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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心, citta)
    #佛敎 2011. 12. 13. 06:55

     

    마음(心, citta)

     

    마음을 설명하는 몇 가지 경전말씀
    (1)숲을 돌아다니는 원숭이에 대한 비유

    『원숭이가 숲에서 돌아다니면서 이 나뭇가지를 잡았다가는 놓아버리고 다른 나뭇가지를 잡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심(心)]이라고도 하고, 마노[의(意)]라고도 하고, 알음알이[식(識)]라고도 부르는 이것은 낮이건 밤이건 생길 때 다르고 소멸할 때 다르다. <(S12:61)>』 :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계속 바꿔 잡으며 돌아다니듯이 마음도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코에 냄새 맡아지는 것, 혀에 맛보아지는 것, 몸에 감촉되는 것,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계속 바꿔 잡으며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2)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의 비유

    『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가 몸부림치듯이 마음도 또한 그렇다. 마라의 왕국에서 벗어나려고 수행 대상에 집중하면 마음은 싫어하며 몸부림친다. <법구경 34번 게송>』 : 마음은 원숭이처럼 대상을 계속 바꿔 잡는데, 물 밖에 던져진 물고기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처럼, 한 순간도 하나의 대상에 머물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과 다른 어떤 단 하나의 법도 이렇듯 빨리 변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그 비유를 드는 것조차 쉽지 않다. <(A1:5:8>』
    (3)앞서 가는 마음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서가고 마음이 이끌어가고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괴로움이 저절로 따르리라. 수레바퀴가 황소발굽을 따르듯이. <법구경 1번 게송>』
    (4)잘못 지향된 마음

    『적이 적을 대하고 원적이 원적을 대하는 것보다 잘못 지향된 마음이 자신을 대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 <우다나 4.메기야의 품 4-3 소치는 사람의 경>』
    (5)본자청정 객진번뇌(本自淸淨 客塵煩惱)

    『이 마음은 빛난다. 그러나 그 마음은 객으로 온 오염원들에 의해 오염되었다. <A1:5:9>』 『이 마음은 빛난다. 그 마음은 객으로 온 오염원들로부터 벗어났다. <A1:5:10>』
    (6)위빳사나의 지혜

    『그가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에 들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活潑潑)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지(知)와 견(見)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압니다. "나의 이 몸은 물질로 된 것이고,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로 이루어진 것이며, 부모에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되었으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의 이 알음알이는 여기에 의지하고 여기에 묶여 있다.'라고. <사문과경(D2)>』

    빠알리 주석서의 설명 

    빠알리 주석서들은 전통적으로 찟따(citta 마음)를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정의합니다.

    (1) 행위자의 측면 - '대상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
    (2) 도구의 측면 - '이것으로 인해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
    (3) 행위의 측면 - '단지 알고 있는 그 자체가 마음이다'


    마음은 알아차리는 행위를 떠나서는 그 자신 안에 실제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는 행위자도 아니요 도구도 아닙니다. 행위자나 도구라는 표현으로 마음을 정의하는 것은 영원한 자아(attā, Sk. atman)가 바로 '알아차리는 행위자나 도구'라는 힌두적 견해를 논박하기 위해서입니다. 불교 논사들은 이런 정의로써 자아가 알아차리는 행위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마음 혹은 알음알이가 그렇게 할 뿐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알음알이란 단지 아는 행위일 뿐이고 그 행위는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필히 무상한 것입니다.


    여러 논서와 주석서에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행위'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위바위니 띠까』는 『담마 상가니』를 인용하여 마음을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대상이 없이는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빠라맛타디빠니 띠까』에서도 "아는 작용은 항상 대상을 기대한다. 그것은 대상이 없이는 얻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찟따란 '대상을 앎'이다. 단지 대상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을 찟따(citta)라고 합니다.


