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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신사(歸信寺) 남근석을 찾아서...
    ♠寺刹巡禮 2012. 2. 15. 17:41

    테마(Thema)가 있는 사찰순례(6-귀신사)

     

    귀신사(歸信寺,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세운 절로 8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

    귀신사(歸信寺)는 676년(문무왕 16)에 의상대사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백제 법왕 때 왕실의 내원사로 처음 세워졌다는 주장도 있다.  그 후 통일신라 말기 도윤(道允)이 중창한 뒤 귀신사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원명국사[1090~1141]가 중창하였다. 원명국사는 숙종의 넷째 아들로 8세 때 대각국사 의천에게 출가하여 1122년(예종 17)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었으나, 이자겸(李資謙)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로 들어왔다. 이 무렵에는 구순사(狗脣寺) 혹은 구순사(口脣寺)로 불렸다. 이름이 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는데, 절 주위의 지형이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구순혈형(狗脣穴形)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전하지만 명확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1601년(선조 34) 승려 염화(拈化)·신허(信虛)가 부분 중수를, 1624~1633년 승려 덕기(德奇)가 대대적인 중창을 하여 여래삼존불을 봉안하고 승당·정문·미륵보전·시왕전과 천왕문을 건축하였고, 승려 도헌(道軒)이 나한전을 지었다. 1657년(효종 8)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1680년(숙종 6) 전각을 중수하였으며, 1707년(숙종 33) 승려 두감이 대웅전을 중수, 1715년(숙종 41)에는 팔상전을 중수하였다. 1823년(순조 23)에는 대적광전을, 1873년(고종 10)과 1884년(고종 21)에는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1934년에는 대적광전 등을 중수한 뒤 다시 귀신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금산사의 유명세에 가려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신라시대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창건된,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사찰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국신사(國信寺)였다.

    화엄십찰(華嚴十刹)이란 새로운 통일국가의 지배이념이 된 화엄사상(요체는 모든 것을 하나로 끌어 앉는 원융무애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사찰을 말한다. 수도가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려 한 효율적인 국토 경영과도 관련이 깊다.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화엄교학의 터전을 연 이후 그의 제자들은 전국에 퍼져서 수 많은 화엄사찰들을 건립했다.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10개의 사찰에는 ‘화엄십찰(華嚴十刹) ’이란 이름이 붙여졌고, 화엄사(華嚴寺), 부석사(浮石寺, 해인사(海印寺), 갑사(甲寺), 범어사(梵魚寺), 불국사, 등은 지금도 대단한 가람들이며, 현재는 거대한 절터만 남아있는 서산의 보원사도 포함되어 있다.

    최치원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의하면 태백산 부석사(浮石寺), 원주 비마라사(毘摩羅寺),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팔공산 미리사(美理寺), 계룡산 갑사(甲寺), 웅주 가야협 보원사(普願寺), 삼각산 청담사(靑潭寺) 10개 사찰을 말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원주 비마라사 대신 전주 무산 국신사(國信寺, 현재 귀신사)를 십찰의 하나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이 중 부석사와 비마라사, 해인사, 옥천사, 범어사, 화엄사 6개 사찰만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사찰은 의상이 전파한 화엄사상을 널리 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귀신사가 이러한 쟁쟁한 사찰들과 함께 화엄십찰의 하나였다는 것은 얼핏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화엄십찰로 이름 붙어진 사찰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그 지리적 위치이다.

    통일신라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는 물론 경주를 중심으로 한 일대 지역이었다. 공통적으로 화엄십찰에 속하는 사찰들은 중심 지역을 벗어난 변방에 자리잡고 있었다.

    두번째 부석사는 옛 고구려와의 경계지역에, 해인사와 화엄사는 옛 백제와의 경계에, 불국사와 범어사는 왜(일본)와의 경계지에, 그리고 갑사 보원사 귀신사 등은 아예 백제 고토의 중심에 자리잡았다. 특징으로 명칭은 화엄십찰이지만, 실제로 수용한 신앙은 화엄이 아닌, 아미타신앙(부석사), 정토신앙(불국사), 미륵신앙(범어사) 등으로 범종파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삼국이 통일이 된 이후에 국가적 과제는 분열되었던 민족문화를 하나로 합칠 수 있는 통합적 사상이었고, 모든 불교를 포용하는 화엄학이야 말로 통합의 불교로서 신라의 국가적 신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화엄불교는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분열의 갈등이 가장 심했던 옛 고구려나 백제 지역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포교 활동을 벌였고, 그 가운데 지역적 핵심 가람들이 후일 화엄십찰로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통합의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비록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복속되었지만, 여전히 옛 백제민들은 정서적 사상적으로 신라를 거부하고 있었다. 특히 미륵신앙의 중심지인 모악산 일대에는 미래불 신앙이 신라 정부에 대한 비판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우려가 다분했다.

    귀신사(歸信寺)는 바로 이러한 정치 사회적 배경에서 세워지게 되었다. 지역적 반발이 심했던 만큼, 귀신사 창건은 신라 정부나 의상계 화엄종에서 직접 간여하게 된다.

    재원도 신라에서, 목수와 건축가들도 신라인들이었을 것이다. 사상적 배경 뿐 아니라, 건축과 기술마저도 신라의 문화를 고스란히 백제 땅에 재현한 결과가 되었다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김봉열교수의 설명.

    하지만 귀신사를 창건했던 정치적 목적은 실패하고 말았다. 신라에 대한 이 지역의 반감이 격렬했기 때문이다.

