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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체가 다 불법이다
    金剛經 2012. 2. 9. 06:16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고 한다면 수보리야,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설한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일체법이라 함은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 까닭에 이름이 일체 법인 것이다.

    수보리야, 예컨대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 같다.”
    수보리가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몸이 아주 크다는 것도
    실은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다’라고.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금강경을 보라.
    금강경에서는 이 당연한 말까지도 부정을 하고 있다.

    금강경이야말로 일체 모든 방편을 거두어 들여
    온전한 진리로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다.
    조금이라도 참 진리와 어긋나는 것이 있다면
    전부 부정하고 파하여 진리를 드러나게 하는 파사현정의 가르침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사용하던 말,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다’라는 명제를 생각해 보자.

    이 말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부처님에 대해 설명하고 표현하며
    사람들에게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려다 보니까
    그렇게 표현했을 뿐이다.

    언어라는 것의 조악함 때문에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편을 버리고 진리의 편에서 이 명제를 관찰해 보자.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거나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에 어떤 모순이 있는가.

    과연 여래는 깨달음을 얻으신 분인가.
    그렇지 않다.
    깨달음을 얻을 ‘여래’, ‘부처’가 없다.

    깨달음을 얻은 ‘나’가 있다거나,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벌써 상대성에 빠진 생각이다.

    깨달은 부처가 있고 깨닫지 못한 중생이 있어서
    어리석은 중생이 깨달은 불세계로 나가기 위해 수행한다는 생각은
    벌써 부처와 중생을 둘로 나누어 놓은 생각이다.

    부처는 그 어떤 분별의 세계에도 몸을 담고 있지 않다.
    생사와 열반, 중생과 부처라는 두 가지 극단 어디에도 부처는 없다.
    부처는 ‘어디에’ 있어야 한다거나,
    ‘어떤 상태로’ 있어야 한다거나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깨달은 ‘자’라는
    어떤 존재적인 틀에 부처를 가둘 수는 없다.

    부처는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깨달았다는 것은 완전히 무아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즉 ‘내가 없음’을 온전히 자각한 것, 구경무아인 것이다.

    무아가 곧 깨달음일진데,
    어디에 깨달은 ‘나’를 붙일 수 있을 것인가.
    ‘나’가 없는데, 어디에 깨달은 ‘나’를 내세울 수 있는가.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에게 오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누구든 깨어있는 순간 바로 부처인 것이다.
    깨어있는 순간, 오직 깨어있음의 빛만이 있을 뿐
    나와 너라는 상대개념도 사라지고
    생사, 중생과 부처라는 분별 또한 사라진다.

    바로 그것, 깨어있음,
    그것이 바로 부처다.

    만약 스스로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는 깨달음을 얻은 ‘나’에 갇혀 있기 때문에
    깨달았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아(我)는 깨닫지 못한다.
    무아(無我)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무아는 말 그대로 무아,
    내가 없음이며 텅 비어 있음이고
    무상과 무아, 무자성과 공이기 때문에
    주체를 내세울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는 말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깨달을 내가 없음을 아는 것이 깨달음일진데
    스스로를 깨달음을 주체로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것은 스스로의 무명을 밝히는 일일 뿐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다.

    여래라는 주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그 어떤 깨달음의 상태를
    얻어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여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얻음’도 없다.

    그렇기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는 말은 완전한 거짓이다.
    언어 자체에 큰 모순이 담겨 있는 표현이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깨달음’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며,
    ‘깨달은 자’에 집착해 있는 것이고,
    ‘얻음’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그는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여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어떤 ‘자’가 있다면
    그는 여래가 아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여래는 없다.
    또한 여래가 얻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그 어떤 ‘법’도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어떤 특정한 ‘법’이 아니다.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이 없다.

    여래가 얻은 법이라는 것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는 것이다.
    여래가 어떤 ‘법’을 얻었다면
    그것이 참된 것, 실다운 것이라는 말인데,
    여래가 얻은 법은 실다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헛된 것 또한 아니다.
    실다운 법에 집착해도 안되고, 헛된 법에 집착해도 안 된다.

    우린 누구나 말할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고.

