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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다움도 헛됨도 없다
    金剛經 2012. 1. 29. 09:33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고 있지만 도무지 오리무중일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상이 그렇게 많고 두터우며 지중하다.
    온갖 망상과 번뇌가 하늘을 찌르며 수미산을 덮는다.
    그러니 어찌 이러한 부처님 말씀에 금새 신심을 일으키고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가만히 부처님 말씀을 듣고 있다 보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언제는 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했다가 또 상도 상이 아니라고 하시고,
    중생이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가
    중생도 중생이 아니며 부처도 부처가 아니라고 하시니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 쯤 되니 번뇌가 깊고, 두터운 상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은 의심이 든다.
    부처님 말씀에 대한 의문이 들고 의심이 든다.
    도대체 저 말이 참말이란 말인가.
    실다운 말이며 여법한 말인가.
    거짓말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왜 저렇게 이랬다 저랬다 하시면서 서로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
    온갖 부처님 말씀에 대한 의심이 들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고 말씀하신다.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여래는 참된 말만을 하는 이다.
    거짓된 말을 하지 않는다.
    또한 실없이 이유없이 말씀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말씀만을 하신다.

    온갖 다량한 상에 얽매여 있는 복잡 다단한 중생들에게
    얽매여 있는 다양한 상을 깨뜨려 주기 위해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씀만을 하실 뿐이다.

    그 부처님의 모든 말씀은 여법하다.
    법에 합당하며, 진리로 이끄는 말씀만을 하고 계신다.
    그렇기에 거짓된 말일 수가 없다.

    우리 생각에는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을 하시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을 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부처님께서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이 필요했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보살이 스스로 하화중생을 하며 중생을 구제하면서
    아주 작게나마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 ‘내가 보시한다’는
    상을 내고 있음을 보시고,
    그에 응해 상에 머물러 보시하지 말며,
    보시한다는 마음을 일으킴도 없이 보시해야 함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언뜻 금강경의 설법을 보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보인다.
    이 말씀을 했다가 갑자기 저 말씀을 하는 듯 보이고,
    이 설법을 하시다가 왜 갑자기 다른 말씀을 하시는가 싶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설법이 응병여약의 대기설법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근기에 맞춰, 온갖 중생의 근기에 맞춰
    그때 그때 필요한, 그때 그때 그 사람의 마음상태와 근기,
    상황과 일어난 온갖 생각들을 비추어 보시고
    그에 합당한 여법한 법문을 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뜻 보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일지 모르지만,
    마음을 모아 금강경에 집중하여 공부해 보면
    위없는 부처님의 지혜에 그만 깊이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하고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이상에서와 같이 설법을 하고 나면
    이 즈음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의 극단에 치우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옭고 그르다거나, 좋고 싫다거나,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등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어찌 전적으로 옳거나 그를 수 있는가.
    어떻게 절대적으로 좋거나 싫을 수 있단 말인가.
    삶의 그 어떤 모습도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는 것이다.

    삶에는 정답이 있지 않다.
    정답일수도 오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렇게 분별하고 시비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 말씀도 어느 쪽이 맞느냐 하고
    둘 중 하나를 골라 그 하나를 불법이라고 못박으라고 독촉하곤 한다.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다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불생불멸이고 불구부정이며 부증불감이라고 하면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생이면 생이고 멸이면 멸이지,
    또 불생이면 불생이고 불멸이면 불멸이지
    불생불멸은 무엇인가 하고 따지고 든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옳다고 말 해 놓으면 어찌할 것인가.
    그 사람은 그 옳다고 배운 한 쪽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그것만이 옳다고 느끼며 상대는 틀리다고 몰아붙일 것이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리다고 느끼기 때문에,
    상대와 다툴 일이 생기고 싸울 일이 생겨난다.

    이에 따라 나 또한 괴롭다.
    어느 한 쪽에 고집함은 결국 고통을 부를 뿐이다.
    그런데도 왜 애써 둘을 서로 나누어 놓고
    그 중 하나만을 고집하고 집착하려고 애쓰는가.

    왜 불자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빠져 불교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는가.
    불교만이 진리고 불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틀에 빠지면
    타종교 신자와 싸울 수 밖에 없고 그로인해 나는 고통당할 수 밖에 없다.

    다행히도 부처님의 이런 열린 가르침이
    불법을 수행하는 이들에게는 당연스레 받아들여지다 보니
    불법으로인해 전쟁이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어떤 종교는 그 종교만이 진리라는데 치우치다보니
    얼마나 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 종교만이 진리라고 고집하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곧 옳고 그른 것을 가져오고
    그러한 시비는 다툼과 전쟁을 불러오며,
    그로인해 우리는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얼마나 많은 종교전쟁으로 아파했으며 고통당해야 했는가.
    인류의 전쟁 가운데 상당한 부분이 종교로 인한 전쟁이었음을 상기하라.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내 것만이 옳고, 이것만이 진리다라고 주장하는 종교는
    참된 종교도 참된 진리도 될 수 없다.
    참된 진리가 아닐 뿐 아니라 그것은 전쟁을 부르고, 살상을 부를 뿐이다.

    이제 올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올바로 볼 정견의 지혜의 안목이 있어야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온전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불교는 그런 종교이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종교.
    어디에도 고집하지 않는 종교.
    불교 그 자체에도 고집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종교이다.

    진리에도, 법에도, 부처에도,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갈 수 있고, 그 어떤 종교와도 열린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그 어떤 진리의 모습들도 다 감싸안고 받아들일 수 있다.

