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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을 놓았을 때 복이 무량하다.
    金剛經 2011. 12. 18. 06:16

     

    [“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마음에 ‘내가 보시했다’고 하는 아상을 전제로 보시를 했다면,
    그것은 거래이고, 장사는 될 지언정 복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보시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상에 머무는 보시를 하면
    ‘난 참 장한 일을 했다’거나,
    ‘내가 보시했으니 많은 칭찬과 존경을 받겠지’라거나,
    ‘이만큼 했으니 돌아오는 것이 있겠지’라거나,
    ‘이렇게 보시를 했으니 상대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없더라도
    내 안에 많은 복이 지어지겠지’라거나 하는 등의
    수많은 관념과 바라는 마음이 따라 붙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렇듯 바라는 마음으로 주었다면
    그것을 어찌 보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었으니 받아야 한다는 바라는 마음이 전제되는 순간
    그것은 장삿속이나 거래는 될 지언정 참된 베풂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런 바라는 바 없이, 아무런 분별 없이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마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을 때,
    그 때 비로소 보시는 무주상보시가 되어
    보시바라밀로 승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었으니 받겠지 하는 바라는 마음이 전제되고,
    상에 머물러 보시를 하게 된다면
    물론 인연법에 따라 준 만큼은 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복이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고도 준 바가 없이 함이 없는 보시를 했을 때,
    그 보시의 공덕은 도무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입니다.

    무주상보시의 복덕을 가르켜 무량대복(無量大福)이라고 합니다.
    다시말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을
    무량대복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무량대복이란
    말 그대로 복이 도무지 셀 수 없을 만큼 크다는 뜻입니다.
    복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셀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너무 커서 크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 온 우주 법계 전체를 다 소유하고 있는 복을 말합니다.
    다 소유하고 있지만
    어느 하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무소유가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란 말처럼
    하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체를 소유하고 있는,
    즉 정해져 있지 않고 셀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전체가 되어버린 무량의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복이 많아야 돈도 많이 벌고,
    사업도 잘 되고, 배고프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에 머무는 보시,
    바라는 바가 있는 보시를 많이 했을 때
    받을 수 있는 결과인 유루복(有漏福)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행하는 복이 대부분 유루의 복입니다.
    유루의 복을 지으니 받는 결과도
    유루의 결과만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고,
    바라는 바 없는 보시를 행하는 과보는
    유루의 복이 아닌 무루(無漏)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무루복이란 앞서 말한 무량대복을 의미합니다.

    무량대복을 소유하면 가진 것 하나도 없이
    온 우주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며,
    거지가 되어 들판을 거닐고 있을 때라도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량대복을 소유하고 있으면
    마음 하나 일으켜 그 무엇이라도 다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도무지 복의 양을 셀 수 없으려면
    온 우주 법계와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대로 법계가 되고 그대로 부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허공과도 같이 툭 트여
    그 무엇이든 다 담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적인 설법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실천적인 가르침인 것입니다.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행하면 누구든지
    이런 무량대복, 무루복이 주어집니다.

    무량대복을 가진 수행자는
    아무것도 없이 거지처럼 살더라도 필요에 의해 한마음 일으키면
    이 법계에서 무엇이든 만들어 줍니다.

    그러니 따로이 저축할 필요도 없고,
    미래를 계획할 필요도 없고,
    날마다, 아니 매 순간 순간 평화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소유의 관념에 얽매여 내 것을 늘리려고 애쓸 것도 없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한마음 일으켜
    법계의 모든 것을 다 가져다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많이 보시하면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이란 생각 때문에
    선뜻 보시를 실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상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면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온 우주를 소유함 없이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는
    법문의 참뜻인 것입니다.

    온 우주 법계가 그대로 내 것이고, 나와 다르지 않은 것이니,
    따로이 ‘내 것’ ‘네 것’을 나눌 것도 없이
    내가 곧 전체이고, 내가 곧 우주이며,
    나와 남을 나눌 수 없는 전체로서의 하나,
    한마음 참 부처를 이루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툭 트여 한없이 자유로운 법계에
    한생각 잘못 일으켜 ‘내 것’을 나누고, ‘내 것이 아닌 것’을 나누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내 것’으로 편입시키려고 할 때,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할 때,
    즉 아상이 생겨나는 순간 우리 안에 충만하게 존재하던 무량대복은
    한순간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날마다 베푸는 삶을 실천할 일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뭐 줄 것 없을까’ 하고 고민할 일입니다.
    계산하고 따져 가면서 적당히 보시할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필요에 의한 보시라면 아무런 계산도 하지 말고 다 베풀 일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참으로 진실한 법문 한 가지
    꼭 가슴에 새겨 실천할 일입니다.
    베푼다고 절대 가난해 지지도 않고,
    많이 베푼다고 절대 못 살지 않으며,
    오히려 필요에 의해 베풀어야 할 인연처가 생기면 턱 저질러 베풀었을 때,
    그 마음에 바로 무량대복이 생겨 온 우주법계 전체가 내것이 되는 것입니다.