    심(心) 의(意) 식(識)
    물질은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대상인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색(色)은 자체로서 물질 전체를 말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제일 앞에 있는 까닭에 대표성이 부여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운나바 바라문 경>에서 sati는 전방에 의(意)가 있고 후방에 해탈이 있습니다. sati는 전방관계로서 의(意)에 대한 관찰기능과 후방관계로서 해탈-열반으로의 지향기능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후방 관계로 sati를 파악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상을 향하여 손 뻗어 잡는 측면(숲을 돌아다니는 원숭이의 비유)와, 붙잡은 대상이 무언지 아는 상태 즉 '앎' 그리고 대상을 인지하는 감각기능으로서의 측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감각기능인 (意, 마노, mano)가 전방으로는 대상을 향한 손 뻗음, 후방으로는 대상에 대해 생겨난 앎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때 전방관계를 (心, 마음, citta), 후방관계를 (識, 앎, viññāṇa)이라고 이해하면 올바를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의(意)가 대상을 향하는 전방관계를 심(心)이라 하고, 그 결과 생겨난 앎인 후방관계를 식(識)이라고 하였을 뿐이니, 심과 의와 식이 별개의 존재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에 대해 이름 붙이는 용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심(心)]이라고도 하고, 마노[의(意)]라고도 하고, 알음알이[식(識)]라고도 부르는 이것」이라는 경설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마치 sati가 전·후방 관계를 가지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또한, 세 가지로 불리는 마음 중에서 대상을 향해 가장 전방에 나와 있는 심으로 (마치 색성향미촉을 색으로 대표하듯이) 심의식을 대표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일상에서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심의식'의 심을 말하기도 하고, 심의식 전체를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가는 마음'이나 '잘못 지향된 마음'은 심을 의미할 것이고, '본자청정 객진번뇌'의 마음은 심의식 전체(결국은 하나)를 의미한다고 할 것입니다.

    마음은 두 번 대상과 만납니다. 첫 번째 만남은 마노가 전방관계인 심으로서 대상을 선택하는 정신작용입니다. 이때 선택된 대상에 대한 마노의 후방관계 즉 식(대상에 대한 앎 또는 아는 상태)이 일어납니다. 두 번째 만남은 마노의 후방관계인 식의 대상에 대한 정신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sati가 첫째, 전방관계인 마노의 의지처로서의 관찰기능을 수행해 알아차리고, 둘째, 알아차린 것에 대해 후방관계인 지향기능을 수행해 해탈-열반을 지향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신작용은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만남에 수반되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째, 첫 번째 만남에서 대상을 선택하는 '작의(作意)'입니다. 둘째, 두 번째 만남에 수반되는 '촉-수-상-사'입니다. '촉(觸)'은 식과 대상이 만나는 작용입니다. 식과 대상이 만나면 '수-상-사'의 작용이 함께 일어납니다. '수(受)'는 촉의 일차적 결과입니다. 대상에 대한 경험 그 자체라고 할 것입니다. '상(想)'은 촉한 상태에서의 대상에 대한 인식(개념화)입니다. '사(思)'는 촉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대상에 대한 의도입니다. 이 의도가 행위로 드러나는 것을 업(業)이라고 합니다.

     

    '나'와 마음의 관계

    촉의 일차적 경험이 수이고, 사는 업으로 드러남을 감안하면, 수와 상과 사는 수→상→사의 순서를 가지고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험한 것에 대한 반응이 행위로 드러나는 과정에 행위의 뿌리가 되는 의도가 있고, 의도는 인식(개념화)과정을 통해 제어되는 것이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경에서는 이 다섯 가지 정신작용을 명(名)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물질인 색과 합하여 명색(名色)이라고 하는데, 몸은 색에 포함됩니다. 정신작용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면 행(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수와 상은 독자적 영역을 인정하여 제외하면, 다시 나머지 정신작용을 포괄하여 '행(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포착되는 행은 '사-작의-촉'입니다.


    그래서 십이연기에서는 식과 명색으로 '나'오온(五蘊)을 표현합니다.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 쌓임(무더기)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몸과 마음이라고 말하는 '나'는 정확히 정의하면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작용으로 형성된다고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신작용은 몸과 마음의 만남에 수반되어 일어나는 것이니, 몸과 마음으로 나를 말해도 수반되는 정신작용은 포함되어 있게 되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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