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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한 '법'도 없다
    金剛經 2012. 2. 7. 06:21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와 선녀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면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마음을 내라.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리라.
    그러나 이렇게 일체 중생을 다 멸도에 들게 하였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라고.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앞서 본문에서 나온 바이다.
    앞서 금강경의 가르침을 통해 말씀하신 무아의 도리를 펴기 위해
    수보리의 이심전심 염화미소의 질문이 시작되었고,
    그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앞서 설했던 가르침 가운데
    몇 가지의 비유로써 무아의 가르침을 펴고 계신다.

    금강경의 가르침은 상을 타파하는 가르침이라고 했다.
    상을 타파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본래 고정된 상이란 없기 때문이다.
    즉 무상이기 때문에 상에 얽매이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체 상의 근본은 바로 ‘나다’하는 아상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금강경은 끊임없이 아상 타파를 위한 법문을 내리고 있다.

    아상을 타파해야 하는 이유는 무아이기 때문이다.
    본래 고정된 실체로써의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조금의 ‘나’라는 상이라도 생겨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보살이 되기에는 거리가 멀다.

    이 분에서 부처님께서는 3가지 비유로써
    무아를 통달하도록 이끌고 있다.

    첫 번째 비유는 수보리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수보리가 처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데는
    바로 이러한 이유가 있다.

    똑같은 말이 두 번 반복된다면
    그것은 그저 무의미한 같은 말의 두 번의 반복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같은 말을 열 번, 아니 스무 번, 백천만 번을 반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 같은 말의 반복이 아니다.
    말은 같은 말일 지 몰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전해 새로운 말이다.

    내 안에 과거가 꽉 들어 차 있고,
    과거의 기억과 판단이 꽉 들어 차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다만 같은 말의 반복에 불과할 것이다.

    같은 말을 듣는 순간 벌써 내 안의 과거는 말할 것이다.
    ‘저 말은 이미 들었던 말이야. 나도 다 아는 말이야.’
    그러나 과거의 견해나 분별로써 지금의 말을 판단하려 들지 말라.

    지금의 말은 ‘지금 여기’라는 시공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혀 새로운 경험이고 설법이다.
    이유가 있고 제 몫을 가지고 그 말들은 반복된다.
    그러나 내 안이 과거의 분별로 꽉 차 있다면
    그 말의 이유를 한 치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3가지 비유가 이 분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아법의 깨달음을 위함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 선남자 선녀인은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지만 한 명도 제도한 자가 없다’
    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답하고 있다.

    왜냐하면 참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 보살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스스로 ‘내가 제도한다’는 상이 있게 되면
    그것은 벌써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머물러 있다는 반증이다.

    보리심을 발한 수행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상이
    바로 ‘내가 제도한다’는 상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을 내가 제도하여 멸도에 들게 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참된 수행자는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면서도 스스로 제도한다는 생각이 없다.
    일어나더라도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 있는 수행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들 또한 제도하고 포교하며
    주변 사람들을 부처님 가르침으로 이끌더라도
    ‘내가 포교한다’ ‘내가 제도한다’ ‘내가 복을 짓는다’ ‘내가 보시했다’
    는 상을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스스로 ‘나는 수행한다’거나, ‘나는 깨달았다’거나,
    ‘내가 제도한다’ ‘내가 보시한다’ 거나 하는 등의
    ‘내가한다’는 상을 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전혀 금강경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아의 가르침에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혹 요즈음의 세상을 보면
    스스로 견성을 했다거나 깨달았다는 사람도 많이 등장하고,
    또 어떤 단체에서는 돈 얼마를 내면
    몇 일 안에 부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얼마를 더 내면 부처 이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유혹하는 곳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옛 말씀에,
    이번 생에 한 번 얼핏 자신의 성품을 본 사람,
    그것을 초견성이라고 하거나 수다원이라고 하거나, 견도라고 하거나
    그렇게 어떤 이름을 지어 놓고
    스스로 그 지위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번 생 공부의 진척은 더 나아가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 이유는 스스로 ‘나는 견성을 했다’거나,
    ‘나는 이만큼의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혹은 ‘나는 이만큼 깨달았는데 너는 그렇지 못하구나’ 하는 등의
    스스로를 높이고 상대를 낮추는 분별심이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돈이 많다’ ‘내가 잘났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것도
    매혹적인 큰 상일진데,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아상이야 얼마나 유혹적이고 매력적인 목표인가.

