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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주련의 아름다움을 찾아 성주사로....♠寺刹巡禮 2012. 2. 19. 10:19
대웅전 주련의 아름다움을 을 찾아서 ....
테마(Thema)가 있는 사찰순례(7-1 창원 성주사)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일곱 아들을 입산, 출가시켰다는 전설이 담겨있는 불모산, 그 서북쪽 기슭 조용한 곳에 자리한 절이 성주사다. 일곱 아들이 성도하여 불법을 펼쳤으니 ‘부처님의 어머니 산’이라 하여 불모산이라 하고 성인이 머무는 절이라 하여 성주사(聖住寺)라고 한다.
성주사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가야시대 장유화상(長有和尙) 창건설이다.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함께 온 사촌오빠 장유화상이 머물도록 창건한 절이라는 설이다. 이는 우리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신라 흥덕왕 2년(서기827년) 무염(無染)스님이 창건했다는 설이다.
성주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탔는데 1604(선조37)년 진경대사(眞鏡大師)가 중건하고 1682(숙종8)년 중수를 거친 뒤 1871(순조17)년 범어사에 있던 등암(藤巖) 찬훈(璨勛, 1859~1942)스님이 주지를 맡으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성주사는 ‘곰절’이라고도 불린다. 사람들은 ‘성주사’보다는 곰절이라 부르는데 더 친근감을 갖는다.
입구에는 돼지 석상이 둘 있다. 지형은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형상이라서 천적인 돼지를 배치한 풍수 비보책이라는 설도 있다.
성주산 33계단
3학계단-계학,정학.혜학
4성제계단-고.집.멸.도
6바라밀계단-보시, 지계, 인욕,정진, 선정,지혜
8정도계단-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
12연기계단-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
모두 합하면 33천 계단이 됩니다.
좌 삼성각 중앙 대웅전 우측 영산전(아쉽게 영산전을 보지 못하고 왔다 새로 조성이 되어서....)
대웅전 뒤에 걸린 적멸루 현판(대웅전 전면 현판과 후면 현판이 달린 대웅전 역시 색다른 묘미)
성주사를 '곰절'이라고도 하는데 소실된 성주사를 재건하려할 당시 하룻밤 사이에 곰이 목재를 옮겨 놓았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경내에는 지방유형문화재 제25호인 삼층석탑과 지방유형문화재 제 134호인 성주사 대웅전, 지방 유형 문화재 제336호 인 성주사 감로왕탱, 문화재자료 제267호 성주사 동종 등이 있다.
또한 진입로변 용화전에는 지방유형문화재 제 335호인 창원성주사 관음보살입상이 있다.
화려한 꽃살 문양과 주련
대웅전(大雄殿) 편액은 도서 및 관지는 없으나 서체와 필법으로 볼 때 1681년 중창할 때 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오른쪽 면 처마 아래에 1969년 김찬균(金瓚均)이 쓴 적멸루(寂滅樓) 편액도 걸려 있다. 주련은 4점이 걸려 있는데, 내용과 뜻은 다음과 같다.
世尊坐道場(세존좌도량) 석가세존께서 도량에 앉아 계시니
淸淨大光明(청정대광명) 청정한 커다란 빛 비추네
比如天日出(비여천일출) 비유컨대 하늘에서 해가 솟는 듯하니
照耀大千界(조요대천계) 대천세계를 두루 밝히시기를..
주련의 상부에는 복련을 조각하였고 하부엔 연꽃으로 글씨를 받추고 있는 형상니고 다른 사찰에서 볼수 없는 주련이였으면 주련밑에는 최근에 순례자들의 도움을 위하여 해설을 덧붙여 놓는 세밀함도 보였다.
사찰순례시 보물찾기 중에 또하나 인 듯 하고 우리나라 주련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사료되어 문화재로 별도 지정 관리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이 된다.
고색창연한 아름다움과 우리 조상들의 솜씨를 알수 있으며 김제 금산사의 아름다운 꽃살문과 비슷한 형태 인듯 했다.
