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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머무름 없는 묘행(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라.)
    金剛經 2011. 12. 15. 06:36

     

    머무름 없는 묘행(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경계(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이른바 색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할 것이며,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 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앞의 대승정종분이
    금강경 가르침의 요지가 핵심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면,
    이 제 4분인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금강경의 실천적인 가르침이 잘 드러나 있는 분이라고 하겠습니다.

    ‘묘행무주’라는 이 분의 제목은
    모든 수행자들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실천의 행을 일컫는 말이며,
    불교 수행의 핵심이 잘 드러나 있고
    동시에 수행자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묘행무주란 쉽게 말해 ‘머무는 바 없는 미묘한 행’이라는 말인데,
    묘행과 무주는 같은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어떤 행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묘행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묘행에서 ‘묘(妙)’ 자는 불교에서 종종 등장하는 말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언어를 뛰어넘어 그 이면의 ‘참 말’을 전하고자 할 때 보통 사용하는 말로써,
    묘행이란 부처의 행, 즉 깨달은 이의 머무름 없는 행,
    함이 없는 행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묘행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바로 ‘무주’인 것입니다.
    다시말해 묘행 즉 부처의 행은 ‘머무는 바 없는 행’인 것입니다.
    함이 없이 행하고, 머무는 바 없이 실천하는 행이 바로 부처의 묘행인 것입니다.

    머무는 바 없다는 말은 집착함이 없다는 말이고,
    바라는 바가 없다는 말이며,
    아무런 분별도 없이 무분별의 행을 한다는 말이며,
    나아가 과거나 미래에 걸리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행이란 말입니다.

    어떤 행을 하면서도, 그 행동에 이유가 없고, 목적이 없고,
    그 행동을 했을 때 이렇게 되겠지 하고 바라지 않으며,
    내 이익을 위해 머리 굴려 행동하지 않고,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예측에 대한
    연상작용에 의해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무주의 행은 즉각적이면서도 전체적이면서 온전한 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주의 묘행은 온 우주 법계에 그대로 내맡기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행인 것입니다.
    내가 하는 행이 아니라, 법계가 하는 행이고, 부처님이 하는 행인 것입니다.

    불교에서 ‘마음을 비워라’ ‘놓아라’ 하니까 많은 분들이 의문을 가집니다.
    다 비우고 놓으라고만 하니 그럼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고 반문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일도 하지 말고,
    그냥 목석처럼 앉아 있으라는 말이냐고 말입니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묘행무주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 행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묘행을 하라는 말이며, 즉 머무는 바 없는 행을 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돈도 벌고, 일도 하고, 사랑도 하고 할 것 다 하면서도
    집착함이 없이 머무름이 없이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돈에 집착해서 돈을 벌지 말고,
    사랑에 집착해서 사랑을 하지 말고,
    일에 집착하여 일의 결과나 성취에 마음을 묶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집착함이 없는 행이고,
    머무는 바 없는 행이며, 바로 묘행인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경계(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이 4분의 법문은 앞선 수보리의 질문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하는데 대한 답변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즉 머무는 바 없이 머물러야 하고,
    함이 없는 행인 묘행의 실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분에서 묘행은 구체적으로 ‘보시’를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갑자기 보시의 법문이 나오게 되는 점이
    조금 의문스러운 분이 계실 것입니다.

    무주의 묘행으로 보시를 이야기 하는 이유는,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 선녀인들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바를 설법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대승정종분에서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들을 무여열반의 세계로 인도하여
    완전한 멸도에 들게 해야 한다는 설법을 하셨는데,
    이 말은 보살이기 때문에 상구보리는 거의 이루었으므로
    하화중생이라는 보살의 대원을 세워
    일체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설법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와 보살의 묘행은
    근원에서 무주의 행으로 하나이지만,
    방편으로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하나가 지혜 증득을 위한 깨달음의 실천 즉 수행이고,
    다른 하나가 이타적인 보시의 실천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이는 모든 보살의 두 가지 큰 서원이며,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을
    복과 지혜가 충만한 분으로 묘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에게 있어 수행은
    이미 부처가 되기 직전에 이르렀으며,
    다만 부처가 되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이유가
    바로 일체중생을 성불의 길로 이끌겠다는
    회향의 발원, 보시의 발원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 보살에게 있어 유일한 묘행은 ‘보시’인 것입니다.
    보살이 보살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겠다는 하화중생의 발원,
    즉 법보시의 실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에게 묘행이라는 보시를 설하고 계신 것입니다.

    앞서 대승정종분에서
    일체 중생을 모두 열반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서원하라고 말씀을 하셨고,
    이 분 묘행무주분에서는 그 서원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이
    바로 머무름이 없는 실천행을 해야 한다는 점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보살들은 아직 완전히 100% 부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수행의 퇴전이 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아주 드문 일이 될 것이고,
    아주 작고 미세한 심연의 파장일지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보살들이 서원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행여나 퇴전하게 될지 모를 점을 짚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이끈다는 것이 바로 법보시인 것이며,
    법보시야 말로 가장 온전한 보시입니다.
    이러한 보살들의 하화중생이란 법보시의 실천에 있어
    부처님께서는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고 설하고 계신 것입니다.

    행여나 있을지 모를
    ‘내가 보시한다’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 ‘내가 하화중생을 실천한다’
    라고 하는 작은 상조차도 다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나’라는 상 없이 보시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보시를 하면서, 또 일체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면서
    ‘내가 한다’는 아상이 있다면
    그것은 무주가 아니며 묘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는 나(施輪)도 없고 받는 상대(受輪)도 없으며,
    주는 것(物輪) 또한 다 청정한,
    삼륜청정(三輪淸淨)의 보시, 묘행의 보시를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네 가지 상의 타파가 곧 바른 보시의 실천인 것입니다.
    사상이 타파되지 않고서는 참된 보시가 불가능해 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묘행 무주의 의미는 좀 더 깊이있게 다가옵니다.
    묘행이란 실천의 가르침이며, 무주는 이론의 가르침이고,
    묘행이란 보시의 실천행이며, 무주란 지혜의 실천행이고,
    묘행이 하화중생의 가르침이면,
    무주란 상구보리의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주와 묘행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무주일때만이 묘행이 될 수 있고,
    묘행이 그대로 무주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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