    그러나 ‘내가 깨달았다’는 미세한 아상은
    곧 상대방과의 차별을 가져오고
    그 차별은 나를 더욱 어리석은 아상의 나락으로 몰고 갈 것이다.

    ‘나는 어리석다’는 아상이나,
    ‘나는 깨달았다’는 아상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여전히 아상임에는 변화가 없다.
    그러나 어쩌면 ‘나는 깨달았다’는 아상이
    더 큰 장애를 가져올 수도 있다.
    수보리의 질문과 이어지는 부처님의 답변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스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아상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미세한 마음이라도
    그 마음은 여전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반증일 뿐이다.

    ‘내가’ ‘깨달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없다.
    ‘내가’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지만
    얻을 그 어떤 법도 없다.
    얻을 깨달음도 없으며, 얻을 주체인 ‘나’ 또한 없다.
    완전한 무아, 완전한 텅 빔, 완전한 공만이
    있음과 없음을 초월해서 있다.

    보통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고 못 얻고 하는 어떤 법으로 착각을 하곤 한다.
    법을 깨닫고 못 깨닫고 하는 이분법으로 진리를 나누고 있다.
    그 어떤 나뉨도, 그 어떤 이분법도 진리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

    깨달았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깨달은 나’에 대한 환상은 쓰레기 통에 집어 넣는 편이 낳을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는 말은 도무지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깨달음에는 ‘나’가 없다.
    깨달을 ‘나’가 없었을 때,
    얻어야 할 어떤 ‘깨달음’이 없었을 때
    참된 깨달음은 드러남도 없이 드러난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환상을 버리라.
    이것이 첫 번째 부처님의 무아 법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리라고
    서원하며 실천해야겠지만
    일체 중생을 다 멸도에 들게 했더라도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어야 한다고 설하신 것이다.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어 깨달음에 이르게 했으면서도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마도 수행을 하는 많은 이들은
    ‘내가 깨달았다’ 정도 까지는 아닐지라도,
    ‘나는 수행자다’ ‘나는 이렇게 수행하는 사람이다.’
    ‘나는 수행력이 높다’ ‘나는 수행하지 않는 다른 이들에 비해 우월하다’
    하는 등의 비교, 판단, 분별이
    끊임없이 고개를 치켜들고 올라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런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탓할 것은 없다.
    다만 그런 생각에 스스로 빠지는 것을 경계할 일이다.
    그런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런 모습이다.
    다만 그런 생각이 일어났음을 놓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런 생각에 휘둘리지 말라.
    다만 깨어있는 정신으로 그런 생각을 잘 살피라.
    그러한 생각이 일어나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다만 잘 살피기만 하라.
    잘 살피고 관해야 거기에 속지 않을 수 있다.

    스스로 그 우월감에 기뻐하거나,
    열등감에 고개 숙이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필 일이다.

    지금 이 순간 이렇게 금강경을 공부하며 자문해 보자.
    스스로 ‘나는 금강경을 공부했다’ ‘불법의 지혜를 요달했다’
    고 하는 등의 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금강경을 좀 안다’고 생각한다면
    전혀 금강경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말로만 글로써만 받아들일 뿐
    내 안에 그 의미가 온 존재로써 와 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수보리야,
    그 까닭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킬
    어떤 한 법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오직 불성 밖에 없다.
    모든 것이 부처님 마음의 나툼일 뿐이다.
    불성이라고 이름짓는 것도
    그저 이름을 붙이자니 그렇게 붙여 놓은 것일 뿐이지,
    불성이라는 말 또한 어디에 붙을 데가 없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어떤 실체적인 ‘깨달음’의 모양이 있어서
    깨달음이란 말이 나온 것이 아니다.

    깨달은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부처님은 어떻게 생기셨을까?
    또 깨달았다고 하는 큰스님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잘생겼을까 못생겼을까?

