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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생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日念苾 2012. 2. 6. 14:38

     

     

    방생(放生)이란 죽어가는 생명(生命)을 살려주는 것입니다.
    병들은 중생(衆生)을 구호(救護)하고 가난한 중생(衆生)을 구호(救護)하며 윤회중생(輪回衆生)을 해탈(解脫)시켜 주는 것이 방생(放生)입니다. 그러므로 살려주는데 특별한 근거(根據)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이류중생에게 삼귀의례를 꼭 들려주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불교(佛敎)에서 방생(放生)을 하는 것은 죽어가는 생명(生命)을 건져 살리는 뜻 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리심(菩提心)을 발하여 다시는 윤회악도(輪回惡道)에 물들지 않게 하고 설사 자기 서원에 의하여 윤회(輪回)에 빠졌더라도 그 윤회(輪回)에 속지 않게 하기 위하여 법문을 일러주는 것으로 방생(放生)의 체를 삼기 때문에 형식적이나마 이러한 의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범망경 (梵網經)·(금광명경 金光明經)

    연지대사일곱가지불살생 (蓮池大師七種 不殺生)

    첫째는 생일(生日)에 살생(殺生)하지 말라.
    상서(尙書))에 가라사대 슬프다 부모시여 나를 낳아 수고하셨다 하셨으니 내 몸이 출생(出生)하든 날은 어머님께서 거의 죽을 뻔 하든 때라 이 날은 결코 살생(殺生)을 경계하며 재계를 가지고 널리 선사(善事)를 행하여 선망부모로 일찍이 초승(超昇)을 얻게 하고 현재 부모로 복수를 증장케 함이어늘 애닲다. 어찌 하야 어머니 곤란 겪은 경위를 잊고 망녕스런 생명을 살해(殺害)하며 위로 부모(父母)에게 누를 끼치고 아래로 자기 몸에 이롭지 못하게 하는고, 이것을 온 세상이 습관(習慣)이 되어 그른 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痛哭)하고 장탄식(長歎息)할 일이로다

    둘째는 자식(子息)을 낳거든 살생(殺生)하지 말라
    대저 사람이 자식(子息)이 없으면 슬퍼하고 자식(子息)이 있으면 기뻐하는데 일체금수도 각각 그 새끼 사랑함을 생각지 못 하는구나 내 자식(子息)을 낳는 것은 좋아도 남의 자식(子息)은 죽게 함은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대저 어린 것이 처음 남에 적덕(積德)을 못 할지언정 도리여 살생(殺生)하야 업(業)을 짓는 것은 가정 어리석음이라 이것을 온세상이 습관(習慣)이 되어 그른 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痛哭)하고 장탄식(長歎息)할 일이로다

    셋째는 제사(祭祀) 지낼 때 살생(殺生)하지 말라.
    망령(亡靈)의 기일(忌日)과 춘추소분(春秋掃墳)에 마땅히 살생(殺生)을 경계하야 명복(冥福)을 자라게 할 것인데 살생(殺生)하야 제사(祭祀) 지내는 것은 한갖 악업(惡業)만 더할지라 대저 팔진미(八珍味)를 망령(亡靈) 앞에 놓을지라도 어찌 구천(九泉)에 가신 유골(遺骨)을 일으켜 흠양(歆饗)토록 하겠는가.
    조금도 이익(利益)은 없고 해(害)만 되거늘 이것을 온 세상이 습관(習慣)이 되어 그른 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痛哭)하고 장탄식(長歎息)할 일이로다.

    넷째는
    혼례(婚禮)에 살생(殺生)하지 말라.
    대저 혼인(婚姻)이라는 것은 생민(生民)의 시초가 아닌가.
    삶의 시초에 살생(殺生)을 하는 것은 이치가 벌써 틀린 것이요
    또 혼례(婚禮)는 길사(吉事)인데 길일(吉日)로써 흉(凶)한 일을 행(行)함이 또한 참혹치 않은가 또는 결혼식(結婚式)을 하면 반드시 부처해로(夫妻偕老)를 축사하나니 사람은 偕老하기를 원하면서 금수(禽獸)는 먼저 죽기를 좋아하는가.
    또 시집보내는 집에서 삼일(三日)동안 촛불을 끄지 않는 것은
    모녀(母女)가 서로 갈린 것을 앗기나니 사람은 이별(離別)을 괴롭다 하면서 금수(禽獸)는 이별(離別)을 낙으로 하든가 혼례살생(婚禮殺生)에 온 세상이 습관(習慣)이 되어서 그 잘못됨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痛哭)하고 장탄식(長歎息)할 일이로다.

    다섯째는 연회(宴會) 할 적에 살생(殺生)을 말라.
    양진미경(良辰美景)에 주빈(主賓)이 상대하여 담담(淡淡)한 다과(茶果)와 소식채갱(蔬食菜羹)이 말근 취미에 방해(妨害)됨이 없거늘 어찌 살생(殺生)을 많이 하여 목을 따고 배를 가름에 슬픈 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하니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야 어찌 비참(悲慘)하지 아니하랴.

