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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상 중생상 수자상
    金剛經 2011. 12. 14. 06:45

     

    중생[중생상, sattva]
    앞서 설명했듯이 중생이라는 의미는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모든 존재’를 의미하는 말로,
    깨달은이와 깨닫지 못한 중생을 분별하는 착각이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존재와 죽어있는 존재를 분별하는 착각을 의미합니다.

    중생상도 그 근원에서는
    ‘나’라는 아상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주체인 ‘나’라는 상을 상정해 놓기 때문에,
    ‘내가 깨달아야 한다’거나 ‘나는 아직 못 깨달았다’거나,
    혹은 ‘나는 깨달았다’라는 상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수행자들을 보면
    바로 이 중생상에 빠져 있는 모습을 이따금씩 만나게 됩니다.
    첫째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는데
    내가 과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서부터
    깨달음이란 내 문제가 아니라
    큰스님들이나 수행 잘하시는 분들의 얘기라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큰스님 따로, 중생 따로,
    빨리 깨달을 사람 따로, 깨달을 가망성이 없는 사람 따로
    이렇게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우리들 분별심일 뿐이지
    법계에서는 너와 내가 구분이 없을 뿐더러,
    큰스님과 작은 스님, 상근기 하근기 하는 분별이 없습니다.

    순간 순간 부처일 뿐이고,
    순간 순간이 온전한 모습일 뿐입니다.
    그러니 수행 안 된다고 탓할 것도 없고,
    빨리 깨닫지 못했다고 걱정할 것도 없으며,
    깨닫기 위해 조급한 마음을 가질 것도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앞의 모습이
    ‘난 깨달을 수 없어’ 하는 중생상에 갖혀있는 모습이라면,
    소위 수행 잘 한다는 사람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중생상이
    바로 ‘난 수행 잘한다’ ‘난 깨달았다’ 하는 생각입니다.

    ‘나는 깨달았다’ 하는 말이
    어디 성립이나 될 수 있는 말입니까?
    깨달았는데 거기에 내가 어떻게 붙을 것이며,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이의 분별이 또 어디 붙을 것입니까.

    깨달았다는 것은
    그냥 그렇게 여여하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온전한 ‘나 자신’이 된다는 말이지,
    무슨 초인이 된다거나, 초능력 혹은 신통력이 생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즈음 수행자들을 보면
    이따금씩 ‘수행자병’에 걸려 있다거나,
    ‘깨달음병’에 걸려 있는 것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내가 깨달았다’ 한다면
    그것 또한 중생상에 갖혀 있는 모습으로,
    아직까지 무량광 무량수 무한생명으로 훤하게 뚫려있지 못하단 말입니다.

    중생과 부처라는 것도 착각일 뿐,
    깨달은 각자(覺者)의 눈에는 일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부처의 현현일 뿐,
    깨달은 것도 없고 깨닫지 못한 것도 없으며,
    생명있는 것도 없고 생명 없는 것 또한 없을 뿐입니다.

    오직 아무런 분별도 짓지 않은
    텅 빈 자리에서 홀연히 여여하게 존재할 뿐입니다.
    ‘나’라는 생각, 아상이 타파되면
    중생상도 자연스럽게 타파될 수 밖에 없는 상인 것입니다.

    영혼[수자상, jiva]
    목숨과 생명에 대해 집착하여
    생사를 초월하는 그 어떤 영혼이나 지바가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사를 초월하고자 하고,
    목숨과 생명이 끊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나’라는 것이 있다는 착각,
    아상에서 시작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가 있으니 내가 조금 더 오래 살고 싶고,
    생사를 뛰어 넘고 싶고,
    그 어떤 불생불멸의 초월적인 내재적 존재[영혼, 지바]를 꿈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없는 무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고 죽음도 있을 수 없고,
    목숨의 길고 짧음 또한 꿈이며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벌써 아상인 것입니다.
    오래 살겠다는 그 생각의 이면에는
    나고 죽는 이 ‘나’의 틀을 벗어나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근원적인 자아
    불생불멸의 무한한 자아를 꿈꾸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불생불멸의 영원한 자아를
    영혼 혹은 지바라고 이름 붙여 놓고
    그 상[수자상]에 빠지는 것입니다.
    앞서 아상에서 설명했듯이
    초월적인 자아를 상정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아상의 연장인 것입니다.

    네 번째는 개아[인상, pudgala]라는 생각으로,
    이것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윤회의 주체로서의 그 어떤 실체,
    뿌드갈라가 존재하여 나고 죽음을 영원히 반복하더라도
    이 실체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후대 유식사상에서의 아뢰야식과도 비슷한 개념이라고 하겠는데,
    아뢰야식은 윤회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연속성은 있더라도 실체적 개념은 아니며,
    아뢰야식 또한 무아(無我)라고 하는 반면에
    당시 부파불교의 독자부에서는
    윤회의 주체로써 생사를 초월한 주체인 뿌드갈라를 상정하였으므로
    그것에 대한 타파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보통의 해석에서는 개아(인상)를
    나와 상대를 갈라놓는 분별심에 대한 타파,
    혹은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에 대한 타파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뿌드갈라의 어의(語義)가
    ‘개인’ 혹은 ‘인간’을 의미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가능했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어쨌든 개아라는 생각 또한
    결국에는 ‘나’라는 상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생사를 윤회하는 주체로서의 ‘개아’를 상정하는 것 또한
    앞서 자아의 설명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결국에 타파되어야 할 것임이 분명하고,
    나와 상대에 대한, 혹은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에 대한 분별로 보더라도
    이것은 ‘나’라는 상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아상의 연장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상에서처럼 부처님께서는
    일체 모든 ‘나’라는 상에 대해 철저하게 타파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나’라는 상이 근본이 되어, 일체의 모든 상이 생겨나기 때문에,
    나라는 상을 타파하면 동시에
    ‘나 아닌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분별 또한 여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3분에 대한 설명이 많이 길어졌는데,
    그 이유는 앞서 말한대로
    제 3분이야말로 금강경의 본문이 정종분 중의 정종분이며,
    불교의 핵심이며 금강경의 핵심 사상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러하였으며,
    앞으로 진행될 금강경 공부에서
    이 부분의 내용들이 여러번 반복되고 다른 표현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을 약하고 전체적인 설명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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