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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마(Thema)가 있는 사찰순례(4-금산사) 1
    ♠寺刹巡禮 2012. 2. 13. 08:34

    테마(Thema)가 있는 사찰순례(4-금산사)

     

    김제 금산사

    조선 성종 23년(1492)에 작성된 "금산사 5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수 있게 한다.
    흔히 통일신라 시기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록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남아있는 "금산사사적"의 기록에 의하여 금산사가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후 금산사의 모습이 크게 부각된 것은 통일신라 시기 경덕왕때 진표율사에 의한 중창 때문이다.
    금산사에서 숭제법사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던 진표율사는 27세 때에 변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철저한 수행에 전념하였다. 17년 간을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의 고행을 통하여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게 된다.
    이후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다시 돌아와 금산사의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다. 이 때가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금산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금산사사적"의 내용을 근거로 불 때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이 후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메김 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이다.

     

     

     

     

     

     

     

     

     

     

     

     

     

     


    미륵이라 하면 미래에 오실 부처님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다. 여러 경전을 통해 전해진 미륵신앙은 삼국의 불교인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준 신앙이었다. 물론 어지러운 시대에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자들이 미륵을 자처해 민중들에게 정신적 혼란을 초래케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진실된 미륵신앙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안락을 주는 신앙이다.
    미륵이란 범어 'Maitreya'를 음역한 것으로 이것은 자비를 갖춘 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비라는 것은 포용력을 가지고 인류의 모든 기쁨과 슬픔을 대변하는 말로서 적극적인 종교적 실천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미륵신앙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어진다.
    하나는 미륵상생신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미륵하생신앙이다.
    미륵상생신앙이란 아직 보살의 신분인 미륵이 수행하고 있는 도솔천을 이상세계로 보고 죽은 후에 도솔천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신앙형태로 도솔천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십선도를 일심으로 열심히 닦아 죄업을 참회 수행하여야 한다는 신앙이다. 도솔천에 태어난 후 미륵불 옆에 있다 이윽고 미륵이 하생할 때 미륵을 따라 지상으로 내려와 삼회의 설법을 들어 깨달음의 길로 인도 받는다는 신앙이다.

    미륵하생신앙은 중생이 핍박받고 괴로움에 처했을때 미륵부처님이 나타나 사회의 개조와 인간개조를 통해 중생을 구제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후천개벽적인 내용이 아니다.
    미륵부처님이 하생하여 오시는 세계는 모든 중생이 자비심을 가지고 십선을 많이 행하고 있는 대자 대비한 세계다.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계에 오셔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 하신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중생들이 십선을 열심히 닦아 자비와 평화의 불국토를 만들어 대자대비의 세상이 되었을때 미륵부처님이 오셔서 미처 깨닫지 못하는 중생들에게 3회의 설법으로 오랜 업장을 소멸하게하고 위없는 깨달음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 미륵 하생신앙이다. 그래서 미륵신앙은 열심히 십선의 도를 닦아 자신의 억겁을 참회함으로써 불국토를 열어 모두 다같이 성불하자는 기도와 참회의 신앙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륵신앙이 신라시대에는 미륵이 화랑으로 화하여 세상에 현신해 줄 것을 기원하는 화랑도와 결합되어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고 후고구려의 궁예에 의해 본래의 신앙에서 벗어나 혹세무민하는 경지 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후 고려말 우왕때 니금이라는 사람이 미륵불을 자칭하고 나타나 민중들을 우롱하다 처형당하였고 조선시대 숙종때 승려 여환이 석가시대는 가고 미륵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미륵신앙을 퍼뜨려 왕권을 도모하다 처형당했다.
    조선말기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암울한 시기에 굶주림과 억압의 고통에서 허덕이다 사회변혁을 꿈꾸는 민중들에게 이상사회의 실현을 약속하는 민중신앙과 결합하여 미륵신앙이 민중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근래에 와서는 본래의 미륵신앙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교리속에 미륵신앙을 자의적인 해석과 절충을 통하여 후천 개벽적인 신흥종교로 발전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상과 같이 역사적으로 보면 미륵신앙은 때로는 본래의 미륵신앙에서 한참 벗어나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고 자칭 미륵의 화신이라는 자들이 나타나 후천개벽을 이야기하며 민중을 기만하는 행위도 나타기도 하였고 때로는 이 땅을 살아가는 민초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정신적인 의지처가 되기도 하였다.

     

     


    5층 석탑(보물제 25호)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은 높이가 7.2m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한다. 즉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979년(경종 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한편 탑 속에서는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탑의 복장품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방등계단(보물제26호)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도라고 부른다.

    방등계단의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 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편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결국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하였다는 신앙적 성격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6각형 다층석탑(보물제27호)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하며 보물 제27호이다. 탑의 재질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적 석탑이다. 본래의 자리는 봉천원구가 있던 대웅대광명전의 앞마당에 있었다. 봉천원구는 혜덕왕사가 1079년(문종 33)에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구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대사구, 곧 지금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탑을 옮겨왔다.

    이 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력하고 장식적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이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각 층의 체감비례가 적절하고, 옥개석
    의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이 이후 고려시대의 공예탑이 지니는 초기적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보물제22호 노주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중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 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다고 한다면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
    고려시대의 조성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보물제 828호 석등

    대장전 앞에 보물 제828호인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이 있다. 지대석에서 보주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3.9m이다.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간주석(竿柱石), 연화석(蓮華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다.

    이 석등은 화창에 시설했던 창문만을 제외하면 현재 거의 완벽한 모습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오랜 가람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잃지 않고 은은한 법등을 밝혀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금산사의 귀중한 성보문화재라 하겠다.