    만일 식탁에 아름다운 맛이 도마 위에 고통(苦痛)으로 찌들어 왔구나 하야 저에 극한 원한(怨恨)으로 나에 극한 환락(歡樂)을 작만 하였거니 생각하는 동시에 비록 먹더라도 목이 메일 것이어늘 연회살생(宴會殺生)에 온 세상이 습관(習慣)이 되어 그 잘못됨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통곡(痛哭)하고 장탄식(長歎息)할 일이로다.

    여섯째는 기도(祈禱)에 살생(殺生)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병(病)이 들 때 살생기도(殺生祈禱)하여서 복(福)받기를 바랄 뿐이고 자기가 기도(祈禱)하는 목적(目的)이 죽기를 면하고 살기를 구(求)하는 줄 생각지 못함 이로다. 남의 목숨을 죽여다가 나의 목숨을 누리고져 함이 벌써 천리(天理)에 어기지 않는가. 목숨은 누리지도 못하고 살생업(殺生業)만 갖추는 것이다. 다시 살생(殺生)하야 자식(子息)을 구하고 살생(殺生)하야 재물(財物)을 구(求)하고 살생(殺生)하야 벼슬을 구하면서 그 아들과 재물(財物)과 벼슬이 다 본인의 분정(分定) 한 것이고 구신(鬼神)의 능력(能力)이 아님은 알지 못 하는도다 어찌 타원대로 되게 되면 이는 귀신(鬼神)이 신령(神靈)하다 하야 더욱 믿고 더욱 행(行)하나니 참으로 통곡(痛哭)하고 장탄식(長歎息)할 일이로다.


    일곱째는 직업(職業)을 경영(經營)함에 살생(殺生)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의식을 위해서 혹 전렵(佃獵)도 하며 혹 고기도 잡으며 혹 소도 잡고 개도 잡아서 생계(生計)를 하지만은 나는 생각하기를 이 노릇을 안하더라도 밥 먹고 못 입어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노라. 살생(殺生)으로 직업(職業)을 시작하면서부터 천리(天理)를 어겼을 따름이라 지옥(地獄)에 깊은 인(因)을 심고 내세에 악보(惡報)를 받음이 이보다 심함이 없거늘 어찌하여 따로 생계(生計)를 구(求)하지 못 하는 고통(苦痛), 참으로 통곡(痛哭)하고 장탄식(長歎息)할 일이로다

    방생(放生)의례는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반드시 삼귀의례(三歸儀禮)를 들려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중국(中國)에서는 예로부터 고승(高僧)들이
    삼귀의례(三歸儀禮)를 귀의불(歸依佛)은 지옥도(地獄道)를, 귀의법(歸依法)은 아귀도(餓鬼道)를, 귀의승(歸依僧)은 축생도(畜生道)를 면한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잘못 행해진 방생(放生)은 그로 인해 더 많은 토착동물이 피해를 보고 죽음을 당한다. 새로운 자연파괴(自然派壞)로 둔갑(遁甲)하고 있는 방생(放生) 이것이 진정한 방생(放生)의 의미일까?



    사찰(寺刹)에서 많이 방생(放生)하던 청 거북이는 생태계(生態係)의 날강도가 되어 우리 토종(土鐘) 어류(魚類)를 잡아먹어 골치덩이 신세로 전락했다.


    불교경전(佛敎經典) '범망경(梵網經)'에서 가르치는 방생(放生)이란 '죽음에 처한 생명(生命)을 방편으로 구호(救護)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방생(放生)하는 과정에서 놓아주기 위해 새로운 생명(生命)을 포획(捕獲)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거나, 외국산 물고기를 방생(放生)해 생태계(生態係)를 교란하는 등 사회적(社會的)으로 적잖은 문제(問題)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는 곤경(困境)에 처한 생명(生命)을 자부심(慈悲心)으로 놓아준다는 방생(放生)의 본래 뜻을 저버리고 방생(放生)으로 얻어진다고 믿는 복(福)과 이득만(利得)만 구(求)하려는 인위적(人爲的)인 행위(行爲)로 오히려 불교(佛敎)의 근본정신(根本精神에)도 어긋난다 하겠다.

