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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산사의 아름다운 꽃살문을 찾아서...
    ♠寺刹巡禮 2012. 2. 13. 09:36

    테마(Thema)가 있는 사찰순례(4-금산사) 2

     

     2012년 사찰순례 첫번째로 꼽은 김제 금산사.

    미륵신앙의 모태인것 처럼 어미모자를 쓴 모악산을 들어서자 어머님 품같은 포근함이 느껴졌다.

    금산사 혈장은 문자형(文字形)으로 볼 때 야(也)자형이다. 문자형의길형으로는 용(用), 다(多), 야(也), 내(乃) 등이 있다. 용(用)자는 일(日)과 월(月)의 합자(合字)이며 다(多)자는 다상(多祥)을, 야(也)자는 유종(有終)을, 내(乃)자는 자(子)를 더하여 잉(孕)자, 즉 생산을 말하는 경사스런 의미가 있다. 금산사 혈장은 동북이 높고 서남이 낮은 지형으로 모악산 정상계곡의 청룡수(靑龍水)와 북쪽 계곡의 백호수(白虎水)는 금산사 혈장 서쪽에서 만나 계곡 아래로 남류한다.(임학섭, 『사찰풍수 1』57~58쪽. 1995. 밀알)

     대적광전

     

     꽃살문 문양

     

     모악산에 금산사 가 자리 잡으면서 산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매김 되었다. 미륵신앙은 미래에대한 희망의 신앙이다. 56억 7천만년이 지난 뒤 이 땅에 하생할 미륵불을 열망하는 민중의 소망은 지금도 그치질 않는다. 근래 들어 새롭게 등장한 여러 신흥종교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미륵신앙을 바탕에 두고 있다.모악산과 금산사의 지세를 풍수지리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풀이하기도 한다.

    모악산의 정기를 듬뿍 받은 금산사 혈장은 그야말로 천혜의 터전으로 신비스러울 정도로 사면팔방이 이중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산맥이 수려하고 다정다감하면서도 꿈틀거리는 듯하고 온화한 모습이어서 이곳을 찾는 이를 말없이 반기는 듯하다. 모악산은 동쪽에 정상봉이 높이 솟아 좌우로 지맥을 내려 보내는데, 왼편 산맥은 금산사 혈장 입구 방향을 감싸면서 금수형(金水形)의 자태를 부드럽게 보이고, 혈장 입구 방향을 감싸면서 혈장 아래로 늘어서 있다. 오른편 지맥은 금산사의 주산을 만들면서 직룡으로 입수하고 북서향으로 이어지는 지맥은 둥글게 솟고 길게 서남으로 잔잔한 물결처럼 이어져서 둥글게 혈장을 감싸면서 크게 휘감아 길게 늘어져 입구에 있는 또 하나의 혈장에 이른다. 금산사 혈장의 양기(陽基)를 보면 길지(吉地)라는 확신이 든다. 길지는 천지의 정기가 모였다가 생기를 발하는 곳이며 풍광명미(風光明媚: 자연의 경치가 매우 맑고 아름다움) 상탄(賞嘆:탄복하여 크게 칭찬함)하는 땅이다.

    대적광전이 지금의 웅장한 규모를 갖게 된 것은 정유재란 때 절이 전소된 후1635년 수문대사의 중창에 의해서였다. 소실되기 전의 대웅전․대광명전․극락전․약사전․나한전 등의 다섯 전각을 대적광전 하나로 통합해 창건하였던 것이다.

    1994년에 전각을 복원하면서 아미타․석가․비로자나․노사나․약사여래의 다섯 분 부처님과 대세지․관음․보현․문수․월광․일광의 여섯 분 보살상을 새로봉안하였다.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5여래와 그 협시로서 6보살을 봉안하였다. 5여래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서부터 아미타불석가모니불노사나불 그리고약사불이다. 6보살은 역시 왼쪽에서부터 대세지보살․관음보살․문수보살․보현보살․일광보살 그리고 월광보살이다. 5여래는 모두 목조좌상으로 높이는 대개 2.56m 안팎이고, 6보살은 모두 소조입상으로 높이가 2.73m 정도이다. 수인(手印)은 불상에 따라 각기 선정인․지권인․시무외인 등을 취하였고, 보살상은 한결같이 화관(花冠)으로 장엄하였다. 조선 중기에 전각을 중창하면서 불보살상도 이 때 조성한 듯 간략화한 법의와 다소 경직된 상호 등에서 조선 중기의 일반적 경향을

    살필 수 있다.

