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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을 지니는 공덕
    金剛經 2012. 1. 30. 06:31

     

     

    경을 지니는 공덕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 다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에 또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백천만억 겁 동안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르지 아니하면
    그 복이 앞의 것보다 수승할진대,
    하물며 이 경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은 얼마나 크겠느냐.

    수보리야,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경에는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으니,
    여래는 대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며,
    최상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수지독송하여 널리 남을 위해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니,
    모두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과 같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이 경을 능히 알아듣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명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어떤 곳이든 이 경이 있으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하리니
    마땅히 알라.
    이 곳은 곧 탑을 모신 곳 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기꺼이 공경하고 절하며 에워싸고 돌면서
    가지가지 꽃과 향을 그 곳에 뿌릴 것이다.”


    이 분에서는
    경을 베껴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연설해 주는 데 대한 공덕을 설하고 있다.

    경의 말씀을 아무리 설명해 주고 설해 주었더라도
    훗날 경을 공부하는 수행자가
    경전을 참되게 수지독송하지 못한다면
    그 경전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경전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공덕이 있는 경인가를 거듭 설명하시면서
    진리의 길을 걷는 수행자들에게
    이 경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해 줄 것을 요청하고 계신 것이다.

    이 분에서 말씀하고 계신 금강경 수행법은
    첫째 서사이고,
    둘째 수지독송이며
    셋째 위인해설이다.

    다시 말해 첫째는 사경이며,
    둘째는 독송이고, 셋째는 설법이요 법보시인 것이다.
    이 세 가지 금강경 수행을 통해
    금강경의 깊은 의미를 더욱 깨닫게 되고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글로 베껴 씀으로써
    하나 하나의 의미를 더욱 면밀히 공부하며 공경하게 되고,
    입으로 독송함으로써 잊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며,
    법을 전하는 설법과 법보시를 통해
    진리가 널리 일체 중생에게 회향될 수 있도록 하는 수행이다.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 다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에 또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백천만억 겁 동안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르지 아니하면
    그 복이 앞의 것보다 수승할진대,


    만약 어떤 선남자 선녀인 수행자가 있어
    수도 없는 몸으로써 나고 죽고를 반복하며
    백천만 억 겁을 윤회하면서 끊임없이 보시하기를 매일같이 한다 하더라도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르지 않는다면
    그 복이 더욱 수승하다.

    하물며 이 경전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법해 준다면 그 복은 얼마나 크겠는가.

    항하사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써
    아침과 낮 또 저녁으로 보시하기를 백천만억 겁 동안 하더라도,
    아니 그 이상의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그 어떤 산술의 비유로도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보시를 행하더라도
    자신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유위의 공덕이 될 뿐이다.

    즉 ‘내가 했다’는 상이 남아 있는 이상
    그 어떤 보시를 행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어리석은 중생의 유위복일 뿐이다.

    내가 무엇을 얼마만큼 누구에게 보시했다는
    그러한 일체의 상을 다 놓아버리지 않는 이상
    아무리 셀 수 없는 무량한 보시를 했더라도
    그것은 깨달은 자가 숨 한 번 쉬는 공덕에 미치지 못한다.

    일체의 상을 여의고 본래 성품을 깨닫게 된다면
    그 자체가 무량한 복덕이고 공덕이 된다.
    일체의 상을 여의게 되면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법계가 그대로 내가 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베풀 내가 없으며
    베풀어 줄 대상도 없고 베풀 것도 없다.
    베풀 주체인 ‘나’도, 베풀어 줄 대상인 ‘상대’도,
    또한 베풀어 줄 ‘것’도 전부 공했으며,
    전부가 그대로 나와 둘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전체가 둘이 아닌 하나로써 그대로 나이고 그대로 우주인데,
    주고 받을 일이 무엇인가.
    보시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공덕이란 말 또한 텅 비어 사라지고 만다.

    그랬을 때, 본래 성품을 깨닫게 되었을 때,
    존재 자체가 그대로 공덕이 되고, 보시가 되며, 지혜가 된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언설로도,
    그 어떤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텅 빈 공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할진데 어찌 물질적인 보시로써
    상을 타파한 깨달음의 세계와 견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언설로써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만큼
    보시를 한다고 표현할지라도 그것은 유위복 밖에 되지 못할 뿐이다.

    유위복은 아무리 많더라도 그 양이 정해져 있을 뿐이지만,
    무위복은 그 양이 없다.
    그 양이 전체이기 때문에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복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체의 상을 타파한 공덕이며,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그러니 금강경을 올바로 수지하는 공덕은
    도무지 그 양을 셀 수 없는 것이다.
    금강경에 담긴 진리의 크기를 어찌 유위의 양으로써 셀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의 가르침을
    서사하고 수지독송하며 위인해설하는 공덕은 도무지 셀 수 없는 것이다.

    몸으로써 백천만억 겁을 보시하는 것은
    아무리 하더라도 유위의 공덕에 머물 뿐이지만,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닫는 공덕은 무위의 공덕이기 때문이다.

    유위의 공덕을 아무리 많이 쌓더라도
    그 결과 육도 윤회 가운데 천상세계를 갈 수는 있겠지만,
    육도 윤회 그 자체를 떠날 수는 없다.

    그러나 금강경을 깨닫는 공부를 무위라고 하는 이유는
    이 공부로써 윤회의 수레바퀴 자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천만 억겁을 몸으로 보시하더라도
    그 결과는 고작 육도 가운데 천상세계에 조금 더 오래 머무는 것이지만,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닫는 공덕은
    육도 윤회 자체를 벗어나 대 해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 경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은 얼마나 크겠느냐.


    그러면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닫는 공덕을 얻고자 한다면
    어떻게 금강경을 배우고 수행해야 하는가.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달아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대 해탈을 얻고자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수행을 통해 이를 수 있겠는가.

    금강경에서는
    서사와 수지독송 그리고 위인해설이라는
    세 가지 수행법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까지 이렇게 금강경을 공부해 오고 있지만
    여전히 머리로써는 언뜻 이해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아직 내 안에서 금강경이 춤을 추고 흘러들어오고 흘러나오지 못할 것이다.
    아직은 내가 금강경 자체가 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금강경의 가르침이 내 삶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할 것이다.

    아상을 타파하고, 일체의 상을 타파한다는 것이
    말로써는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얼마나 어려운 실천인가.

    그래서 이 경에서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우리 삶 속에서 끊임없이 체험되어지도록 하고 깨닫도록 하기 위해
    세 가지 실천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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