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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상을 타파하라.
    金剛經 2011. 12. 13. 07:05

     

     

    첫째, 자아[아상, atman]라는 생각은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나’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일체 모든 분별과 고통과 번뇌
    그리고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는 근본의 어리석은 생각인 것입니다.

    아상으로 인해 일체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고,
    분별이 시작되고, 집착과 애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불교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아상을 타파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상의 타파는 중요한 불교 수행의 요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상의 타파가 바로 무아(無我)의 실천이고,
    무아란 그대로 연기, 공, 중도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아상의 타파야말로
    연기법의 실천, 중도의 실천, 공의 실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금 더 아상에 대해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상은 좀 더 세부적으로
    ‘나다’ ‘내것이다’ ‘내가옳다’ ‘참나가 있다’
    고 하는 등의 분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나다’하는 것은
    이 몸뚱이와 이 마음이며 생각이 나라고 착각하는 분별입니다.
    몸뚱이는 이 우주법계의 지수화풍의 요소들이
    인연따라 잠시 내 몸의 지수화풍으로 화했을 뿐
    고정된 실체로써 이 몸이 영원불멸의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몸은 과거 10년 전 내 몸과
    물질적인 세포로만 보았을 때 전혀 다른 물질에 불과합니다.

    몸이란 것은 신구의(身口意)로 지은 업(業)에 따라
    이 우주 법계의 지수화풍의 요소들이
    잠시 이 몸뚱이로써 인연화합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흐르면 이 몸은 없어질 터인데
    고작 이것을 가지고 ‘나’라고 이름짓겠습니까?
    결국 이 몸이 ‘나’인 것은 아닙니다.

    또한 마음이나 생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 성격’이며, ‘내 생각’ ‘특기’ ‘적성’ ‘IQ'를 가지고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생각이란 것도 인연따라, 상황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며,
    성격이나 특기, 적성이라는 것도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지
    ‘내 성격’ '내 마음‘하고 딱 정해진 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내것이다’하는 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일체 모든 소유물을 내것이라고 착각하는 분별입니다.
    ‘나다’ 하는 아상으로 인해 ‘내것’이라는 소유욕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소유라는 관념은 엄청난 착각에 불과합니다.
    소유의 주체인 ‘나’가 공하고, 무아일진데
    어찌 소유의 관념이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하나라도 있다면 ‘내 것’이라고 해도 되겠지만,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영원히 내 것이라고 할 것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잠시 인연따라 나에게로 와서 쓰여졌다가 인연이 다하면 다시 흩어질 뿐인데,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분별하여
    ‘내 것’이 되었다가 ‘남의 것’이 되었다고 분별함으로써 괴로워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이 우주 법계의 일체 모든 것들은
    제 스스로 정확히 제 자리에 언제나 그렇게 있을 뿐입니다.
    누가 누구의 주인도 아니고, 누가 누구의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이 되었다가 누구의 것으로 옮겨가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법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저 늘 있어야 할 자리에
    인연따라 정확하게 있을 뿐인 것을
    사람들은 어리석은 아상으로 인해 ‘내 것’이라고 하며
    쌓고 집착하는데 여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아가면서 ‘내 것’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내 것’은 어디에도 없어요.
    애써 표현한다면 내 것이기도 하며 전체의 것이기도 한,
    오직 우주 법계의 것이 있을 뿐이고, 무분별의 부처만 있을 뿐인 것이지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아상은
    정신적인 것에서도 여실히 나타납니다.
    ‘내가옳다’고 하는 생각, 내 가치관이 옳다라고 여기는
    어리석은 분별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마도 오직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내 생각’이라고, ‘내 가치관이며 세계관’이라고 생각하는
    일체 모든 견해들은 모두가 다른 사람 것들의 조합일 뿐입니다.
    배운 것이거나, 보고 들은 것이거나, 책에서 읽은 것이거나,
    그도 아니면 그 좁은 경험으로써 몇 번 체험했던 것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들을, 수도 없이 듣고 배운 것들을
    내 식대로 조합하고 짜맞춘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 놓고 그것을 ‘내 생각’이라고 고정짓고,
    그것만이 옳은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내 안에서 순수한 ‘내 생각’을 찾아 보세요.
    그 어떤 견해도 순수하게 내 생각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 어떤 생각도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고 분별할 수는 없습니다.
    옳고 그르다는 것, 맞고 틀리다는 것도
    사실은 우리가 만들어 낸 상대세계에서의 분별일 뿐이지
    우주 법계는 그저 그대로 여여하게 흐를 뿐,
    어디에도 맞고 틀리는 것이 없이 그저 절대적으로 항상 옳을 뿐입니다.

    맞고 틀림을 나누어 놓고 그 중에 맞는 것을 택하는 맞음이 아닌
    그저 아무런 분별도 붙이지 않은 절대선이며,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란 말이지요.
    ‘내가 옳다’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 줄 모릅니다.