     

     

     

     

     

     

     


    보물제 24호 혜덕왕사진응탑비

    이 부도군의 3번 부도비가 보물 제24호로 지정된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이다. 고려 예종 6년(1111년)에 세운 것이다.
    현재 탑비는 귀부와 비신만이 남아 있고 비의 머리부분은 결실되었다. 대리석의 비신은 높이 2.78m, 너비 1.5m로서 심하게 손상되어 비문은 판독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행히 『해동금석원』등에 그 내용이 전한다. 비문의 글씨는 약 2cm의 크기로 구양순의 해서체인데 활달하고 쾌적한 멋을 지녔다. 비의 앞면에 43행 77자씩으로 스님의 출생과 교화활동, 입적 등을 적었으며 그 둘레는 당초문으로 장엄했다.
    서자(書者)와 찬자(纂者)의 이름은 판독할 수 없고 각자(刻者)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해동금석원』에 의하면 이오가 짓고 정윤(鄭允)이 썼으며 비음(碑陰)은 채추탄(菜推誕)이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금속고』에서는 비음을 채추탄이 쓴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귀부는 방형의 지대석위에 놓였는데 신체는 장대하나 머리는 작은 편이다.
    등에는 육각의 갑문(甲文)을 새기고 등위에 비신을 얹는 삽입부를 마련했다.역동적인 발과 비늘의 표현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하여 고려시대의 탑비 가운데 우수한 작품임을 알게 한다.

     

     

     


    보물제28호 당간지주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마련이다.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남아 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이다.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조성연대, 곧 8세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한 것이 766년(혜공왕 2)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시기를 이 무렵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보물제 23호 석련대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 보물 제23호 석련대(石蓮臺)가 있다.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한 작품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대좌인데다가 더욱이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조각한 수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석련대의 위치가 지금의 제자리인지 다른 자리에서 옮겨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을 감안한다면 제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려시대 이후 언젠가 절을 중창하면서 석련대가 놓였던 전각은 사라지고 그 위에 봉안된 불상은 다른 전각이 새로 들어서면서 그곳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한편 이 정도의 대좌가 필요했던 불상이라면 그 규모도 엄청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금산사의 역사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역시 이 대좌의 주인공은 미륵장륙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뒤따라야 한다. 즉 석련대의 조성 시기가 미륵장륙상을 봉안했던 8세기 후반과 맞아 떨어져야 하지만 이 석련대를 대개는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정확한 문헌자료가 없을 때는 작품의 양식을 통해 조성시기를 판단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석련대의 경우는 충분한 역사적 정황이 성립될 수 있으므로 통일신라 하대의 작품일 것이라는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1층은 대자보전, 2층은 용화지회(미륵세상이 온다는 뜻), 3층은 미륵전으로 현판이 붙어 있으며 1층 부터 3층까지 불상이 배치되어 있어 웅장함과 신비함, 그리고 우리나라 선인들의 건축양식과 솜씨에 다시한번 놀라게 되었다.

    미륵전의 문고리는 백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듯 둔탁하면서도 오밀조밀한 멋과 기둥은 통나무를 그대로 사용한 흔적이 그대로 보여 세월의 흐름과 선인들의 숨결을 느낄수 있었으며 최대 소조불상에서 백제의 에너지를  듬뿍 담았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금미륵불을 안치하고 있으며 (11.82m)

    그만큼 큰 규모의 내부공간을 갖고 있는 건축물이다.

     

     

     

     

     

     

     

     

    국보제62호 미륵전

    보제루를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국보 제62호인 웅장한 규모의 미륵전이 보인다.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그분의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라는 것을 상징화한 법당이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을 사찰 속에 응축시킨 것이 미륵전이요, 먼 미래의 새로운 부처님 세계에서 함께 성불하자는 것을 다짐하는 참회와 발원의 장소이다.
    미륵전은 신라 경덕왕 21년(762)부터 혜공왕 2년(766) 사이에 진표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여 세웠다. 안에는 미륵장륙상을 본존으로 모셨으며 남쪽 벽에 미륵과 지장보살에게서 계를 받는 광경을 벽화로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지금의 모습은 인조 13년(1635)에 수문대사가 재건하였다.
    미륵전은 용화전, 산호전(山呼殿), 장륙전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을 지녔다. 지금도 특이하게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러한 다층의 사찰 건축으로서 미륵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건축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힌다. 일찍이 삼국시대로부터 축적된 기술적, 미학적 아름다움은 국토 곳곳을 불국토의 장엄으로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미륵전의 내벽과 외벽에는 사이 사이에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보살과 신장 그리고 수도하는 모습 등 다양한 벽화는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한편 오른쪽 벽에는 1890년(고종 27)에 조성한 제석천룡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용준(聳俊), 정선(定善), 오종(午從) 등의 금어(金魚)가 그렸는데,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며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미륵불 본존은 높이가 11.82m이고 삼존불 중의 협시는 8.79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3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 한 분만이 모셔졌었다. 그 뒤 조선시대에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 조성하면서 소조 삼존불로 봉안했는데, 1934년에 실화로 일부가 소실되었다. 4년만인 1938년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해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미륵본존은 거대한 입상이지만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불단 아래의 거대한 청동대좌는 정확한 조성시기를 알 수 없지만 잦은 소실과 복원의 과정에서도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불상을 받들고 있는 역사의 대변자가 되는 셈이다.
    본존불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왼손 역시 손가락을 조금 오므렸지만 밖을 보이게 한 시무외인이다. 대개 미륵불은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별개의 특징을 지니지 않는다.

    본존불 양 옆의 협시보살은 왼쪽이 법화림(法花林) 보살이고, 오른쪽이 대묘상(大妙相) 보살이다. 협시보살 좌우에는 언제 봉안하였는지 모르는 또 다른 것이 2구가 있다. 본존의 협시보다 약간 작지만 역시 금을 입힌 소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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