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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살의 발원
    金剛經 2011. 12. 9. 07:22

     

     

    대승정종분이라 대승의 바른 종지가 담겨 있으며,
    이 금강경의 핵심 요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이 분에서
    아마도 금강경을 공부하는 많은 수행자들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또 어떤 방법으로 마음을 닦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법문을 기대했을 터인데
    이러한 부처님의 답변이 한편 실망스러울수도 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질문과 좀 맞지 않는 답변이 아닌가 하고
    의문스레 생각되는 분이 있을 줄로 압니다.

    아마도 이 경전이 대승불교가 아닌 근본불교의 경전이었다면,
    또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 선녀인’
    들을 대상으로 설법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또 수보리를 위시하여 이미 부처가 되기 직전의 깨달음에 이르렀지만
    열반적정의 ‘저 언덕’으로 가버리지 않고
    '이 언덕‘에 남아 하화중생의 서원을 세우려는
    ’보살의 길로 들어선‘ 수행자들에게 행하는 설법이 아니었다면
    부처님의 답변은 분명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 우리들처럼 금강경을 공부하고자 마음을 내는,
    그러나 아직 깨닫지 못한 우리네 중생들을 대상으로 설법을 하셨다면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하여
    우리들 근기에 맞는 좀 더 자세한 설법을 들을 수 있었을른지 모릅니다.

    그러나 수보리의 질문의 핵심은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이들 이라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부처님께서 이미 수많은 설법을 하셨고,
    수많은 가르침과 실천 방법에 대하여 이미 많은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다만 이 경전에서는 대승의 종지,
    다시 말해 보리심을 발해 보살의 길로 들어선 대승불교의 수행자들에게
    대승의 종지, 보살의 종지를 말해주고자 하셨음을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보살의 공통된 서원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이지만,
    지금 질문하고 있는 수보리는 거의 깨달음을 이루신 분으로써
    상구보리를 원만하게 성취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다만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열반의 저 언덕으로 가기를 잠시 미루고
    이 언덕에서 하화중생의 발원을 실천하기 위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원력의 수행자를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따로이 상구보리를,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어떻게 수행해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하는지를 설법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다만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를 비롯하여
    ‘보리심을 발해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 선녀인’들이
    보살의 길을 온전하게 걷기 위해서는
    하화중생의 발심이 보살에게 있어서는
    생명과도 같이 중요한 것임을 당부하고 계신 것입니다.

    보살을 부처라 부르지 않고 보살이라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발심(發心)과 원력(願力)이 있기 때문임을
    다시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체 중생 제도의 서원이야 말로
    보살을 보살일 수 있게 해 주는 보살의 요건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대기설법인 것이지요.
    설법을 듣는 상대의 근기에 맞게,
    그 내면의 깊은 뜻을 온전히 헤아려 그 핵심을 바로 짚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 입장에서는 금강경의 핵심이라는 이 내용을 보고도
    그다지 깊은 신심을 일으키지 못한다거나,
    기대에 못 미치는 실망감을 안고 금강경을 덮어 버릴 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그렇게 속단하기는 아직 이릅니다.
    어차피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많은 경전은
    이와 같이 부처님과 어떤 특정한 제자들 사이에 이루어 졌던
    대기설법들을 모아 기록된 것입니다.

    내게 한 설법이 아니니 나중에 내가 보살의 길로 들어섰을 때,
    내가 수보리처럼 깨달음을 얻어 이 질문이 나의 질문이 될 때,
    그 때 금강경을 다실 열어 봐도 되지 않겠나
    하는 분별은 그냥 놓아버리시기 바랍니다.

    앞 장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금강경은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수행자들을 위한 설법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우리들 즉 보살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도
    훌륭하고 온전한 설법이 됩니다.
    경전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설법의 표현방식이 다를 수 있을 뿐이지
    궁극에서 그 내용은 온전한 진리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길로 올라가더라도 궁극에서는 정상에서 만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런 실망감을 조금이라도 느끼셨던 분이시라면
    이제부터 나오는 부처님의 설법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부분이 제 3분의 설법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진리를 향해 정진하고 수행하는 수행자들이,
    또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수행해야 하며, 살아야 하고 발원을 성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소중한 법문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실은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


    이 대목이 이 제 3분의 핵심이면서
    또한 금강경의 핵심이고,
    나아가 모든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말만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그 깊은 의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잘 관해볼 수 있어야
    부처님 말씀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부분이 불교의 핵심이라고 하는지 하나 하나 짚어 보도록 합시다.

    앞에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보살의 길로 들어선 이들에게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으로 일체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해야 한다고
    발원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이 방편법(方便法)을 말하는 것이라면
    지금 이 부분은 근본법(根本法)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 제도해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어느 한 중생도 제도되지 않았음을
    깊이 통찰하여 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말은 수없이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수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함축하여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말 속에서 무분별(無分別), 무아(無我), 연기(緣起),
    공(空), 중도(中道)의 이치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은 열반에 들지 못하고 수없이 많은
    번뇌와 괴로움, 불행 속에서 헤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환상이며 거짓이고, 신기루이며,
    꿈이고, 물거품과도 같은 것일 뿐,
    이 세상 그 어떤 이들도 본질적으로 괴롭지 않습니다.
    다만 꿈 속에서, 환상 속에서 헤매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다만 이것이 환상이고 신기루임을 꿈임을
    그저 알기만 하면(반야 지혜) 더 이상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일체 모든 존재는 이미 제도되어 있고,
    열반의 저 언덕에 이미 도착해 있는 것입니다.

