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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래의 오안
    金剛經 2012. 2. 13. 06:55

     

     

    일체를 하나로 보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육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법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법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불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불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에 대해 여래가 말한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항하의 모래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하나의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의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고,
    그 모든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부처님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를 얼마나 많다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체동관이란 삼라만상 일체 모든 것을 둘로 나누지 않고
    한성품으로 관찰하여 본다는 뜻이다.
    그렇게 차별하여 나누지 않고 한성품으로, 한바탕으로 보는 눈이
    바로 부처님의 오안(五眼)이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오안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을, 또 중생들의 마음을 차별하여 나누어 보지 않고
    한바탕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오안으로 일체를 동관하여 알 수 있는 이유는,
    항하의 모래알 수만큼의 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며,
    즉 그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라는
    삼세의 어떤 마음도 고정된 실체가 없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처님은 오안의 눈으로 일체를 동관함으로써
    모든 중생의 마음을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육안이 있습니다.”


    육안이란 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눈을 말한다.
    육신의 눈으로는 과거나 미래의 것도 보지 못하고,
    공간적으로 다른 장소의 것 또한 보지 못하며,
    눈을 가리기만 해도 보지 못한다.

    육신의 눈으로는 다만 빛의 도움을 통해
    내 눈 앞 사물의 모양과 색깔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들 평범한 중생이 가지고 있는 눈은 오안 가운데
    바로 첫 번째 눈인 이 육안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한다.
    여기에서 모든 갈등과 시비와 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생겨나곤 한다.
    그러나 여래에게는 이 육안 뿐 아니라
    천안, 혜안, 법안, 불안 등의 또 다른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

    여기에서는 오안 가운데 첫 번째인
    육안을 모든 중생들처럼 부처님 또한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천안이 있습니다.”


    두 번째 눈, 천안에서부터는
    평범한 인간계의 사람이나 축생들이 가지지 않고 있는 눈이다.
    천안은 말 그대로 하늘의 눈, 천상세계 신들의 눈으로
    인간의 육안을 넘어 시공을 초월하는 눈의 기능이 있다.

    천상 신들은 육신이 없기 때문에 육신에 걸리지 않는다.
    육신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막힘이 없다.
    그러니 천안이란 공간에 걸림이 없는 눈이며,
    이 곳에서 어느 곳이든 볼 수 있는 눈을 말한다.

    또한 천상 신들은 그 종류에 따라
    인간계의 몇 백년이 그 하늘의 하루인 경우가 있는 것 처럼
    시간적으로도 인간계에서와 같은 틀에 갖혀 있지 않다.
    그렇기에 천안은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어
    과거와 미래에 있을 생사의 모양을 미리 알 수 있는 눈이기도 하다.

    [지도론]에서는
    ‘천안으로 보면 땅에서부터 하지의 육도와 중생 제물을 본다.
    가까운 것이나 먼 것이나 큰 것이나 작은 것 등
    모든 사물이 보이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이 천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하나는 수행에 따라 얻어지는 것으로
    인간계에 태어나 선정을 닦고 수행을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천안이 있고,
    다른 하나는 과보에 따라 얻어지는 것으로
    색계의 하늘에 태어나 스스로 천안을 얻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법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법안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혜안으로 말 그대로 지혜의 눈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지혜’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혜안은 지혜의 눈이고, 법안은 법의 눈이며,
    불안은 부처님의 눈이라고 한다면 간단하게 끝나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도무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일체 모든 존재의 본바탕에 있는 본질, 불성, 참성품을 깨달아 아는 지혜로,
    삼독심 등 일체 모든 번뇌가 사라져
    근본불교에서 말했던 무상, 무아, 고, 중도, 연기의 이치를
    밝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이 눈은 성문과 연각 같은 근본불교 아라한들이 지니고 있는 눈이다.
    성문은 부처님께서 가르치는 음성을 듣고 수행하는 수행자를 뜻하며,
    스스로 깨닫기 보다는 부처님의 음성을 듣고서야
    비로소 수행할 수 있는 제자를 말한다.

    이에 비해 연각은 독각, 벽지불이라고도 하며,
    성문과는 달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깨달음을 얻은 자를 말한다.
    이 두 수행자의 공통점은 모두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서 대승불교에서 강조되고 있는 보살은
    자리이타의 정신으로 자신의 깨달음 보다
    중생구제에 더 큰 원력을 세움으로써
    원력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성불도 뒤로 미룰 정도의
    굳은 서원을 가진 수행자를 말한다.

