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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계에 머물지 말라
    金剛經 2011. 12. 16. 06:39

     

     

    이른바 색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할 것이며,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한다.

    앞에서 보살은 마땅히 경계(境界)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여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경계라는 말을 구마라집은 법(法)이라고 번역을 하셨고,
    현장스님은 사(事)라고 번역을 하셨는데,
    이는 공히 경계를 의미하는 말로써, 여기 경전의 내용에서처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경(六境) 혹은 육진(六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육경이란 육근(六根)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육근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즉 눈귀코혀몸뜻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육근은 우리 몸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며,
    육경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의 대상으로,
    눈(眼根)으로 보여지는 대상인 모양과 빛깔을 색경(色境)이라 하고,
    귀(耳根)로 들리는 대상인 소리를 성경(聲境),
    코(鼻根)의 대상인 냄새를 향경(香境),
    혀(舌根)의 대상인 맛을 미경(味境),
    몸(身根)의 대상인 감촉을 촉경(觸境),
    뜻(意根)의 대상인 온갖 생각을 법경(法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외부의 세계와 접촉할 때는
    오직 이 여섯가지 주관적 기관이
    여섯가지 객관적 세계를 접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 공부를 하다 보면 경계라는 말을 많이 접하게 되는데
    넓은 의미로 우리가 눈귀코혀몸뜻으로 접촉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경계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육근과 육경이 접촉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 두 가지가 모두 공한 것으로,
    잠시 인연따라 기관이 생겨난 것이며,
    또한 인연따라 경계가 생겨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눈귀코혀몸뜻은 항상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잠시 인연따라 나툰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생이 끝나갈 때
    우리의 감각기관인 육근 또한 함께 소멸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00년도 안 되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잠시 이 몸뚱이를 받아 이 세상에 왔다가
    몸뚱이 유효기간이 다 되면 곧 법계로 흩어질 뿐,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눈은 우리가 죽고 나면 곧 사라질 뿐,
    본다는 기능도 사라지고, 눈 그 자체도 사라지는 것이며
    귀코혀몸뜻 또한 마찬가지로 공한 것입니다.
    또한 육근의 대상인 육경 또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고 항상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눈에 보여지는 것이든, 귀로 들려지는 것이든,
    코로 냄새맡아 지는 것이든, 혀로 맛보는 것이든,
    몸으로 감촉이 느껴지는 것이든, 뜻으로 헤어려 지는 것이든
    언제까지고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육근도 육경도 모두 제행무상이며, 제법무아이고, 공한 것이며,
    다만 인연 가합으로 인해 신기루처럼, 꿈처럼, 환영처럼
    잠시 생겼다가 사라질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에서는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색성향미촉법이 항상하고 영원불멸하는 고정된 실체성이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육경에 머물러 보시해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공한 것이며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를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색에 머물러 보시를 한다는 것은,
    보시하는 나와 보시받는 대상 그리고 보시하는 물건을
    눈으로 분별하면서 보시를 한다는 말인데,
    쉽게 말해, 우리 눈으로 보여지는 형상에 집착하여 보시를 하는 것으로,

    잘 생긴 사람, 못 생긴 사람,
    착하게 보이는 사람, 착하지 않게 보이는 사람,
    가난해 보이는 사람,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 등을 분별해서
    그 모양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보시하고
    어떤 이에게는 보시를 하지 않는다거나,
    어떤 이에게는 많이 보시하고, 어떤 이에게는 적게 보시를 한다거나,
    이 사람에게는 이만큼 보시하면 큰 보상이 따르겠다거나,
    이 사람에게는 아무리 보시를 해도 덕 보는 것이 없겠다거나
    하는 등의 분별을 지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소리에 머물러 보시를 한다고 하면,
    나를 칭찬하는 사람, 비난하는 사람,
    혹은 말이 거친 사람, 말이 싹싹하고 부드러운 사람 등을 분별하여
    그에 따라 보시의 유무와 많고 적음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보여지는데 얽매여 분별을 하고 집착을 하며,
    들려지는데, 냄새맡아지는데, 맛보아지는데, 감촉되어지는데,
    또한 각종의 생각의 대상에 얽매여 분별을 하고 집착을 합니다.
    그렇듯 육경에 얽매이는 마음으로 보시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 묘행무주분에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과 소리 냄새 맛 감촉과
    온갖 생각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즉 일체가 공한 마음으로,
    경계에 따라 분별되어지고, 계산되어지는 마음으로
    보시를 할 것이 아니라
    텅 빈 마음으로 보시를 실천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육근이든 육경이든
    어디에 마음을 머물것이며,
    무엇에 집착을 할 수 있겠습니까.

    육경이라는 모든 대상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집착할 만한 것,
    마음을 머무를 만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근과 육경을 구분하고,
    나와 남을 구분하며 오랜 아상을 키워가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육근이 있고, 육경이 있으며
    육근과 육경이 접촉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거기에서 인간의 근본 무지인 아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육근도 공했고, 육경도 공했을진데
    공한 것과 공한 것이 마주하여 접촉한들 무엇이 더 생겨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육근과 육경을 실체화 시켜 놓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집착하게 되니
    그때부터 아상이 생겨나고 온갖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경계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하라는 말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상에 머물러 보시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아상으로 보시하지 말라는 말인 것입니다.
    즉 ‘내가 한다’, ‘내가 보시한다’는
    생각으로 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한다’는 생각을
    다 놓아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삼륜이 청정해야 참된 보시가 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삼륜이란 시륜과 수륜, 물륜으로
    베푸는 자, 받는 자, 주고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한다는 말은
    이 세가지가 모두 공했음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보시하는 나도 공했고, 보시를 받는 상대도 공하며,
    보시하고 받는 것 또한 모두 공한 것이거늘,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한다는 생각이 어디에 가서 붙을 것입니까.

    주고도 준 것이 없고, 받고도 받은 것이 없으며,
    주고 받은 물건 또한 공했을 때
    바로 묘행무주가 실천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함이 없는 보시행,
    머무는 바 없는 보시행
    그것이 바로 무주의 묘행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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