    ‘내 것’과 ‘내 것 아닌 것’의 경계가 사라져
    전체로서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대복이 생겨나면 언제든
    ‘욕심’이 아닌 ‘필요’에 의해 한마음 일으켰을 때
    법계에서는 얼마든지 그것을 가져다 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청정한 수행자들은
    한마음 내어 무엇이든 자유자재로 법계를 굴려 쓰고,
    법계에서 필요한 무엇이든 가져다 쓸 수 있으며,
    참으로 법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맑고 청정한 도량, 청정한 수행자가 사는 곳은
    그래서 ‘원만구족’한 것입니다.
    소유한 것이 많아서 원만구족이 아니고,
    소유한 것은 하나도 없더라도
    필요에 의해 가져다 쓸 수 있는 무량대복이 언제나 충만하기 때문에
    원만구족인 것입니다.

    절에 쌀이 다 떨어져 없을 때 즈음이면
    어디서든 쌀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나타나게 마련이고,
    돈이 필요하면 또 어디서든 돈이 생겨나며,
    사람이 필요하면 무량대복이 사람의 인연으로 화하여 주게 마련인 것입니다.

    어때요?
    수행자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법계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굴리고
    자유자재하게 쓸 수 있어야 대장부 수행자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비단 스님들만의
    또 치열하게 정진하는 수행자들만의 혜택이 아닙니다.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는 그 어떤 사람도 당연스레 누릴 수 있는
    법계의 선물이며, 이치이고 진리인 것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 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허공의 비유를 들어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의 공덕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허공이야말로 툭 트여 도무지 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으며
    우리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 또한 헤아릴 수 없다고
    다시한번 비유로써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쉽게 들어 본 말이 사방(四方), 팔방(八方)일 터인데,
    경전에서는 허공을 사방 팔방이 아닌 십방(十方)으로 이야기 합니다.
    보통 사방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방위인 동서남북(東西南北)을 의미하고,
    팔방이라고 하면 여기 사방에다가 사방의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간위인
    동북, 동남, 서남, 서북을 더한 것으로,
    경전에서의 사유(四維)가 바로 이 네 가지 간위를 뜻합니다.

    여기에 상하(上下)를 더하여 10방위가 되는 것입니다.
    보통 경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방세계(十方世界)가 바로
    이렇게 10가지의 방위를 말하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끝없이 넓어 셀 수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허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방세계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무주상보시의 복덕 또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음을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누차 무주상보시의 복덕이
    크고 원만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설법을 접하고 나면 누구나
    무주상보시를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 이면에는 벌써
    무주상보시를 해야만 무량대복을 얻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깔려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마음 조차 잘 관하여 놓아버렸을 때
    참된 보시의 복덕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무주상보시를 실천할 때는
    복덕이라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야 합니다.
    복덕이라는 말 자체도 필요없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그저 보시 그 자체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지
    벌써 여기에 ‘복덕’이라는 말이 전제되고 나면
    누구든 복덕을 위해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려고 애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시한다는 말도 필요 없고,
    그저 필요한 것이 필요한 곳에 놓여진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어차피 이 우주 법계는
    정확하게 필요한 일이 필요한 순간에 벌어지고 있으며,
    필요한 것이 정확히 필요한 자리에 놓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인연의 인다라망은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원만하게 펼쳐지는 법계에
    공연히 한생각 분별심을 일으켜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만 다 놓아버리면
    ‘보시’도 없고, ‘복덕’도 없고,
    주는 ‘나’도 없고, 받는 ‘너’도 없으며,
    주고 받는 ‘물건’도 없고,
    오직 부처님의 성품이 이 법계에 여여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며,
    다만 인연따라 부처님이 가지가지 모습과 행으로써 나투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 한생각도 분별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방편으로써 복덕을 이야기 하고,
    무주상보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무주상보시를 하고서도
    이것이 복덕이라고 생각하면 벌써 복덕을 잃을 것이고,
    복덕이라는 생각 조차 놓아버렸을 때 그 복덕은 실로 무량할 것입니다.

    이것은 흡사, 일체 모든 집착을 놓아버려야 오히려 얻을 것이고,
    얻고자 하면 도리어 얻지 못하는 이치와 같으며,
    무소유 했을 때 전체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고,
    소유하고자 하면 도리어 소유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면
    벌써 깨달음은 저만치 달아날 것이지만,
    깨달음 조차 놓아버리고 나면 벌써 깨달음과 하나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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