되돌아 오면 눈물은 멎는다.

    그러나 진리의 눈물은 다르다.
    그것은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며,
    진리가 온 존재로써 일치되어지는 작은 경험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업장이 소멸되는 눈물이며,
    진리의 발견에 대한 귀의의 눈물이고,
    본래 존재의 고향으로 회귀하려는 귀향의 눈물이다.

    그렇다고 그 눈물을 붙잡아 두려 할 것은 없다.
    그냥 내버려 두라.
    흐르는 눈물에 또다른 의미를 덮씌우거나 붙잡고자 하면
    그것은 또다른 어리석은 상을 만드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한 눈물을 흘리고 난 뒤에 오는
    그 선명함과 가볍고 적멸한 느낌을
    애써 반복하여 경험하고자 하는 집착을 버려라.

    눈물을 흘리고 난 뒤에 오는 그 맑은 느낌도
    스스로 맑다느니, 업장 소멸의 느낌이라느니 하고 분별을 붙이고 나면
    되려 어두워지게 될 것이다.

    그저 아무런 분별도 붙이지 말고,
    스스로 대견하다고 느끼지도 말고,
    좋아하면서 붙잡고자 하지도 말고,
    왜 이럴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을 품지도 말고,
    다만 그냥 내버려 두고 지켜보라.
    다만 그 눈물과 하나가 되어 흘리기만 하라.

    또한 왜 난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것일까,
    왜 난 깊은 체험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혹은 왜 난 수행 중에 온갖 경계를 한번도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등의 분별 또한 턱 놓아버릴 일이다.

    어떤 사람은 수행을 조금만 해도 금새 삼매에 든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조금만 기도를 해도 금새 눈물이 흘러 나오며
    깊은 감동을 느낀다는데,
    나는 아무리 기도하고 수행을 하더라도 눈물은 커녕
    그 어떤 감각적인 느낌도 없고,
    환희심도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연연해 할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서로 다를 뿐이다.

    수행 중에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것이 좋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나쁘다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눈물을 탓하지 말라.
    눈물을 많이 흘리고,
    정진 속에서 부처님을 본다거나 아름다운 환상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놓아버릴 뿐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이 그대로 마장이 될 뿐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금강경 법문을 듣고 나니
    수보리의 온 존재는 저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이 흘러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도무지 이런 법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진리를 들었다는 그 사실이
    수보리의 온 존재를 강렬한 눈물로써 휘감고 있다.

    어떠한가.
    당신의 존재에서도 눈물이 흐르는가.
    앞의 13장 동안에 정진해 왔던
    금강경의 가르침이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는가.

    우리는 그동안 온갖 상에 얽매여 맑은 눈이 가려져 버렸다.
    본래의 텅 빈 시선에 온갖 어둡고 탁한 것들이 잔뜩 끼어 버렸다.
    수보리는 그동안 얻어 들었던 가르침으로 인해 지혜의 눈이 열렸지만,
    수보리의 혜안으로 보더라도
    지금의 이 가르침은 희유하고 희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찌 찬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리의 가르침을 만나거든
    수보리와 같이 찬탄하고 또 찬탄하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찬탄의 연주가
    온 우주 법계에 까지 울려 퍼지게 하라.

    찬탄하는 것 자체가
    그대로 중요한 수행이 된다.
    찬탄은 법계를 울리고,
    또한 내 안의 본래 자성을 일깨운다.

    찬탄의 소리는
    그대로 진언이 되고, 다라니가 되어
    안팎을 진리의 향기로 수놓을 것이다.

    여기서 수보리가 지금까지 얻어 듣지 못한 가르침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간 소승의 견해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대승의 가르침을
    이제야 비로소 바로 보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가르침’이라는 의미는
    이 금강경의 가르침만이 가장 수승하며
    소승의 다른 가르침은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오랜 기간 동안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곧게 전해져 내려오다가
    부파불교 즉 소승불교를 거치면서
    왜곡되고 퇴락해 가는 기존 불교의 삿된 부분을 타파하고자 하는
    파사현정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만큼 당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
    즉 당시의 소승불교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새로운 가르침,
    즉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가르침’을 원하는
    대중의 소망이 컸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점,
    삿된 점을 파하고 바른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가
    바로 대승이며, 대승의 기본이 되는 경전이 반야경인 것이다.
    물론 이 금강경은 반야경 속의 작은 경전이며,
    동시에 반야경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경전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 소승불교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리 자체를 포함시켜
    소승불교는 잘못된 것이고,
    대승불교는 훌륭한 것이라거나 하는 분별도 어리석은 것일 뿐이다.

    고려시대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불교가 많이 타락하고 퇴락해 갈 때
    이러한 잘못된 불교를 바로잡고 정법으로 복귀하고자
    새로운 불교결사로써 정혜결사가 이루어 졌다고 해서
    고려의 불교 가르침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인 것과 같다.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부파불교도 마찬가지다.
    당시의 부처님 가르침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해 오던 부파의 사람들이 잘못 해석하고
    곡해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을 타파하고
    바른 가르침을 세우기 위해 반야경, 금강경의 가르침이 나타나고
    그로인해 부처님의 오롯한 정법이
    다시금 새롭게 출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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