    마른체형일까 아니면 통통하실까?
    눈은 어떤 모습이고, 귀와 코, 입은 어떻게 생겼을까?
    키는 클까 작을까? 몇 cm 정도가 되실까?
    옷은 어떤 옷을 입으시고,
    신발은 어떤 메이커의 신발을 신고 다니실까?
    밥은 무엇을 드실까? 햄버거나 콜라, 커피도 드실까?

    과연 어떤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깨달은 자의 모습인가?
    정답은 없다.
    ‘어떤’ 모습일거라고 모양을 만들어 두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상일 뿐이다. 우리의 바램일 뿐이다.

    어떤 모양도 없기 때문에,
    어떤 형식이나 틀에도 얽매임이 없기 때문에
    그 어떤 모습으로도 나투실 수 있고,
    자유자재하게 나투실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은 자’를 어떤 성격일거라고 규정짓지 말라.
    어떤 외모일거라고 규정짓지 말라.
    남자 혹은 여자일거라고 고정 짓지 말라.

    그것은 깨달음의 본 모습이 아니다.
    깨달음은 어떤 것에도 고정되게 담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에도 담길 수 있는 것이다.

    ‘스님’은 어때야 한다고 고정짓지 말라.
    점잖아야 한다거나, 말도 느려야 한다거나,
    외모가 자비롭게 생겨야 한다거나,
    화도 내면 안 된다거나 하는 등의
    고정된 관념으로 ‘스님’이라는 관념을 내 안에 만들어 두지 말라.

    그것은 스님이 아니다.
    어떤 틀에 갖힌 정형화된 스님은 스님이 아니다.
    참된 수행자는 어떤 틀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틀에도 담길 수 있는 것이다.

    수행자란 ‘수행자다운’ 어떤 틀에 잘 들어맞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다운’ 사람이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자기 자신’만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수행자다.

    획일적이지 않은 자기 자신의 길을 가는 자가 수행자다.
    그러한 자기 자신의 길은 어디에도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길이다.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을 어떤 ‘틀’에 가두지 말라.
    ‘누구’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부처님’처럼 살려고 애쓴다거나,
    ‘누구’처럼 돈 벌려고, 좋은 차 살려고, 좋은 직장에 다니려고,
    혹은 ‘누구’처럼 예뻐지려고 온갖 노력을 쏟지 말라.

    그것은 참된 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법은 ‘어떤 틀’ 속에 갇히지 않는다.
    어떤 한 법도 없는 것이 참된 법이다.
    어디에도 갇히지 않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이 되는 것이고,
    그랬을 때 우리 안에 있는 본래불의 모습은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된다.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법신불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법신불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법신불이 무엇인가.
    산도 부처요, 강도 부처요,
    나무며 풀에서부터 태양과 바람과 구름과 시내물과
    짐승과 곤충과 사람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살인자에게도 부처의 본래 모습은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다.

    다시 말해 부처는
    그 어떤 모습으로도 나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한 법도 없기 때문이다.

    즉 어떻게 규정짓는다거나,
    어떤 모습으로 만든다거나,
    어떤 법으로 정한다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부처는 어떤 한 법도 있지 않은 경계를 말한다.
    그러니 깨닫겠다는 마음을 일으킬 그 어떤 법도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다는 것도 표현이고 말일 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킬 어떤 정해진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정해진 법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떤 한 법도 있지 않은 경계에서
    그 모든 일체법을 다 나툴 수 있는 것이다.

    정해지지 않아야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물은 그 모양이 정해지지 않았다 보니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어지고, 네모 그릇에 담기면 네모가 되며,
    날이 추워지면 얼고, 너무 더워지면 수증기로 날아가지 않는가.

    물의 모양이 이미 어떻게 정해져 있다면
    그렇게 나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법도 마찬가지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나’라고 정할 것인가.
    이번 생에 사람이었다가 다음 생에 짐승으로 윤회를 했다면
    짐승이 고정된 ‘나’인가, 아니면 사람이 고정된 ‘나’의 실체인가.

    어떤 것도 고정된 것은 없다.
    ‘나’가 없기 때문이다.
    ‘나’라는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에
    나는 사람도 될 수 있고, 동물도 될 수 있고,
    바람도, 구름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아다.
    무아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인연따라 그 어떤 것으로도 나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아법이 말해주는
    ‘정한 바 없는 법’이고, ‘한 법도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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