    그러나 얻을 깨달음이 없다.
    깨달음이라는 것을 어떤 실체적인 것,
    진리다운 어떤 것으로 생각지 말라.
    ‘어떤 것’으로 고정지어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깨달음이 아니며 진리도 아니다.
    그 어떤 ‘법’이 아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왜 법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일까.
    깨달았다고 할 어떤 법도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일체법이 곧 불법’이기 때문이다.

    일체 모든 것이 불법이 아니고
    어떤 특정한 것만이 불법이라면
    어떤 깨달을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일체 모든 법이 다 불법이라면
    거기에 어떤 것만을 정하고 택해
    깨달아야 한다고 할 특정한 ‘법’이 없지 않겠는가.

    진리 아닌 것이 따로 있고 진리가 따로 있다고 한다면,
    99%는 진리가 아니고 1%가 진리라고 한다면
    그 1%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애써야 하고 노력해야 하겠지만
    완전히 100% 전부가 다 진리이고 불법이라면
    어떤 특정한 1%를 깨닫고 얻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불법이란 그와 같다.
    일체 모든 법이 다 불법이기 때문에
    별도로 실다운 법과 헛된 법을 나눌 수가 없다.

    나도 그대로 불법이며 진리이고,
    너도 그대로 진리이다.
    하늘도 바람도 구름도
    산도 강도 바다도
    풀벌레며 곤충들 짐승들에서부터
    나무와 풀꽃들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그대로가 불법이다.

    모두가 그대로 부처님이며 부처님 가르침이다.
    지금 이대로 완전한 진리의 모습이다.
    더이상 깨닫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지금 이대로 100% 완전한 부처이기 때문이다.
    일체법이 그대로 불법이기 때문이다.

    100% 모두가 그대로 불법이기에
    100% 모두가 그대로 실다운 법이다.
    그러니 거기에 몇 %를 실답다고 나누고,
    몇 %를 헛되다고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실다운 것을 찾는 노력은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러니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는 말이 불필요한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주체가 없으며,
    여래가 얻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그 어떤 특정한 ‘법’이 없다면
    어찌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나면 분명 다시
    ‘일체법’에 집착하는 이가 생겨날 것이다.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하니
    그 ‘일체법’에 집착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시 일체법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위해
    부처님께서는 또다시 일체법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도록 이끌고 있다.
    일체법에 집착해서도 안 되는 이유는
    일체법이라는 것은 일체법이 아니며,
    그 이름이 일체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도 같다.
    몸집이 큰 사람이라는 것은
    크고 작은 둘을 나누어서
    그 가운데 큰쪽을 택한 큰 몸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몸집이 큰 사람이라는 것은
    크고 작은 것을 초월한 절대 큰 몸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어떤 한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한 사람의 몸집을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크고 작은 분별이 생겨난다.

    그러나 어떤 한 사람의 육신이 아닌,
    온 우주 법계를 다 담아낼 수 있는
    삼라만상의 당체인 법신에서는
    그 어떤 크고 작은 분별도 다 사라지고 만다.

    온 우주의 어떤 한 부분을 차지하는 몸집을 가졌다면
    크고 작다는 분별이 생기고
    따라서 ‘어떤 한 몸’ ‘큰 몸집’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온 우주 법계 그대로인 법신은
    따로 떼어 내어 얼마만한 몸의 법신이라고 말할 것이 없다.

    우주 법계의 크기를 100 이라고 보았을 때,
    그 가운데 몸집이 1이나 2 정도의 크기라면
    그것은 크다 작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법신의 몸은 그대로 우주 법계의 크기인 100이기 때문에
    크다 작다고 분별할 수 없으며
    별도로 얼마만큼 크냐 작으냐를 논할 수 없다.

    어떤 한 큰 몸이 아니라
    법신은 전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체법이 곧 불법이라는 말처럼,
    일체 모든 법계가 그대로 법신으로서의 큰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큰 몸이라는 것도 이름을 큰 몸이라 이름 붙였을 뿐
    따로 큰 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큰 몸은 큰 몸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기 때문에
    큰 몸일 수 있는 것이다.

    작은 몸, 큰 몸 하고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큰 몸을 택하는 큰 몸은 참된 큰 몸일 수 없다.
    그것은 상대적인 큰 것일 뿐,
    절대로서의 큰 몸은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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