성주사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방 유리광세계의 교주인 약사여래부처님과 오른쪽에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인 아미타부처님을 삼존으로 모시고 그 전각을 대웅보전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때의 부처님들은 공간적으로 3세계를 대표하므로 삼세불이라 부르는데, 조선시대에 조성된 큰 사찰에서는 대웅보전 내에 삼세불상과 함께 삼세불화를 봉안한 곳이 많다. 처음 1681년(숙종 7)에 지은 뒤 1817년(순조 17)에 중수하였다. 건축 양식은, 앞뒷면에만 공포를 짜 올리고 옆면에는 생략하였다. 공포는 화려하고 장식적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뒷면 내부의 공포만 간략한 교두형(翹頭形, 圓弧形으로 깎아낸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의 특징이다.
5월 15일 개금불사 법회를 입재하면서, 주존불인 석가모니부처님의 복장을 개봉하자 마자 수많은 기록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1655년 부처님을 만들어 모신‘신조불상시주기(新造佛像施主記)’와 1729년 ‘개금불사 등에 관한 복장문(腹藏文)’이 특히 관심을 끌었다.
이 중 1729년 개금 기록문의, 벽암 각성스님(1575~1660)의 손자 상좌[적손.嫡孫]인
당시 성주사 주지 진정(眞淨)스님과 경상우도관찰사 박문수(朴文秀.1691~1756)의 이름이 각별한 이유는, 신라 하고(下古)의 선승 무염스님(800~888) 창건설의 성주사를, 임진왜란 이후 다시 중흥시킨 분이 진경(眞鏡)스님이었다는 설이 진정스님의 오기(誤記)였을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과 함께, 그간 민중에 떠돌던 (어사) 박문수와 불교와 연관된 여러 설화가 일부 사실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암행어사 박문수와 불교의 인연은, 출생이야기부터 문수(文殊)보살의 가피로 태어났다는,
그래서 이름도 문수(文秀)라는 설화와,
불교에 대해 비판적이던 박문수가 어떤 계기로 독실한 불제자가 되었다는 여러 이야기가 전하는데, ‘하동 칠불사 아자방(亞字房)과 목마(木馬) 이야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박문수는 1727년 영조대왕으로부터 ‘영남 암행어사’를 제수 받아 활약하고, 1728년 ‘경상우도 관찰사’를 봉직하게 되는데, 그 이듬해인 1729년 성주사 개금불사에 동참하는 바, 개금 기록문의 ‘본도방백(本道方伯) 박문수’가 그것이다.
이외에도 이번 개금불사를 통한 기록물의 정밀 번역과 확인에서 많은 학술적 사실이 규명될 것으로 기대되는데, 입회한 동아대 이용현 교수는 “조선시대 목조 삼존불로서 귀중한 가치가 확인된 만큼, 서둘러 문화재지정을 추진할 것”을 주문하였고, 입회한 사중의 원광스님은 개금을 과거에는 도금(塗金) 또는 면금(面金)으로도 표기한 점을 주목하였고,
범진스님은 “복장의례가 일종의 타임캡슐인 점을 감안하여 사진 등21세기 기록물을 다시 봉안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어사 박문수는 본관이 고령으로, 그 후손에 박정희 前대통령이 있다)
이번 개금불사는 7월 2일 완료하여 원래 자리에 모시고 회향법회를 봉행할 예정이다.
아직 본존불 기록문의 번역도 채 끝나지 않았지만,
개금불사문의 첫 구절 ‘아! 진리의 본체는 형상이 없고, 법신 또한 형상이 없으니, 모습으로서는 부처를 구할 수 없도다.
그러나 부처는 중생을 제도하는 아버지와 같고 스님은 자비로운 배[慈航.자항]와 같아,
부처님과 스님의 힘이 아니라면 어떻게 물에 빠진 중생을 구할 것인가?’라는
구절이 희미하게나마 문리가 흘렀다.
