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국을 위한 승병들의 에너지를 찾아 흥국사로....♠寺刹巡禮 2012. 2. 4. 09:51
테마(Thema)가 있는 사찰순례(3-흥국사)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를 맞이하는 해를 맞이하여 Thema가 있는 사찰순례는 호국을 위한 승병들의 함성이 아직도 들려오는 듯한 흥국사를 향했다.
[흥국사 사적기(興國寺 事蹟記)]에서는 “불법(佛法)이 크게 일어날 도량(度量)이 될 것이니 절을 짓고 흥국사라 하라. 이 절이 잘되면 나라가 잘되고, 나라가 잘되면 이 절도 잘될 것이다” 라고 하여 국가와 절이 공동운명체(共同運命體)임을 강조하고 이는 흥국(興國)의 비보(秘補)요 방국(邦國)의 지보(至寶)라 하였다.
흥국사를 창건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당시 문란해진 사회기강을 바로잡고, 세속(世俗)의 흐름에 대해 바른 길을 제시하지 못하는 승가(繩假)에 대한 우려속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통해 승가와 사회가 가야할 길을 제시하 국가가 바로되고 승가가 바로서기를 기원하며, 실천하기 위함을 그 이념으로 하여 흥국사라 이름지었다.
이같은 흥국사의 창건이념(創健理念)은 훗날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급할 때, 속세로 돌아와 의승수군(義僧水軍)의 진주사역할(進駐寺役割)을 한 것으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흥국사는 보물 9점(대웅전 제396호, 홍교 제563호, 대웅전 후불탱화 제578호, 노사나불괘불탱화 제1331호, 수월관음도 제1332호, 십육나한도 제1333호, 목조석가여래삼존상 제1550호, 강희4년 명동종 제1556호, 목조지장보살삼존상, 시왕상일괄및복장유물 제1566호)이고,도지정문화재 4점(원통전 제45호, 팔상전 제258호, 삼장보살도 제299호, 제석도 제300호)과 그 외 문화재 자료 800여 점과 건물 25동을 보유하고 있으며, 추가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을 여러점 신청 중 에 있습니다.
2011년 12월 29일에는 새롭게 노천불상 마애불 무게 10톤, 높이 약3.3m, 길이 2.8m 규모의 자연암석으로 봉안하였다. 앞면에는 마애불, 뒷면에는 남북평화통일기원의 글씨가 선명하게 음각됐다.
사찰을 순례하면서 많은 사찰들이 많은 돈을 들여 국적도 알 수 없는 불상이나 불탑등을 서로 자기 사찰이 세계최대, 최고, 동양최대, 최고를 외치면서 아우성과 더불어 자랑이라 하듯 크게 하는데 자연석에 암각화로 마애불을 조성한것을 보면 더 친근감으로 다가온다.
중국과 티벳등 외국에서 반입된 재료(동, 철, 석조 등)로 자연을 훼손하면서 까지 대불을 조성하는 요즈음 사찰들과는 비교가 되는 아스팔트 광장에 조성한 명선 스님 존경스럽습니다_()_.
보조국사 부도탑
흥국사 부도군
흥국사에서 볼수 있는 특이한 문화재 설명 안내판이 발길을 붙잡기도 한다 사찰에 최근들어 문화재 안내판을 정비한다고 규격화하고 있는것 같지만 목조건축에는 목조판으로 만든 안내판과 주객이 마치 바뀐듯한 안내판의 규격에도 문제를 제기해 본다.
문화재 보다 더더욱 안내판이 돋보이게 만들었을 뿐만아니라 목조에 철재 간판과 안내판 일색인 사찰 안내판은 목조건축물의 아름다움과 주변 자연경관과 어울릴 수 있는 친환경적인 신소재로 만들었으면 하면서 흥국사의 안내판은 친근감과 함께 목조 건축물의 조화를 이룬 참 아름다운 또 다른 흥국사의 아름다움이라 볼 수 있다.
보물 제396호.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갑석이 있는 단층기단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높이보다 기둥 사이가 더 넓은 편이다. 이와 같은 평야적·남방적인 요소는 수덕사 대웅전과 무위사 극락전에서도 보인다. 앞면에는 모두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달았는데 밑에는 2단의 궁창판을 두었으며, 위에는 문의 일부를 구획하여 교창처럼 꾸몄다. 공포는 내외삼출목의 다포계(多包系)이며, 귀공포의 구조가 매우 복잡하다. 내부 바닥은 마루이며 천장은 우물반자로 되어 있다. 이 건물은 포작(包作)의 안쪽에 연꽃과 서조(瑞鳥)를 새기는 등 장식적이면서도 견고한 면이 있으므로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추정된다.