    이상에서처럼 우리 안에서 ‘나’와 ‘상대’를 나누는
    일체 모든 분별에서 온전히 벗어나야
    그 때 나도 없고 상대도 없는, 내것도 없고 상대의 것도 없는,
    내가 옳고 그를 것도 없는 무분별의 절대 깨달음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상은 아상인 줄 알고,
    타파해야 한다고 열열히 설파를 하면서도
    막상 그 위에 ‘참나’를 세우고, ‘아트만’을 세우고, ‘자성불’을 세우면서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실체적 존재로써의 ‘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부처님께서 자아, 중생, 영혼, 개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라는 단어들을 쓰시면서,
    또 금강경의 현장 번역을 보면 사상 뿐 아닌
    아홉가지의 상을 열거 하면서 까지 아상을 타파할 것을 말씀하시는 데는
    그 안에 그 어떤 절대적인 ‘나’도 상정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상(四相)뿐 아니라
    현장이 말하고 있는 아홉가지의 상 또한
    모두 여러 가지 단어로써 절대적인 존재를 가설하는 것을
    정형화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궁극적인 존재를 상정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그것이 바로 아상의 극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즈음에 이르면 많은 분들께서 깊은 수렁에 빠질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부처가 되려고 수행하는 것이고,
    자성불을 찾고, 참나, 진아(眞我), 본래면목, 일심, 한마음,
    자성청정심을 찾으려고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는 것인데,
    그것이 모두 아상에 불과하다고 하니
    이 즈음에 이르러서는 금강경의 철저한 아상타파의 정신에
    잠시 혼란스러움을 경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혼란스러움을 잠시 비워두고
    부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지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고 있는 ‘참나’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보통 우리가 참나를 말할 때,
    그 참나는 참나가 아니라 참나라는 말일 뿐이고,
    생각일 뿐이고, 참나라는 개념의 인식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선지식 스님들께서 참나를 찾으라고,
    자성불을, 본래면목을 보아야 한다고 방편설법을 하시지만,
    많은 제자들은 ‘도대체 참나가 무엇일까’ 하고
    참나에 대하여 생각하고, 분별하고, 인식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참나는 생각되어질 수 없고, 말로 표현되어질 수 없으며,
    우리가 인식할 수도 없는 언어 그 너머에 있고, 생각 그 너머에 있으며,
    우리의 인식과 분별의 그 너머에 있을 뿐입니다.
    행여 ‘생각 그 너머에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나’를
    말로 표현했다고 했을 때 조차
    그것은 그렇다고 말로 표현되어지고 있을 뿐이지
    그것은 여전히 참나가 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생각과 인식, 말을 초월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일어날 뿐인 것이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들 중생들의 마음에서는
    무언가 표현을 하길 바라고, 논의 되길 바라고, 설하여 지길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자리는 표현할 수도 없고,
    논의의 대상도 아니며,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대한 그 어떤 상도 내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즈음에서는 ‘참나’라고 방편으로 세워 놓은 그 방편까지도
    오직 일미(一味)의 진리로써 거두어 들이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속제와 제일의제(第一義諦)라는 말이
    대승불교 경전이 나온 이후에 논사들에게 설파되고 있는 점도
    이러한 점, 이렇듯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그 자리에 대한
    또다른 표현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부처님께서 이 즈음에서는 그동안 방편으로,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자성불을 찾아야 하고,
    본래 면목을 보아야 한다고 하셨던 그 말 또한
    단지 말일 뿐 참진리의 당처에서는 한참 멀어져 있는 것임을
    진리의 말 아닌 말로써 표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참진리의 자리를
    도무지 표현할 수 없다 보니
    유마경에서는 ‘침묵’으로써 말씀을 하게 된 것이고,
    역대의 조사스님들께서는 사량분별이 끊어진 말아닌 말
    즉, ‘화두’로써 그 의미를 설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쉽게 쓰는 말
    ‘참나’니, ‘자성불’이니, ‘본래면목’이니, ‘한마음’이니 하는
    이 모든 것들 또한 하나의 진리를 표현하는 ‘말’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당처인 것은 아니니,
    그러한 말에도 걸려서는 안되며,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래도 방편일 뿐이지만 자성불이 있긴 있는게 맞지요?’
    하고 질문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그것마저도 다 놓아버려야 한다는 준엄한 법문을
    지금 금강경에서는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아상에 대한 타파의 법문이 금강경의 전체에 깔려 있으며,
    아상의 다른 표현으로써 중생상, 수자상, 인상,
    즉 중생, 영혼, 개아라는 사상(四相)도 설정이 되게 된 것임을 이해하면서
    다음의 중생, 영혼, 개아에 대해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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