용 2마리가 여의주인지 태양인지를 향하고 있는 모습
Apsara
비천飛天, 낙천樂天, 등으로 일컬어지는 하늘 나라의 유정有情들를 말한다.
보통사람에게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
유롭게 빨리 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신이다.
하늘의 음악을 즐기며 지극한 쾌락의 경지에 들어가 있지만, 그들이 지닌 복과 업이
다하고 하늘 나라의수명이 다하면 오쇠五衰의 괴로움을 받다가 다시 인간이나 축생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어떤 비천은 꽃을 뿌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손에 각각 다른 모양의 악기를 하나씩 들고 연주하고 있다.
나발을 부는 비천, 북을 든 비천 등 각양 각색이다.
주로 부처가 설법하는 곳이나 보살이 머무르는 곳에 나타나 불법을 수호하는 모든 중생들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불법을 수호하는 권속들이다.
천인들의 행복한 생활도 영원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지은 업이 다하면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한다는 데에 불교다운 깊은 교리가 숨어 있다.
수미단 보단을 물고 부처님을 수호하는 용
수미단 보탁을 받추고 있는 용맹스럽다기 보다는 해학적인 사자
패(불명패,전패,위패)
불·보살의 명호를 적은 것을 ‘불명패’라고 하고, 국태민안, 소원성취 등의 발원과 함께 왕족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내용을 적은 것을 ‘전패’라고 하며, 영가의 신위를 모신 것을 ‘위패’라고 한다. 그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단순히 패의 아래쪽에 연화대좌만을 붙이는 경우도 있고, 또는 그 위에 구름, 용, 연화 등의 문양을 조각하여 비석이나 탑의 옥개석처럼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또한 위패의 양쪽에 작은 문을 설치하는 것도 있고 당초 문과 같은 문양을 장식하기도 한다. 죽은 사람의 이름과 사망한 날짜를 적은 위패는 시연의식에서 영단의 중앙에 놓고 그 좌우에는 각기 향로와 다기 및 1쌍의 촛대를 세운다. 의식에 사용되는 위패는 죽은 사람의 혼을 대신하는 것으로 법당이나 사당, 원, 절 등에 모시며 목주, 영위, 위판, 신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닷집위로 날고 있는 무용도 완주 송광사에서 보고 이곳에서 역시 나를 반겨 주었다.
별교 경전 문양
대웅전내부 벽화
우물반자 천정
닷집 내부의 용
흰코끼리를 탄 보현보살
보현보살은 '변길(邊吉)'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주로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향한 실천의 의지 즉, 행원을 상징하는 보살이다. 그러므로 분수보살의 사자를 타고 있는 데 비해 보현보살은 흰 코끼리를 탄 경우가 많은 것도 행원이라는 것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묵묵하지만 꾸준히 한 길을 가는 코끼리를 통해서 보살도(菩薩道) 실천의 올바른 자세를 일깨우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보현보살의 뛰어난 실천력 은 특히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잘 나타나 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지혜와 실천이라는 두 가지 이상을 통해 대승보살도의 영원한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청사자를 탄 문수보살文殊 菩薩
문수 보살을 문수사리文殊師利 또는 만수시리滿殊尸利 · 만수실리曼殊室利 등으로도 부른다.
대승 보살 가운데 한 분이며, 문수와 만수라는 말은 묘妙라는 뜻이고, 사리, 실리라는 말은 두頭 · 덕 德 · 길상吉祥이란 뜻이므로, 이를 합치면 지혜가 뛰어난 공덕이라는 뜻이 된다.
여러 보살 중 제일 상수보살로 이 다음 세에 법왕, 즉 부처가 되기 때문에 법왕자法王子보살이라고도 부른다.
석가모니의 좌보처로서 지혜의 완성을 상징한다. 청사자를 타는 것은 위험과 용맹을 나타낸다.지덕 知德, 체덕體德을 맡고 있다.