    귀신사(歸信寺) '대적광전(보물 제826호)'

    대적광전은 앞면5칸,옆면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앞면 3칸 문에는 빗살무늬 창호를 달았고 왼쪽 끝칸에는 퇴칸으로 벽이 만들어져 있다.

     

    귀신사(歸信寺) 대적광전의 '소조 삼존불상'

    대적광전 법당에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셨으며, 좌 우 협시불로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을 모셨다.

    이곳에 모셔진 삼존불상은 모두 흙으로 소조된 독특한 양식이라 학계에서도 주목하고 있는데 그냥 볼때에는 청동불상과 다를바 없지만, 1980년에 금박으로 다시 입혔다고 한다.

    금산사 역시도 소조 불상이였는데 규모가 큰 불상으로서 보존가치가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귀신사(歸信寺) '석수(전라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64호)'

    다소곳하게 엎드려 있는 귀여운 사자상 등 위에 남근석이 놓여져 있다.

    남근석을 두는 사찰은 백제 왕실의 내원사찰(內願寺刹)뿐이므로 귀신사(歸信寺)도 백제시대의 사찰일 것이라고 한다.

    귀산사에는 예스러운 맛이 배어 있는 건물과 연꽃무늬로 된 받침대, 동물 모양의 돌 등 많은 석물들이 경내에 널부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귀신사 석수(石獸, 전북 유형문화재 제64호)는 3층 석탑 앞쪽에 놓여 있는 문화재로, 웅크리고 있는 사자상 등 위로 남근석(남성의 생식기 모양으로 다듬은 돌)이 놓여 있다.

     이 석수는 불교와 남근숭배사상이 어우러진 신앙 미술품으로, 앉아 있는 사자상의 등 위에 남근석을 올려 놓아 예술 감각이 뛰어난 조각품이다. 무엇보다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된 게 특징이다.

     

    사찰 내에서 이러한 조각상을 찾아보기란 매우 드물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제기되고 있다.

    불교와 무속이 합쳐진 귀신사의 석수와 남근 조각품은 이곳 사찰명인 국신사(國信寺), 구순사(狗脣寺), 귀신사(歸信寺)의 여러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풍수지리에 의해 이곳 지형이 구순혈(狗脣穴, 개의 음부를 상징)이므로 터를 누르기 위해 세워졌다는 설이 있다. 음란한 기운을 누르면 마을이 평온의 안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또 한가지는 백제 왕실의 내원사찰(內願寺刹)로, 남근과 합쳐진 돌사자상을 세웠다는 설이 있다. 박희선씨는 백제 법왕(法王) 때 왕실의 내원사로, 이들이 처음 세워졌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석수의 남근석을 들고 있다.

     

    서쪽을 향해 웅크리고 앉은 이 돌사자의 길이는 158cm이고, 높이는 62cm이다. 등위 중간 부분에 우뚝 솟은 남근석은 2단으로, 아랫부분의 길이는 72cm이고 윗부분은 40cm이다.

    만든 시기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과 사실적인 조각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걸작이다.

     

    훼손되어 널부러져 있는 기단석과 석조물

     

    명부전 내에는 육환장을 들고 있는 지장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의 좌우로는 도명존자와 시왕이 세워져 있는데, 시왕마다 연꽃을 들거나 문서를 들고 있는 동자상들이 각각 시립해서 서 있으며 입구에는 금강역사 1쌍이 세워져 있다.

     

     

     

     

     

     

    귀신사(歸信寺) '3층석탑(전라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

    3층석탑은 높이가 454cm이며, 화강암으로 세워진 정사각형의 석조물이다.

    고려시대에 세워졌으나 백제 석탑 양식을 하고 있는  이 석탑은 꼭대기의 상륜부가 크게 손상되어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적광전에 수미단을 물고 있는 용조각

     

    수미단의 용조각을 보고 사진을 촬영하다가 비구니 스님에게 거부를 당하고 그만 하산하였다.

    남근석이 있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인근에 여근석이 있거나 여자를 상징하는 지형 등이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귀신사(歸信寺)에는 귀신이 살고 있지 않았으며 삼국시대의 혼란한 시기를 역사가 말해주는것 같다.

    지금 미륵불을 모시는 금산사가 예전에는귀신사(歸信寺)의 말사라고 했는데 금산사는 융성과 보존이 잘된 상태로 유지되고 있으나 귀신사(歸信寺) 법당앞에 서있는 낙엽 떨어진 고목만큼이나 외롭고 쓸쓸하게 순례객을 맞이 하고 있었다.

    대적광전 역시 특이한 형식과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보존되어 있어 금산사의 형식과 또 다른  묘미를 느낄 수있었으며 석탑을 돌며 소원을 빌어 보면서 쓸쓸함을 간직한채 산문밖을 나왔다.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 화엄십찰[華嚴十刹]
    신라 때 화엄사상을 널리 펴던 열 곳의 사찰.
    신라의 의상(義湘)이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세운 사찰이다. 최치원(崔治遠)이 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과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史)》에 절 이름이 나온다. 《법장화상전》에 의하면 태백산 부석사(浮石寺), 원주 비마라사(毘摩羅寺),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팔공산 미리사(美理寺), 계룡산 갑사(甲寺), 웅주 가야협 보원사(普願寺), 삼각산 청담사(靑潭寺) 10개 사찰을 말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원주 비마라사 대신 전주 무산 국신사(國信寺:현재의 귀신사)를 십찰의 하나로 여기기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이 중 부석사와 비마라사·해인사·옥천사·범어사·화엄사 6개 사찰만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사찰은 의상이 전파한 화엄사상을 널리 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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