    혜안은 바로 성문과 연각 수행자,
    즉 자신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이들의 지혜의 눈을 말하고,
    법안은 보살 수행자,
    즉 자신의 깨달음 보다는 중생구제에 원력을 세운 이들의 눈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그동안 성문과 연각 등
    혜안을 구족한 아라한을 소승이라고 폄하하면서
    법안을 구족한 대승의 보살승을
    완전한 이상적 수행자상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사상이 나와 너를 나누지 않고,
    생사와 열반을 나누지 않으며,
    중생과 부처를 차별하여 나누지 않는 가르침을 볼 때
    자신의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수행하여
    깨달음에 이른 아라한을 소승이라고 폄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아라한의 입장에서는
    나의 깨달음이 곧 온 우주 법계의 깨달음과 둘이 아니다.
    나라는 한 생명은 곧 온 우주 법계의 전체 생명과 둘이 아니다.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며(일즉일체다즉일),
    한 티끌 속에서도 시방세계를 담을 수 있다(일미진중함시방)고 한
    법성게의 게송을 생각해 보라.

    한 사람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한 사람의 소승이 자신만의 깨달음을 위해 수행한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 법계의 깨달음이며,
    전체 생명이 함께 깨달은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혜안을 구족한 아라한은
    자신의 깨달음을 통해
    모든 생명의 모든 중생의 깨달음을 실현해 보인 사람이다.
    아라한의 지혜인 혜안을 통해 일체 모든 생명과 존재를 깨닫게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육조스님도 금강경 해설에서
    ‘반야바라밀의 진리가
    능히 삼세의 일체법을 낸다고 여기는 것을 혜안이라 한다’
    고 했다.

    즉 하나의 진리가 삼세의 일체법을 내기 때문에
    애써 삼세 일체법을 다 깨닫겠다고 나설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진리 그 하나를 깨닫게 되면
    일체 모든 법을 깨닫겠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혜안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혜안이란,
    지혜의 눈으로써,
    진리의 세계에서 모든 중생들이 결국 하나임을 보는 것이며,
    무분별의 세계에서 모든 분별상들을 하나로 회통하는 것이고,
    하나가 곧 전체임을 깨닫는 것이며(일즉일체),
    이치가 곧 현상계와 둘이 아니게 걸림 없음을 깨닫는 것이고(이사무애법계),
    공의 세계에서 색이 하나임(공불이색)을
    일체동관하는 눈인 것이다.

    반대로 법안을 구족한 대자대비의 보살은
    일체 모든 중생들의 깨달음을 통해
    자신 또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이다.

    일체 모든 중생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곧 내가 깨닫지 못한것과 다를 것이 없으며,
    일체 모든 중생이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자신도 완전한 깨달음의 향기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즉 보살은 법안을 통해
    일체 모든 존재의 깨달음이 곧 나의 깨달음임을 실천하는 수행자인 것이다.

    육조스님의 해설에 보면
    ‘일체 불법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고 여기는 것을 법안이라고 한다’
    고 했다.
    즉 일체 불법은 모든 생명과 모든 존재들 내면에 본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보살은 그 모든 중생들의 본래 갖추어진 불법을 일깨워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대자대비의 법안을 구족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법안은,
    자비의 눈으로써,
    모든 중생들의 깨달음에서 곧 진리를 보는 것이며,
    분별상의 세계에서 무분별의 진리를 보는 것이고,
    전체가 곧 하나임을 깨닫는 것이며(다즉일),
    현상계와 현상계가 둘이 아니게 걸림 없음을 깨닫는 것이고(사사무애법계),
    색의 세계에서 공이 하나임(색불이공)을
    일체동관하는 눈인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불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불안이 있습니다.”


    불안은 말 그대로 부처님의 눈이다.
    부처님의 눈은 소승에도 대승에도 치우침이 없으며,
    하나에도 전체에도 치우치지 않고,
    부처에도 중생에도, 아라한과 보살에도,
    생사에도 열반에도, 색에도 공에도 치우침이 없는
    완전한 무차별, 무분별의 눈이다.

    불안은 모든 중생들 개개인 속에서도 깨달음을 보며
    깨달음 속에서 다시 중생들의 삶을 본다.
    그렇기에 깨달아 부처가 되어도 구제할 중생이 없고,
    중생을 다 구제하면서도 하나도 구제하는 바가 없다.

    차별상 속에 무차별이 있고,
    또한 무차별 속에 차별로써 무한히 나툴 수 있다.
    전체가 곧 하나이며 하나가 다시 전체를 품고,
    현상계와 진리계라는 나뉨을 뛰어넘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이 색과 다르지 않고,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임을 동관한다.
    일체 모든 나뉨들을 거두어들여 동관하는 눈이
    바로 일체동관의 부처님의 눈, 불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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