    혹 외도들과도 마땅히 대자비심이 바탕이 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것은 불교 그 자체에도 고집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불법의 위대함이다.
    불법의 치우침 없는 진리성을 대변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말하고 있다.
    ‘여래가 얻은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이 얼마나 광대무변한 걸림 없는 대자유의 설법인가.
    도무지 이런 말은 진리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는 그동안 금강경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왔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동안의 분별, 시비하는 습관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도 어느 한 쪽에 기울고 말 것이다.

    ‘역시 금강경의 가르침은 참된 것이구나’
    ‘이 진리야말로 실다운 것이구나’ 하고 감동하거나,
    혹 또다른 사람은
    ‘도무지 금강경은 알 수가 없구나’
    ‘실다운 것이 아닌 헛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혹은 일체 모든 상도 상이 아니라 하고 모두 허망한 것이라고 하니
    ‘불법은 다 허망한 것이구나’ ‘불법이란 다 헛된 것이구나’
    하고 생각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두 가지 차별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실답다고 생각하는 그 치우친 생각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으며,
    동시에 헛되다고 생각하는 그 치우친 생각에서도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금강경의 가르침, 불법을
    실답다고 생각하면 그 외의 다른 것은 실답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불법이 실답다는 그 견해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러한 견해는 곧 옳다는 편견을 불러오고, 그것은 집착을,
    또한 그 가르침에 대한 집착은 다툼과 고통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헛되다는 치우친 생각 또한
    그르다는 편견을 불러옴으로써
    그릇되다는 집착과 편견으로 인해 다툼과 고통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두 가지 모두 치우친 견해일 뿐이고, 고통을 불러오게 될 뿐이다.

    또한 선악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보통 선악을 나누어 놓고 선은 좋은 것이니까 취해도 좋고
    악은 나쁜 것이니까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의 설법일 뿐이다.
    본질에서 본다면 선악이 서로 나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선에 치우치더라도 고통받고
    악에 치우치더라도 고통받게 된다는 그 끝은 변함이 없다.

    선에도 머물지 말고 악에도 머물지 않을 수 있어야
    선악을 초월해 대 자유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실답다는 데 머무르지도 말 것이며,
    헛되다는 데 머무르지도 말라고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을 통해
    끊임없이 보살의 보시에 대한 상을 놓아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승의 보살은 거의 깨달음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이제 보살에게는 그 어떤 번뇌도 그 어떤 괴로움도 거의 다 사라졌다.

    업이 거의 다 소멸되었다.
    그렇기에 보살은 업에 의해 태어나지 않고 원에 의해 태어난다.
    업생이 아닌 원생이다.

    깨달음에 들기를 잠시 뒤로 미루고
    일체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하화중생의 원이
    모든 보살을 보살이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렇기에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보다는
    중생을 교화하여 열반에 들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다.

    아니 거의 깨달음의 입구까지 왔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필요가 없다.
    언제든지 열반에 들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일체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는
    대비중생의 원력만이 보살을 지금 이 중생계에 묶어 두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보살에게는 오직 하나의 서원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겠다’
    ‘일체중생에게 보시하겠다’는 한 가지 서원 밖에 없다.

    그러나 서원 또한 일종의 욕심이다.
    그러나 그 욕심은 중생들의 욕심처럼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욕심이 아닌
    일체 중생을 향한 이타의 승화된 욕심이다.

    승화된 욕심이지만 여전히 중생계에 남는 이유가 되는 욕심이다.
    여전히 부처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언제든지 다시금 중생계로 떨어질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다시금 시비 분별의 세계에 물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 보살들의 이타적인 서원이
    이기적인 욕심으로 바뀌지 않을까를 염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 전체에 걸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에게 설법하고 있다.
    어떤 법에도 머물러 보시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중생을 구제하고 중생을 위해 보시하면서도
    내가 보시한다는 상을 일으키지 말라는 당부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자비심이다.
    한 두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부모님께서 어린 자식을 위해 끊임없이 타이르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여 이야기 하듯
    부처님께서도 보살에게 똑같은 법을 계속해서 설하고 있다.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일순간 어두워질 것이다.

    밝은 깨달음의 마음이 소멸하고
    곧장 어두운 무명의 어리석음으로 떨어질 것이다.
    보살이 일체 중생을 위해 교화하고 보시하지만
    자칫 보시한다는 한 생각에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보살은 곧장 어두워질 것이다.

    곧장 무명, 치심에 물들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중생계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염려하고 계신다.

    그러나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이
    그 밝음은 유지될 것이다.
    그 광명은 한없이 중생계에 빛을 놓을 것이다.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나니,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다음 세상에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운다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다.

    부처님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진리 그 자체,
    진리의 당체인 법신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법을 향하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는 법으로써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
    우리 마음 안의 진리를 다 알고 다 보시게 될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운 사람은
    스스로 공덕을 성취한다는 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다.

    만약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더라도
    스스로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바라는 마음으로 경전을 읽고 외운다면
    그 사람에게는 공덕이 없다.

    달마대사가 양무제에게 그 많은 절을 짓고 불전에 보시를 했더라도
    그것은 어떤 공덕도 있지 않다는 말과 같다.
    스스로 절을 짓고 보시했다는 상에 얽매이고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은 어떤 공덕도 없다.

    그러나 일체 모든 공덕을 놓아버릴 때
    일체 모든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일체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릴 때 일체 모든 것이 다 잡힌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완전히 놓아버릴 때 깨달음은 오며,
    갖고자 하는 일체 모든 소유욕을 포기할 때 일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
    ‘나’라는 울타리를 완전히 비우고 놓아버릴 때,
    완전한 나, 전체의 나는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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