심검당(尋劍堂)은 불교의 선(禪)사상인 활인검(活人劒)과 살인검(殺人劍)에서 유래된 뜻이란다. 즉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칼이라는 뜻인데, 죽인다는 것은 인아산(人我山)이요 살린다는 것은 공덕림(功德林)이다. 여기에서의 칼은 인간의 본성을 의미함이다.
즉 1812년에 본래의 선당이라는 이름에서 개칭된 것임을 상량문에서 볼 수가 있었다. 이 건물은 본래 1560년 법수대사가 중창할 때 함께 지었던 건물인데 임진왜란 때 흥국사에서 유일하게 이 건물만이 반파되어 남아 이던 것을 1633년 자운스님에 의해서(주지 계특스님 때) 보수되었다. 이 때는 이름을 선당(禪堂)이라고 했으며 1780년에 도총섭 응운(應雲)스님에 의해서 다시 보수 되었다.
그 뒤 효암에 의해서 1812년 다시 확장을 하여 지으면서 이름을 심검당(尋劍堂)으로 바꾸었다. 이 건물은 스님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대중방이다. 이 건물은 'ㄱ자형'집으로 정면 6칸 지붕의 한 쪽은 팔짝이며 대웅전 쪽으로는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당간지주에 새겨진 용의 승천하는듯한 조각은 여러번 흥국사를 다녀 왔지만 처음으로 보았다.
당간지주의 용의 입에 구멍을 만들어 탱화를 걸어 야단법석을 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으며 우리나라 당간지주중에 용으로 조각된것 또한 소중한 석재 문화재가 아닌가 한다. 흥국사를 순례시 한번 찾아 보는 순례 또한 사찰 순례의 재미라 하겠지요.
거북등에 올려진 석등이 세월을 말하는 듯....
승병들의 우렁찬 함성이 들려오는 대웅전 마당한켠에서 승병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듯 하고 석등 상부에는 역사의 무게 만큼 이끼를 이고 순례객을 맞이 하고 있다.
대웅전 활주 옆에 있는 거북이 조각이 있으나 대웅전 기단에도 게모양등 각종 바닷동물들이 조각되어 있어 순례시 보물 찾기하는것 또한 사찰순례의 묘미...
대웅전 천정의 화려하고 고색 창연한 단청과 목재의 여백을 이용한 벽화가 특이하다.
대웅전 닷집
현재 남아 있는 대웅전 후벽의 관음벽화로는 매우 특이하게, 대웅전 중앙에 불단을 설치한 양고주(兩高柱)의 벽 뒷면 토벽 위에 한지를 덧바르고 그 위에 수월백의관음(水月白衣觀音)을 모셨다. 크기는 세로 3.89m, 가로 3.36m로 후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뒤쪽 문을 열었을 때 굽어살피는 듯한 모습은 퍽 인상적이다. 조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기록은 없고 다음의 몇 가지 사실로 추정할 뿐이다. 대웅전이 1690년에 완성되었고 후불탱화가 1693년에 이루어졌으며, 괘불탱화가 1759년에 이루졌으므로 대체로 1760년 후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1780년에 쓰여진 선당수습상량기에 전행팔도도승통가선육만(前行八道都僧統嘉善六萬)이라는 기록이 나와 이 그림의 시주자인 육순(六淳) 비구스님과 사형사제의 관계로 본다해도 이와 같은 추정은 가능한데, 고주후벽의 벽화로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고, 특이하게 관세음보살이 반가상을 하고 있으며, 흰 두건을 머리로부터 내려쓴 모습도 특이하고, 웃옷은 하얀 장삼이며, 아래는 하얀 바탕에 붉은 풀무늬가 있는 치마의 형태이다. 두광은 빛나는 초록색이고, 얼굴은 입이 작고 볼이 두툼하여 근엄하면서도 자비롭다. 오른쪽 발을 왼쪽 허벅지에 올리고 손은 자연스럽게 두 무릎 위에 얹은 반가상인데, 그 자세가 무척이나 편안해 보인다. 보살의 오른쪽에는 관음보살의 상징인 감로병도 있다.