일찍이 반야경을 결집, 편찬하였다고 전해지는 이 보살의 이름을 사람들이 들으면 4중죄重罪가 소멸된다고 한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의 협시 보살로서 보현과 더불어 삼존불의 일원이 되어 있다.
대들보의 화려한 단청
외부 벽화 가운데 왼쪽 면 두 곳에 곰의 그림이 있는 것은 진경 대사가 1604년 성주사를 중창할 때 도움을 준 곰을 그린 것이다. 최근에 중수하면서 기단부 앞에는 대웅전 앞으로 오르내리기 위한 출입 계단을 두고, 오른쪽에는 장애인의 편의를 위해 경사로를 두었다.
몇년전 순례시는 여름이였는데 수련이 예쁘게 피었고 계곡의 시냇물이 시원하게 흘러 내렸습니다.
출입구 초입에는 용화전이라는 허술하고 철창을 해놓은 전걱이 있었으나 찾아 볼려고 그곳 위치에서 찾아 볼 수 가 없어 아쉬움만 간직하고 용화전이 나와의 인연을 거부하는구나라고만 생각해 본다.
성주사는 장유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는데 김해 장유에 있는 장유사와는 또 무슨 관계인지 알아 보아야 할일이다. 분명 무슨 인연이 필연코 있을텐데?
불모사(佛母山) 불교의 어머니 산 그 자체이지만 우리나라 모든 산하는 불교와 너무 많은 뜻과 인연을 품고 있다. 불모산이 감싸고 있는 성주사는 설법전, 지장전, 영산전 등을 새로 지으면서 사찰의 아기자기한 멋은 찾을길이 없고 화려하고 고색 창연한 아름다운 꽃살눈을 가진 대웅전과 좌측 의 삼성각, 우측의 영산전등의 배치는 흐트러져 버렸고 돼지 조각상을 올라오자 말자 설법전이 덩그렇게 현판도 없이 순례객을 맞이하는 형상이다.
웅장한 설법전과 너무 짙은 단청의 지장전이 전체적으로 사찰내를 압도해버려 대웅전은 옛날 대궐집 새랍밖에 있는 화장실이나 창고 정도로 그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을 펼치지도 못하고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 안타까울 뿐이다.
요즈음 우리나라 불교도 각성하고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무조건 크게, 무조건 최고를 외치며 마구잡이로 옛것들을 새롭게 중수하는 등 불경과 목탁소리는 들리지 않고 중장비의 굉음소리만 이곳 저곳 사찰에서 울려 퍼진다.
세롭게 짓고 크게 지으면 불교가 중흥이 오고 불자들이 늘어나는 것인지 알고 싶다?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그리고 소박한 우리들의 삶과 같이 할 수 있는 전각들이 였으면 하다. 사찰순례를 하면서 보면 나의 생각은 크고 화려한 전각들은 오히려 부의 상징으로서 볼 수 밖에 없으며 전각에 짓눌려 불자들이 되돌아 간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장애인이나, 노약자, 다문화 가족들도 자유롭게 동참할 수 있도록 개방을 하고 먼저 사찰에서 손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출입하는데 불편함으로 인한 소외감을 한번이라도 생각을 해보셨는지 ?
지역을 비교해서는 안될 일이지만 전라도쪽 사찰들은 그래도 옛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듯 하나 경상도 쪽에는 크고 화려한 사찰로 되어 있다. 어느 사찰은 아늑해서 편한하고 , 어느 사찰은 사찰 분위기에 압도되어 순례하기가 거북스런 마음을 주는곳들도 있다.
성주사 대웅전을 보면서 대웅전내 벽화와 문양들의 스토리텔링이나 주련과 아름다운 꽃 문살이 잊혀져 가고 있음이 안타깝다.
아름답고 고귀한 우리 유산을 보존하고 알려서 후세에 물려주는것이 우리들의 몫이 아닌가 싶다.
설법전, 지장전, 안심암 등의 웅장한 모습과 화려한 단청때문에 위축되어 있는 대웅전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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