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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놀라고 겁내며 두려워하지 말라
    金剛經 2012. 1. 19. 06:19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

    어찌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르침은
    그동안 우리가 배워왔고 익혀왔던 세상의 가르침과는
    거꾸로 가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보다 많이 소유하고, 보다 많이 배워 익히며,
    보다 ‘내 것’을 많이 쌓는 것에서 찾아 왔다.

    ‘나’라는 상을 만들어 놓고
    ‘내 것’을 많이 채우는 것이야말로,
    ‘나’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며 삶의 의미라고 생각해 왔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나’를 드러내고자 돈을 벌고, 명예를 높이며,
    학벌과 재력과 권력을 쌓아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라는 이름 석자를 더 많이 알릴 수 있고,
    나는 더 유명해질 수 있으며, 나는 더 높아질 수 있고,
    결국 그러한 ‘나’라는 아상이 강화될수록
    우리는 더욱 더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굳게 믿어왔다.

    그것이야말로 내 행복의 조건이고,
    최선의 삶이며, 진리에 입각한 삶이라고 여겨왔다.

    그렇게 아상을 높이려는
    내 삶의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잠시 쉴 새도 없이 달려오기만 했다.
    잠시 앉아 쉬려고 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만 쉬는 것 같아 도무지 쉴 수가 없다.
    쉬다보면 남보다 뒤쳐질 것 같고, 남보도 더 적게 소유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남들보다 더 못난 사람이 될 것이고,
    더 뒤쳐진 사람이 될 것이며, 더 불행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잠시도 쉴 수가 없다.

    나는 늘 바쁘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늘 바쁘고, 남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한 숨도 쉴 수 없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자위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렇게 내 삶의 전부를 걸고 달려왔던 이 길,
    이 길만이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 길.
    지금 이 길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가르침과 만난 것이다.

    [금강경]은 그 길을 거부하고 있다.
    그 길은 참된 진리가 아니며,
    우리를 영원한 행복으로 데려다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금강경에서는 ‘나’라는 것은 본래 없고,
    다만 인연따라 생겨난 것이기에 텅 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다’ 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으며,
    그렇기에 ‘내 것이다’라고 할 만한 소유도 실제는 내 소유가 아니고,
    ‘내가 옳다’고 여겨왔던 내 사상, 견해, 생각에 대한 것 또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목숨 걸고 가지려고 애써왔던
    그 모든 소유의 일들이 모두 헛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라고 할 만 한 것이 없는 마당에
    ‘내 것’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양 있는 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이 상이 아니라는 것을 올바로 볼 수 있을 때
    여래를 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왔던,
    내 삶의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달려왔던
    이 모든 것이 다 텅 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고 까무라칠 일인가.
    언뜻 들어보면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고,
    놀랄만한 일이며, 겁나는 일인가.
    지금 금강경의 이 가르침은 내가 걸어온 모든 길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나’라는 상을 높이려고 살아왔던
    나의 삶 자체를 모두 놓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내가 집착하고 있는 일체 모든 것이
    다 실체가 없으니 다 놓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일체를 다 놓아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다 비우라고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당황스런 말인가.
    그동안 쌓고 쌓느라 얼마나 많은 생을 소비해 왔는데,
    얼마나 애써왔는데, 이제와서
    다 놓아버리라니, 다 비워버리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그래서 보통 사람이라면
    처음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들으면 놀라고 두려워하며 겁내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놀라고 겁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실체라고 생각했던 것을 이제와서 다 비워버리라니,
    다 허망한 것이라니 얼마나 억울하고 두려운 일인가.

    그런데 이러한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겁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희유한 사람이겠는가.

    그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이니
    셋 넷 다섯 부처님에게만 선근 인연을 지으며 공부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수많은 선근을 심어 놓았고 수행을 해 왔기 때문에
    이렇게 한 번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는 것 만으로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겁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다.


    제일바라밀이란 무엇인가.
    구마라집은 제일바라밀이라 번역했고,
    현장은 최승바라밀이라 번역을 했다.

    일반적으로 제일바라밀은
    육바라밀 가운데 첫 번째인 보시바라밀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구마라집 번역의 제일바라밀이 첫 번째 바라밀이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인데,
    산스크리트 원전을 직접 번역하신 각묵스님은
    이것이 구마라집 번역의 한문 해석만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해석이 나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장은 최승바라밀은
    다름 아닌 반야바라밀이라고 부연설명하고 있으며,
    각묵스님은
    ‘산냐를 극복하라는 이 가르침이야말로
    최초기부터 세존께서 고구정녕히 설하신 것이고
    그 정신을 바로 전해 받은 이 경이야말로
    최고의 바라밀, 최고의 가르침, 불교의 핵심이라는 말로 이해한다’
    고 함으로써 제일바라밀을
    ‘최고의 바라밀’ 즉 ‘최고의 가르침’, ‘불교의 핵심’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최고의 가르침은 바로
    ‘상을 깨는’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야말로 반야바라밀이다.

    즉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약견제상비상]
    이 가르침이야말로 반야바라밀,
    즉 지혜로써 저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는 궁극의 깨달음을 설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니 각묵스님의 최고의 바라밀이라는 의미나
    현장스님의 반야바라밀이라는 의미나 크게 다를 것은 없다고 본다.

    또한 구마라집 번역의 보시바라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로 보자면 동일 선 상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금강경에서는 상을 타파하는 것이 주된 가르침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설법의 대상이 주로 보살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앞서 말한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주된 서원인 ‘상구보리와 하화중생’
    그 중에서도 하화중생의 관점에서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이롭게 하는 보시를 예를 들어
    상을 타파할 것을 설하고 있다.

    즉 보살이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자 원을 세워 실천하지만,
    보살에게 ‘내가 중생을 교화한다’거나,
    ‘내가 중생에게 가르침으로써 베풀고 있다’
    ‘나는 법보시를 행하고 있다’는 등의 ‘내가 보시한다’는 아상이 있다면
    그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아상’의 틀을 깨고 나오지 못한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문장의 제일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라 해석하거나,
    최고의 바라밀이라 해석하거나,
    혹 보시바라밀이라 해석하더라도
    큰 금강경의 문맥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면 다시 경전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 사람은 일체의 상을 타파한 사람이기 때문인 것이다.

    일체의 상을 타파했기 때문에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이다’
    라는 것을 명확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즉 제일바라밀이라는 것,
    혹은 최상의 바라밀, 반야바라밀, 보시바라밀이라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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