    다만 환상과 같은 탐진치 삼독에 빠져 환상과 같은 괴로움에 허덕이며
    환상과 같은 열반을 찾아 헤매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중생들의 불행이 환상이기 때문에
    보살들의 구제 또한 환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중생들은 이미 구제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도,
    조금도 바꾸지 않고, 조금도 애쓰지 않고도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그대로 온전한 부처인 것입니다.
    끊임없는 힘겨운 수행을 통해서 언젠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대로 부처님을 올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또다시 분별을 일으켜
    누가 누구를 깨닫게 할 것도 없고, 구제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고,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우리가 바라던 니르바나의 ‘저 언덕’에 도착해 있는 것입니다.

    다만 모를 뿐입니다.
    무명(無明), 즉 어리석음으로 인해
    이 삶이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도 환상이요, ‘너’도 환상이며
    이 세상 우주 법계의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하고자 하는 말씀은
    보살이라 함은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하화중생의 발원을 가져야 하지만
    함이 없이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중생을 저 피안의 세계로 인도해야 하지만
    사실 그들은 중생이 아니며,
    이미 인도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어서도 안되고,
    거기에 집착해서도 안된다는 말입니다.

    보살인 내가 중생인 너희를 구제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허구에 불과하겠습니까.
    구제할 내가 있고 구제받을 대상이 있는 한 거기에 구제는 없습니다.
    내가 누구를 구제한다는 그 한생각도 다 놓고 가야 한다는 말씀이십니다.

    걸림 없이, 집착 없이 발원을 성취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며,
    발원의 성취라는 것 또한 성취가 아님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중생들이 느끼고 있는 불행과 괴로움이라는 것도 환상이지만,
    더 나아가 제도되어야 할 중생도 환상이며,
    제도해야 할 보살 또한 환상일 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고정된 ‘자아’가 아닙니다.
    제도해야 할 ‘중생’도 없고,
    제도 해야 할 ‘나’ 또한 모두 공(空)하고,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제도 하고 제도 받는 주체가 모두 공할진데
    공한 가운데 일어난 불행이며, 괴로움이라는 관념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큰 허구에 불과한 것입니까.
    ‘나’도 공이고 무아이며, 중생도 공이고 무아이며,
    중생의 괴로움도 공하고 보살의 구제 또한 공한 것일 뿐입니다.

    나와 남을 분별할 것도 없고,
    중생과 부처를, 생사와 열반을, 행과 불행을,
    제도 받는 이와 제도하는 이를 분별할 것도 없이
    이 세상은 본래부터 무분별이고 공이며 무아인 것입니다.

    그 어떤 한 쪽에도 치우치면 안되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극단은 있지 않은 법입니다.
    그렇기에 중도의 실천만이
    무분별과 공 무아를 체득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지요.
    다만, 이렇게 세상이 만들어지고 온갖 경계가 나타난 것은
    다만 공한 가운데 꿈처럼 인과 연이 서로
    화합하고 흩어지고를 반복할 뿐인 것입니다.

    인연화합의 법칙, 인과응보, 연기의 법칙에 의해
    다만 꿈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할 뿐이지요.
    그러니 무아라는 말, 공이라는 말, 중도라는 말은
    다시말해 연기법의 실상을 달리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정된 실체적인 존재가 아닌 연기되어진 존재, 인연화합의 존재이기 때문에
    공이고, 무아라고 말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이치, 진리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아(無我)’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도 없고, ‘남’도 없고,
    구제받을 사람도 없고, 구제시켜 줄 사람도 없으며,
    그렇기에 온갖 번뇌며, 속박, 무명 또한 모두 고정된 실체적 관념이 아니며,
    실제적 자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랬고, 대승불교가 출현할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은 ‘아트만’이라거나,
    ‘푸드갈라’ ‘지바’ ‘뿌루샤’ 등의 ‘자아개념’을 설정하여
    그것을 ‘영원불멸의 근본적인 존재, 생명자리’로써 이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브라흐만의 ‘아트만’ 사상에 갖혀 있는 많은 이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주기 위해 ‘무아설’ ‘제법무아’를 말씀하셨지만,
    수백년에 걸쳐 내려오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고정된 실체적 자아’를 상정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것은 온갖 부파와 사상가들 사이에서
    온갖 다른 이름을 가지고 등장하여 집착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통적인 아트만 사상을 무아로써 극복하셨던 것처럼,
    대승불교 출현 당시 즉 금강경이 설해질 당시의
    온갖 ‘자아’ 관념(푸드갈라, 지바, 뿌루샤, 아트만 등)들에 집착하고 있는
    수많은 사상가며 수행자들에게
    거기에서 벗어날 것을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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