그 위에는 극락조가 앉아있어 극락임을 상징하고 자비를 실현한 국토가 극락임을 상징하고 있다. 관세음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남순동자가 합장을 하고 서 있으나 매우 불안해 보이고 합장한 무습은 조금은 어색하고 전체의 균형에 비해 너무 작게 묘사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조선 중기의 사찰에서 이러한 벽화는 그 유래가 흔치 않으며 소중히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조사전내부의 불상
조사전 안의 조사 영정
팔상전을 들어가는 문이 원형형식으로 조성 되어 있어 전각을 숨겨둔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탱화를 모시는 곳인데, 흥국사의 팔상전에는 팔상탱화가 없고 영조 17년(1741)에 그린 영산회상도가 모셔져 있다. 원래 팔상탱화를 모시고 있었으나 1970년대 후반에 도난당했다. 팔상전에 영산회상도를 모신 것은 이 건물이 이전에 대웅전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팔상전은 숙종 16년(1690)에 대웅전을 확장 불사하면서 나온 목재들을 수습하여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가로 3.1m, 세로 3.2m인 이 영산회상도는 대웅전의 그것과 견주었을 때 작고 단순화된 편이며 색상도 명쾌하지 않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다포 양식을 취했으며, 어간문은 4합이며 양옆은 3합문으로 빗살문과 정(井)자문을 하였다. 팔작지붕으로 영취산에서 흘러 내려온 뒷산 봉우리와 잘 조화를 이룬다. 내부는 비교적 단순하며 고주를 세우고 탱화와 불상을 안치했으며 닫집도 비교적 대웅전에 비교하면 단순하다 .
팔상전은 법화 신앙이 행해졌던 사찰에 많이 지어졌다. 법화경의 주존불인 석가여래께서 중생들에게 보이신 일생을 크게 8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한 것을 팔상(八相)이라고 한다.
1. 도솔천에서 사바 세계로 내려 오심(從兜率天退)
2.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시는 모습(入胎)
3. 인간의 근본 고통을 체험하시는 모습(住胎)
4. 인간의 고정 관념을 깨고 출가하시는 모습(出胎)
5. 고행을 행하면서 구도의 길로 나아갔던 모습(出家)
6.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신 모습(成道)
7. 바로 사는 길을 가르치시는 모습(轉法輪)
8. 중생들과 똑같이 육신을 벗고 입멸에 드시는 모습(入涅槃)
흥국사의 팔상전은 '사적기'에 "대웅전을 완성한 뒤에 더 많은 대중들이 모여들어 팔상전의 재건을 열망하므로 옛날 법당에 썼던 나무들을 수습하고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여 팔상전을 지었다." 라고 하였다. 1624년 계특스님이 지었던 대웅전을 헐어 1690년 통일스님이 확대 중건하실 때 대웅전의 철거 잔여 목재를 수거하여 지은 건물이라는 것이다.
팔상전의 석가모니 후불탱화는 중앙의 본존불을 크게 표현하였고, 그 위쪽 좌우에 약사 여래와 아미타불을 작게 그렸으며, 왼쪽 협시로는 준제, 금강장, 관음, 미륵, 문수보살과 10대 제자 가운데 가섭, 사리불, 부루나, 가전연, 우바리 등 제자상과 함께 대법천왕 과 동방 및 남방 천왕이 있다. 오른쪽에는 지장, 제장애, 대세지, 제화갈라, 보현보살과 함께 10대 제자 가운데 아난, 수보리, 목건련 아나율, 나후라 존자와 재석천왕과 북방 및 서방천왕이 그려져 있다.
팔상전의 닷집
흥국사의 문고리 걸이
응진당은 나한당이라고도 하며 석가모니의 16제자를 모시는 당우이다. 나한은 아라한의 약칭이며 아라한은 응진(應眞)의 자격을 갖춘 분들이라 한다. 석가모니의 제자들을 모시는 전각이기 때문에 응진당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모시고 주위에 16나한의 소상을 모시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흥국사 응진당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고 좌우에 협시불을 모셨으며, 좌우로 16제자의 소상을 모신데 더하여 나한도를 함께 봉안했다. 나한전은 나한도가 완성된 시기인 1723년경에 이미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1753년 경파대사가 중수하였고, 또한 1963년 응봉대사가 다시 중수했다고 한다.
응진당은 정면3간, 측면2간으로 되어 있으며, 팔상전과 더불어 대웅전 뒤편 언덕에 따로 영역을 이루고 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정면만 부연을 달아낸 겹처마로 조성했고 배면은 홑처마로 구성했다. 기단은 막돌을 가지런히 2단 쌓은 두벌대를 조성했으며, 중앙에 응진당에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초석은 막돌초석을 사용했으며 기둥은 배흘림기둥을 사용했다. 기둥상부를 결구해주는 창방을 사용함에 있어 창방뺄목을 매우 길게 외부에 노출시킨 것이 특징적이다. 공포는 기둥위에만 짜서 올린 주심포식 건축이다. 출목은 외1출목이며, 내부는 보아지로 처리했다. 쇠서의 형태 역시 부연과 마찬가지로 전면과 배면이 서로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정면 공포의 경우, 헛첨차의 쇠서가 앙서형으로 돌출한 반면, 배면의 헛첨차는 쇠서가 없이 살미가 직절되어 있다.