    이렇듯 형식(形式)에만 집착해 방생(放生)의 본래 취지(趣旨)가 일부 퇴색(退色)하고 있는 현실(現實)이지만, 방생(放生)은 자비(慈悲)와 생명존중(生命尊重)의 표현(表現)이자, 예부터 내려온 전통(傳統) 미풍양속(美風良俗)의 하나로서 종교(宗敎)를 떠나 방생(放生) 자체의 취지(趣旨)를 살리고 친환경적(親環境的)인 방생(放生)은 적극(積極) 장려할 필요가 있다. 올바른 방생(放生)은 우선 결과(結果)에 대한 책임(責任)을 고려한 방생(放生)이어야 하고, 자연(自然) 생태계(生態係)와 조화(調和)할 수 있는 방생(放生)이어야 한다. 특히 물고기를 풀어주는 방생(放生) 방식은 반드시 재고(再考)해야 한다. 이미 일부 사찰(寺刹)이나 단체(團體)에서 하고 있는 겨울 철새 먹이 주기나 다친 야생동물(野生動物)을 치료(治療)해 풀어주는 형식의 방생(放生)이 그 좋은 예다. 또한 방생(放生)을 폭넓게 해석해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베풂을 전하는 형식(形式)도 확산(擴散)되고 있다.

    정월엔 전국에서 많은 방생(放生) 의식이 열릴 것이다.

    조계종(曹溪宗)은 이미 2001년 방생(放生) 지침서(指針書)를 전국(全國) 사찰(寺刹)에 내려 보내 친환경(親環境) 방생(放生)을 유도하고 있으며, 현재 물고기 방생(放生)은 거의 시행(施行)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生命)의 존귀(尊貴)함을 기반(基盤)으로 하여 자비심(慈悲心)을 실천(實踐)하는 방생(放生)이 자신만의 공덕(功德)을 쌓는 것을 넘어 자연(自然)과 생명(生命), 타인(他人)과 사회(社會)가 조화(調和)와 공생(共生)을 이룰 수 있는 방생(放生)이 되기를 기대(期待)하며, 방생(放生)의 공덕으로 한량없는 복덕을 쌓고 생명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연민이 방생(放生)의 인연(因緣)을 맺어 모든 만물(萬物)이 평화롭게 공존(共存)하기를 다시 한 번 기원(祈願)한다.

    “잘살아가는 물고기를 잡아서 방생(放生)하는 방생(放生)은 무의미(無意味) 하다고 본다.”고통(苦痛)에서 고통(苦痛)을 追加하는 방생(放生)이라고 생각한다.


    방생(放生)의 대안을 몇가지 제안해 본다.

    첫째 나무를 심는다.

    절이 있는 곳은 산이 많다. 그 산에 나무 한그루를 심는 것이다.
    그것도 여러 생명(生命)을 잘 보존(保存)하고 자연환경(自然環境)을 좋게 만드니 이것 또한 방생(放生)이 아닐까?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혜택(惠澤)을 주는가!


    둘째 기부(寄附) 보시이다.

    일정 금액(金額)을 고아원(孤兒院)이나 양노원(養老院)에 기금ㄴ(基金)으로 내는것이다.
    힘들게 사는 사람을 살리는 것도 방생(放生)이 아닐까?


    섯째 방생(放生)과 자연(自然)의 친화(親和)이다.

    선(善)을 행(行)하고 덕(德)을 쌓기 위해 행하는 방생(放生)이지만, 무작정 살아있는 생물(生物)을 방생(放生)한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방생(放生)하려는 곳에 방생(放生)하는 어종(魚種)이 서식(棲息)할 수 있는 환경(環境)인지, 방생(放生)하는 어종(魚種)이 장소(場所)에 적합한 어종(魚種)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넷째 인간(人間)이나 자연(自然)에 의해 고립(孤立)이나 포획(捕獲)된 물고기, 동물(動物) 등을 돌려 보내주는 것이다.

    산짐승이 덧에 걸려 있는 것을 풀어주거나 물고기가 장마에 웅덩이에 잘못 들어가 물이 말라갈 때 살기 좋은 곳에 옮겨 주는 것도 좋은 방생(放生)입니다.

    특히 겨울철 눈이 많이 내려 먹이감이 없어 굶어죽는 동물(動物)들이 많다. 사찰(寺刹)에서 사찰(寺刹)이나 사찰(寺刹)로 통(通)하는 도로주변(道路周邊)에 먹이감을 제공 하는것 또한 방생(放生)이라고 생각한다.


    방생(放生)도 마찬가지만 자연(自然)과 친화적(親和的)이여만 공생공존(共生共存) 할 수 있다.

    환경단체(環境團體)들이 주장(主張)하는 환경보호(環境保護),자연보호(自然保護)는 원초적(原初的)이고 원시적(原始的)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는 자연(自然)과 더불어, 아니면 자연(自然)속으로 스며드는 정책(政策)들이 필요(必要)하다.

    자연(自然)은 사람에게서 무엇을 취 할것 이며 사람은 그 자연(自然)에게 이로움을 주고 받는 상호 보완하여 생태계(生態係)를 보호(保護)하는 것이 참 방생(放生)이요 환경보호(環境保護)가 아닐까 한다.

    자연파괴로 인한 인과응보(因果應報)는 바로 우리 인간들이 되돌려 받는다는 것을 명심(銘心) 또 명심(銘心)해야 한다.


    -원광 합장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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