    이처럼 5여래와 6보살을 봉안한 전각은 그 유례가 없다. 한국의 불교는 흔히 회통불교라고 한다. 불타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파에 치우침이 없었고,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일찍부터 체득했던 때문이다. 전국의 명산대찰 어느 곳을 가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주존불을 어떻게 모셨는가에 따라 중심전각만이 대웅전․무량수전․비로전 등으로 나뉠 뿐이고, 그곳에는 공통적으로 관음신앙과 지장신앙․약사신앙 등이 어우러져 있다. 심지어 재래의 토속신앙 마저 융화시켜 산신신앙으로 불교화하고 있음은 이러한 한국불교의 회통불교적특성을 잘 보여준다.

     

     

     

     

     

     

     

     꽃살문

     화려한 수미단

     

     

     

     

     

    보물제827호 대장전

    미륵전의 정면 서쪽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다포식 팔작지붕인 대장전(大藏殿)이 자리한다. 이 전각은 보물 제8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워졌다.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가운데에서 우측부분에 위치하였으며 정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이 산개형(傘蓋形)의 층옥(層屋)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鐵蓋)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寶珠)를 올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년(인조 13)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의 위치로 이전된 것은 1922의 일이다. 이렇듯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 꼭대기에는 복발과 보주 등이 아직 남아 지금도 신라 때의 목탑 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년(인조 13)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의 위치로 이전된 것은 1922의 일이다. 이렇듯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 꼭대기에는 복발과 보주 등이 아직 남아 지금도 신라 때의 목탑 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삼면의 벽은 모두 10폭의 벽화로 장엄하였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십우도나 극락세계의 장엄 등이 아니라 구체적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모습이다. 몇 개만 열거하면 ‘오달국사인명창’, ‘저지화상도담’, ‘치계전생담(雉鷄前生譚)’, ‘부설거사도술담(浮雪居士道術譚)’, ‘용파수상행(龍波水上行)’, ‘희운선사행적기(喜運禪師行迹記)’ 등이다. 또한 외벽에도 좌우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한편 대장전의 내부 출입문 위에는 1974년 건물을 중수할 때 참여한 사람들의 인명과 불상의 개금불사에 시주한 사람들 이름을 적
    은 현판이 걸려 있다.

     

     

    조사전(祖師殿)

    대적광전 뒤편의 공간에 팔자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근래에 새로지은 조사전(祖師殿)이 있다. 안에는 금산사의 창건주 진표율사를 비롯하여 숭제 법사․혜덕 왕사․효정 승통․도생 승통․원명 국사․수문 대사․뇌묵 처영․소요 태능․환성 지안․남악 태우․용명 각민 등 모두 12분의 조사 진영이봉안되어 있다.

     

     

     

     

     

     


    보물제29호 북강3층석탑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높이 4.65m이며, 전체적으로 신라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으나 옥개석<屋蓋石>이 넓으며 낙수면<落水面>의 경사가 급한 면에서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 졌으며 정방형이다.
    지대석은 거의 땅에 묻혀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처마의 양끝에서의 들림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 1석만 남아 있을 뿐, 다른 부재는 모두 결실되었다. 전체의 형태가 각 부의 체감률이 적은 탓으로 안정감을 잃고 있다. 석재<石材>의 결구<結構>가 규칙성이 없고 각부의 조각이 섬약<纖弱>하다. 심산<深山>에 위치하여 부재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고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명부전(冥府殿)