가구는 무고주 5량의 가구를 채택했는데 삼분변작에 가깝게 구성했다. 천장은 종보 높이에서 마감하고 있는데, 종량부분에는 우물천장을 사용했으며, 벽면에서 종보 높이까지는 빗천장을 사용해 내부공간을 넓게 보이도록 조성했다. 우물천장은 일반적인 연화무늬로 장식했으나, 빗천장의 경우는 화병과 더불어 피어오르는 꽃을 표현하기도 하고 기하학 무늬를 표현하기도 하는 등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단을 조성하는데 있어 입구를 제외한 벽면을 따라 조성했으며 중단을 3단으로 구성했다. 다만 석가모니불을 모신 불단은 중단을 4단으로 구성해 위계를 고려했다. 또한 응진당에 사용한 불단은 별다른 채색이나 장식이 없이 수수하게 만들었다.
공양보살의 가쁜한 발걸음
법고는 종각에 있다. 가죽에는 문양이 없고, 몸체에는 용과 구름문양이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사자형상의 짐승이 법고를 받치고 있다. 흥국사는 보조국사가 1195년(고려 명종 25)에 창건한 사찰이며 법고는 종각에 있다. 가죽에는 문양이 없고, 몸체에는 용과 구름문양이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사자형상의 짐승이 법고를 받치고 있다. 법고(法鼓)는 법을 전하는 북이다. 법고는 보통 쇠가죽으로 만드는데 짐승을 비롯한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하여 울린다고 한다. 법고는 축생(畜生)의 제도를 위하여 친다. 짐승을 비롯한 땅에 사는 중생을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하여 법고는 예불시간에 가장 먼저 울려 퍼진다. 나무로 된 두 개의 북채로 마음 ‘心’자를 그리면서 두드린다. 법고의 몸통은 잘 건조된 나무로 구성하고,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양면은 소가죽을 사용한다. 북의 몸체 부분에는 보통 용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며, 두드리는 부분의 가운데는, ‘卍’자를 태극 모양으로 둥글게 그리기도 하고 진언(眞言)을 적어 넣기도 한다.
목어
운판
법고를 이고있는 사자형상의 동물 해태가 아닐지?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사천왕은 원래 고대 인도종교에서 숭상되던 귀신들이었는데 석가모니에게 귀의해서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흥국사에 천왕문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805년에 기록된 ‘흥국사천왕중수개채기(興國寺天王重修改彩記)’가 있어 이미 이전에 천왕문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사천왕상은 매우 거대하게 조성되어 있는데, 천왕문에 걸려있는 ‘천왕문사천왕상홍교중창기(天王門四天王像虹橋重創記)’으로 추정하건데 1982년에 새롭게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천왕문 정면 3간, 측면 2간의 평면이며, 겹처마, 맞배지으로 조성된 건물이다. 중앙 어간은 통로로 사용되고 있으며, 좌우의 협간에 각각 2기의 천왕상을 봉헌했다.
기단은 막돌을 사용해서 만들었고, 초석 역시 막돌초석을 사용했다.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했고, 약간의 흘림을 두었다. 공포는 응진당, 무사전과 매우 유사한 형태의 주심포 건축이다. 가구는 무고주 5량으로 이루어졌고, 대공은 판대공을 사용하고 있다. 오른쪽 협간에 모셔진 사천왕은 지국천왕과 다문천왕인데, 동쪽을 관장하는 지국천왕은 오른손에 칼을 쥐고 있으며, 북쪽을 관장하는 다문천왕은 양손으로 비파를 들고 있다. 또한 왼쪽 협간에 모셔진 사천왕은 증장천왕과 광목천왕인데, 남쪽을 관장하는 증장천왕은 오른손에 용을 쥐고 있으며, 서쪽을 관장하는 광목천왕은 오른손에 창을 쥐고 있다.이와 같은 사천왕상 배치는 사찰이 전체적으로 서북향이기 때문에 절대향과는 부조화를 이루고 있으나, 순례자의 방향이나 의중에 따라 다르게 보일것이라 생각된다.
천왕문을 거쳐 나오면서 2012년은 가정의 화목과 개인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임진왜란 당시의 승병들의 혼이 깃들어진 흥국사에서 에너지를 가슴에 품고 하산하였다.
그리고 흥국사를 순례할때는 유난히도 반들거리는 대웅전 문고리를 잡고 소원을 빌어 보시길 바랍니다.
소원을 한가지 들어준다는군요_()_
'♠寺刹巡禮'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테마(Thema)가 있는 사찰순례(4-금산사) 1 (0) 2012.02.13 백제의 미소 (0) 2012.02.12 [스크랩] 논산 관촉사(은진미륵) (0) 2012.01.29 독성전 공양주를 찾아서 범어사로... (0) 2012.01.15 용과 족제비의 술래잡기를 찾아서 불갑사(佛甲寺)로 (0) 2012.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