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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상(四相)의 의미
    金剛經 2011. 12. 12. 09:13

     

    [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자아(自我)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영혼이라는 생각, 개아(個我)라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구절에서 금강경의 가르침은 절정을 이룹니다.
    앞서 말씀하신
    ‘모든 중생을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
    는 말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이기도 하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법무아(諸法無我)에 대한 회귀(回歸)이고,
    근본불교에 대한 회귀이면서
    대승불교의 파사현정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금강경이 설해질 당시
    수많은 수행자와 사상가, 종교가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심지어는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부파에서 조차
    고정된 ‘자아’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나’ ‘나의 것’ ‘내 생각’ ‘내 몸’
    ‘자아(atman)’ ‘중생(sattva)’ ‘영혼(jiva)’ ‘개아(pudgala)’
    등의 관념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나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며 집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확고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관념도
    내가 아니며, 본질이라고 할 수 없고,
    그러므로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일체 모든 관념과 모양 소견, 집착, 번뇌며
    온갖 상(相)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보고
    많은 분들이 의아해 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대한 해석은
    아마도 금강경이 설해진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상가, 종교가, 철학가며
    수많은 스님들에게 많은 의구심이 들게 했고,
    그 결과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많은 해석으로 분분하게 펼쳐져 왔습니다.

    물론 그 근본에 있어서의 내용이야
    모두가 아상을 타파하는 무아의 실천, 연기, 공의 실천으로써
    온전하게 전달되어 왔음은 다행한 일입니다.
    결국 다 다르게 해석될 수는 있지만
    근본에 있어서 그 내용의 변질은 없었다고 봅니다.

    이 네가지 상, 사상(四相)에 대해 온전히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금강경을 설하게 된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근본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당시의 육사외도라든가,
    브라흐만의 아트만 사상들을 논파하기 위해
    연기법과 공의 해석을 ‘무아’라는 점에 치중하여 설명하였음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
    즉 아트만이나 자아관념에 집착해 있던
    당시의 상황 때문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연기법과 공 무아 중도 등의 개념이
    모두 동일한 근본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무아라는 단어를
    수시로 채택하여 설법을 하셨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금강경을 설하는데 있어서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의 이해는 필수적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대승불교가 막 태동할 때
    많은 사상가며 불교 수행자들이
    ‘자아’ ‘중생’ ‘영혼’ ‘개아’ 등의 온갖 실체적인 관념에
    많이 집착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약간씩은 다른 의미일지라도
    모두 ‘실체적 자아’관념,
    다시 말해 ‘무언가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데 불과한 것으로,
    이 네가지 의미는 거의 동의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인데,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실체적 자아 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설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 하나 사상(四相)에 대하여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상황에 비춰 설명하기 위해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금강경의 산스크리트 원문을 알아보는 일입니다.

    구마라집 역의 한문 원전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순서로 나와 있지만,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그 순서가,
    아상, 중생상, 수자상, 인상의 순서로 등장하며,
    그 원문을 보면
    ‘atman(아상)', 'sattva(중생상)', 'jiva(수자상)', 'pudgala(인상)'
    라고 되어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도 다른 책의 설명을 보았을 때,
    순서가 바뀐 것은 한문으로 번역할 때의
    리듬과 운율을 맞추기 위해서 아와 인을 붙여 놓았을 뿐
    그리 중요한 의미는 없다고 보여집니다.

    여기에서는 구마라집 번역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번역 보다는
    산스크리트 원문과 현장의 번역을 참고하여
    새롭게 해석한 각묵스님의 [금강경 역해]에 나오는 사상의 해석인
    자아[아상, atman], 중생[중생상, sattva],
    영혼[수자상, jiva], 개아[인상, pudgala]라는 해석을 채택하여
    그 역사적 상황이 갖는 사상의 의미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산스크리트 원문을 살펴보면
    이 네 가지 상의 역사적 상황이 갖는 의미를
    유추해 보기가 좀 더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우선 첫째로 아상(我相)의 원문인 'atman'은
    인도 전통 종교인 브라흐만의 아트만 사상에 대한 부정입니다.
    이는 흡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아트만을 부정하기 위해
    무아(無我)법을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아트만이란 고정된 실체적 자아 관념으로
    브라흐만에서는 윤회의 주체라고 이해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는 고정된 실체적 자아관념,
    다시 말해 고정된 실체로써
    ‘나’를 상정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두 번째 ‘sattva'(중생상)는
    ’존재하는 모든 것‘ 혹은 ’살아있는 모든 것‘이란 의미로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모든 중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번째는 불교 내부적으로는 수행자들이
    중생과 보살이라는 이원론적인 분별심에 빠져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나는 살아있는 생명체로써 죽어있는 것들과는 다르다는
    이원론적인 분별심에 빠져있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위로는 깨달은 이와 견주면서
    난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는 상에 빠져
    보살과 중생을 나누고 분별하는 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고,
    아래로는 난 살아있는 생명체로써
    죽어있는 저 바위며 물 흙보다 우월하다는
    분별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말로써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jiva'(수자상)는
    ‘목숨’ ‘생명’이라는 말로써,
    자이나교에서 ‘생사를 초월해 있는 존재’ ‘순수영혼’이라는 의미로
    자이나교의 가르침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며,
    지바라는 생사를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한
    순수영혼이 실체로써 존재한다는 상에서 벗어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시간을 초월하고, 생사를 초월하는
    영원한 참생명이 있다는 상을 타파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 ‘pudgala'(인상)는
    ’개인‘ ’인간‘ 등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쓰이나,
    부파불교의 한 부파인 독자부(犢子部)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의미하는 말로
    유위법과 무위법의 중간자적 존재라고 상정하고 있으며,
    여기에서는 이러한 생사를 초월한 주체인
    뿌드갈라가 존재한다는 상을 가지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상에서처럼 자아, 중생, 영혼, 개아라는 말은
    모두가 고정된 실체적 존재로써의 '나‘를 상정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역설하고 있는 거의 동일한 개념,
    동일한 의도로 쓰여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본질에서는 궁극적으로 ’나‘라는 상에 빠져 있으면 안 된다는 말로써
    ‘나’라는 상이 일체 모든 존재의 상에 빠지는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나’라는 상이 근본이 되어
    일체 모든 상이 만들어 진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다’ ‘내것이다’ ‘내가 옳다’ 라고 하는 아상이 있음으로써
    나와 너를 둘로 나누는 분별도 있게 되고,
    인간과 자연을, 또 생사와 열반을, 중생과 보살을 나누는 분별들을 비롯한
    일체의 분별 망상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네 가지 상의 타파는 곧
    ‘나’라는 상을 깨버리는 수행을 의미하며
    이는 무아(無我)를 깨닫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근본불교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이 말씀하신
    제법무아의 이치를 깨닫는 의미와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연기(緣起)되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무아이고, 공(空)이라고 보았을 때,
    사상의 타파가 곧 연기법을 깨닫는 것이고,
    공성을 깨닫는 것으로 불법 수행의 요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부분의 설법이 불교의 핵심이며,
    금강경의 핵심이고, 정종분의 핵심이라고 앞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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