    대장전 오른쪽에 있는 명부전은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맞배지붕 건물이다.잘 다듬은 장대석의 기단을 쌓고 기둥을 올린 후 기둥마다에다 공포를 올려놓은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연혁은 1857년(철종 8)에 비구니 만택(滿澤)이 중건했다는 기록이 전할 뿐 그 이전의 일은 알지 못한다. 다만 1598년(선조 31) 정유재란의 화를 입어 절이 소실되기 직전의 기록에 ‘시왕전 9칸’이라는 기록이 보이므로 지금의 명부전은 조선 중기의 시왕전이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이라 생각된다. 안에는 지장삼존, 곧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하여 무독귀왕․도명존자를 봉안했는데, 지장보살은 왼손에 금강보륜을 쥐고 있다. 상호는 비교적 각진 모습에 도식화된 느낌이 들어 아마도 명부전의 중수가 이루어지던1857년 무렵에 조성된듯하다. 지장삼존의 뒤에는 지장후불탱화가 걸려있는데 1861년(철종 12) 월출산 도갑사(道岬寺)에서 조성되어 이안되었다는 화기가 보인다. 크기는 가로 210cm,세로 194cm이다.

    지장삼존의 좌우로는 시왕상 10구와 판관․녹사․인왕상․동자상 각 2체가 명부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한편 내부 정면의 출입문위에는 「금산사시왕전중수기」를 비롯한 현판 9개가 나란히 걸려 있다.

     

     

     

     

     

    라한전

    물고기 문양

    연꽃과 거북 문양

    꽃살문

     

     

     

     

     

     

     

     

     

     

    원통전(圓通殿)또는 관음전(觀音殿) 이라고 한다.
    대자(大慈) · 대비(大悲)를 근본서원으로 하는 관세음(觀音⇔光世音)보살을 모신 불전(전각)을 말한다.
    보통 주불전일 때는 원통전(圓通殿), 부속 전각일 때는 '관음전(觀音殿)'이라 부른다.
    보통 관음보살만이 단독으로 모셔지는 것이 특징이며, 참고사찰 금산사 원통전에는 천수천안관음(千手千眼觀音)이 모셔져 있다.

     

     

     

     

     

     

     

     

     

     

     

     

     

    개심천사백주년기념관(들어가면서 보면 보제루) 

     

    보제루(普濟樓)

     천왕문을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는 누각 건물이 보제루이다. 앞면 5칸,옆면 3칸의 2층 누각식 건물로서 아래층은 절 앞마당으로 오르는 계단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누각건물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의 일이다.

    잦은 외침에 따라승병이 조직되고 사찰이 의승군의 결집장소가 되면서 군사적 필요에서 누각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승병이 사라지면서 누각건물은 법회와 강설, 그리고 대중 집회의 장소로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는 이러한 실용적 기능보다는 가람의 한 구성요소로서 자리 잡고 있다.

    보제루는 정확한 연혁은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 중기에 만세루(萬歲樓) 12칸짜리 누각이 있었으므로 아마도 이를 계승한 건물이라 생각된다.

    고문양 화반 

     토끼화반

     코끼리 화반

     목단, 연꽃 화반

    호랑이 화반과 학 문양 화반등 보물찾기의 묘미


    마음속에 쌓이고 쌓인 번뇌와 망상을 가마솥에 누룽지 긁던 심정으로 빡빡 긁어 내면을 청소 하고 싶은 마음이건만......

    불교에서 비우고, 버리라고 하는데 하산하면서 가만히 생각하다 보니 자연에 버려진 쓰레기만 쓰레기가 아닌듯한 마음을 가지고 버리고 비움도 경건한 마음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버리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악한마음과 증오와 질투의 마음으로 버리고 비운다면 그마음은 형체는 없으나 인간사에 떠돌다 결국 인간에게 다시 흡입되는것이 아닌지를 생각 해본다.

    버림과 비움에도 참나의 참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는 순례 였다.

    우리나라 최대 소조 불상과 꽃 문살은 순례자의 발길을 잡았다.

    보제루의 여러 형상의 화반 역시 순례시 보물찾기의 하나인 듯 또다른 즐거움을 맛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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