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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리에도 집착하지 말라.
    金剛經 2012. 2. 8. 06:41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이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에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있지 않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면
    연등 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하시기를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
    고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어떤 법이 있지 않은 경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기에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
    고 수기하셨느니라.

    부처님의 과거 인행시에, 연등부처님께서는
    미래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깨달음의 법을 얻어
    석가모니라는 부처가 될 것이라고 수기하셨다.

    연등부처님은 과연 석가모니부처님께
    어떤 법을 전해 주셨던 것일까?
    또 어떤 법을 전해 주었기에 미래에 깨달을 것을
    그 먼 과거에 미리 알고 수기를 내려 주셨던 것일까?
    그 ‘법’은 과연 무엇인가?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그 답을 주고 계신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께 법을 받으셨다고 알고 있었지만
    이제 부처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어떤 법도 받지 않았다’
    고 말씀하고 계신다.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참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어떤 법이 있지 않은 경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받았기 때문에
    다음 세상에 석가모니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하셨다는 것이다.

    즉 석가모니부처님이 스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을 얻었다고 생각하거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이라고 생각할만한 ‘어떤 법’을 생각하거나,
    그 법에 갇혀 있었다면
    연등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께 수기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어떤 한 법도 있지 않은’
    ‘어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있지 않은’ 경계에서
    ‘법 아닌 법을 받음 없이 받으셨기에’
    훗날 석가모니부처가 되리라고 수기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무엇인가.
    과연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슨 법을 말씀하신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법문을 설해 주셨다.
    사성제, 삼법인, 연기법, 십이연기, 사념처 등
    수도 세아릴 수 없이 많은 법을 설해 주셨다.

    일평생 수많은 설법을 하시면서
    수많은 중생에게 법을 설해 주셨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실 때
    ‘나는 단 한 법도 설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평생을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셨지만
    ‘단 한 법도 설하지 않았다’고 하신 바는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어떤 한 법’이라고 할 만한,
    ‘이것이 진리다’라고 할 만한
    그 어떤 고정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다.

    그런데 어떤 것을 진리라고, 법이라고 고정지을 것인가.
    고정 지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항상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없다는 것,
    그렇기에 그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이 부처님 말씀이고 법일진데,

    ‘고정지을 것이 없다’는 진리를 고정화 할 것인가,
    ‘항상하는 것이 없다’는 진리를 항상하는 법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자아가 없다는 무아법을 받아들이는 ‘나’를 내세울 것인가,
    그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는 말씀에 집착할 것인가.

    그 어디에도 집착하고, 머물고, 고정짓고, ‘진리’라고 이름짓고,
    ‘한 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집착하지 말라는 말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나다’하고 고정지을 내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나를 내세워서도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 어떤 법도, 그 어떤 ‘진리’도, 그 어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내세우거나,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는다.
    그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법’이기 때문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결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했다.
    얻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없는데,
    또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내가 없는데,
    어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가 있겠는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도 있지 않음을 바로 깨달았기 때문에
    석가모니부처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수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께
    ‘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습니다.’라고 했다면
    연등부처님은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
    고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실로 어떤 법이 있지 않은 경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기 때문에,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그 어떤 법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연등부처님께서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
    고 수기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라 함은
    모든 법에 여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래라 하는 것은, 부처라 하는 것은
    모든 법에 있어 여여한 것을 말한다.
    여여하다는 것은 어떤 법에도 집착함이 없고,
    어떤 법에도 머물지 않지만
    그 모든 법을 나투고
    그 어떤 법도 자유자재하게 거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나툰 모습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나툴 수 있지만,
    늘 한결같이 본래의 바탕자리를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의 본 바탕은 늘 여여하다.
    여여한 불성 그대로이다.
    우리 자신이 그대로 부처요, 자성불이며, 법신불인 것이다.
    여래로써 늘 여여한 본래 그대로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

    모든 법에 있어 늘 여여하다.
    어떤 모습에서도, 어떤 곳에서도, 어떤 법에서도
    본바탕에서는 늘 한결같은 여여한 성품을 잃지 않는다.

    어리석은 중생이 언젠가
    수행을 통해 깨달아 여여한 부처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여여한 부처인 것이다.
    본래불이고, 본래 자성이 청정하니
    사실은 수행도 필요없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왜 불가에서는 수많은 수행 방편을 이야기하면서,
    참선, 염불, 간경, 주력, 절 등의 수행을 이야기 하고 있는가.
    본래불이라면 수행할 필요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가 본래부터 부처인 것을 모르고 있다.
    스스로가 여여한 여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 스스로 번뇌를 만들고, 욕심을 만들어
    그 욕심과 번뇌에 스스로 얽매이는 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스스로 ‘나’라는 허상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만들어 놓은 ‘나’라는 허상에 얽매여
    ‘내가 잘나고 싶고’ ‘내가 돈 벌고 싶고’ ‘내가 유명해지고 싶고’
    ‘내가 깨닫고 싶다’는 등의 온갖 욕심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나’라는 허상만 만들지 않는다면
    ‘내 욕심’이 어디 붙을 자리가 있겠는가.
    ‘나’만 완전히 놓아버려 무아법을 깨닫고 나면
    본래 여여한 여래가 목전에 당도해 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부처이고 여래라는 사실을
    ‘나’라는 아상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구경무아분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 처럼
    무아법을 구경에 바로 보게 되는 순간
    ‘내가 깨닫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여여한 여래였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이렇게 ‘나’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있다보니
    부처님께서도 방편을 써서
    ‘나’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있는 데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이며,
    ‘나’를 벗어나도록 하는 실천행을 일러주시니
    그것이 수행이다.

    본래부처라는 것을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라면
    수행도 필요없고, 설법도 필요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나’에 갇혀 있고, 괴로워하고 있으며,
    삶에 아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수행이 필요한 것이고, 법문이 필요한 것이다.
    괴롭지 않다면, 한없이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어떤 법에도 걸림이 없다면
    불교도 필요없고, 수행도 필요 없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다 쓰잘데 없는 말일 뿐이다.
    그 어떤 한 법도 붙을 자리가 없는 것이다.

    구경에 무아법을 깨닫게 되면
    모든 법에 여여한 여래임을 바로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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