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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조금 밑지고, 내가 먼저 베풀며...
    ♤좋은글 2012. 1. 30. 07:00

     

     

    久而敬之(구이경지)

     

    아름답고 원만한 인간관계의 핵심은 '공경'
    '부인과 이혼하라' 명 받은 안평중의 단호한 거절 "조강지처 버릴 수 없다"

     

    《논어(論語)》‘공야장편’에서 공자(孔子)님은 구이경지(久而敬之)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공자는 제(濟)나라 안평중(晏平仲)이란 사람을 평가하면서 그의 가장 위대한 장점을 주변과 아름답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원만한 관계의 핵심은 공경이라고 강조하신 것이죠.

    「안평중(晏平仲)은 선여인교(善與人交)로다!

    안평중이란 사람은 주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구이경지(久而敬之)여!

    그것은 주변 사람과 오랜 시간 교류해도 서로 공경하기 때문이다!」

    안평중은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했습니다.

    오랫동안 사람들과 사귀어도 그들이 안평중을 공경하는 마음이 한결같았습니다.

    사람이 서로 부대끼다보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안평중을 공경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역시 다른 사람을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남을 대하는 행실의 처음과 끝이 같으니 사람들이 그를 칭송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먼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야 오랜 시간이 흘러도 우정이 변하지 않고 더욱 돈독(敦篤)해지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를 실천하려면 욕심을 버리고 천리(天理)를 존중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천리를 존중한다는 것은 말로는 쉬울 수 있으나 행동에 옮기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칠정(七情 : 喜 怒 哀 樂 愛 惡 欲)이 움직이면 욕심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잘 살고 출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재(內在)된 욕(欲) 그 자체가 아니라 욕의 발현(發顯) 방식이 정당성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안평중이 사람과의 사귐에서 오래토록 공경을 잃지 않은(久而敬之) 연유(緣由)는 이 천리를 존중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안평중은 제나라에서 3대에 걸쳐 왕을 모신 명신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안평중의 이름은 안영(晏瓔)이고 존경하는 의미에서 안자(晏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공자와는 악연이라면 악연일 수 있습니다. 공자가 제나라에서 재상으로 등용되는 것을 막은 장본인이 안평중입니다. 그러니까 공자는 안평중의 반대로 제나라에서 정치적인 뜻을 펼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안평중의 인물됨을 평가한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 도대체 안평중은 어떤 강점(强點)이 있었기에 공자로부터 칭찬을 받고 시간이 지날수록 남들한테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제가 옛날에 ‘열국지(列國誌)’를 읽었을 때의 기억이 납니다. 안평중은 키가 작고 외모는 볼품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제나라 임금이 안평중에게 사랑하는 공주를 내려 줄 터이니 부인과 이혼을 하라고 명을 합니다. 그러나 안평중은 임금의 명령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나와 함께 평생을 고생하며 살아온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늙었다고 버릴 수는 없습니다. 공주를 내려주신다는 명을 거두어 주소서!”

    어떻습니까? 젊고 아리따운 공주와 부마(駙馬)라는 자리는 섣불리 물리치기란 쉽지 않은 유혹(誘惑)입니다. 비록 늙었지만 평생을 함께 살아온 조강지처에 대한 믿음과 약속, 공경이 한결 같은 사람이 아니면 어림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 사람이 서로 사귀는데 그 좋은 인연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은 대개 유념(有念)할 자리에 유념하지 못하고 무념(無念)할 자리에 무념하지 못하는 연고(緣故)라고《대종경(大宗經) 인도품(人道品)》16장에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유념할 자리에 유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무슨 방면으로든지 남에게 은혜(恩惠)를 입고도 그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 입은 사람이 나에게 섭섭하게 대할 때 의리(義理) 없이 상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에게 베풀 때에는 무엇을 바라고 주면 안 됩니다. 그냥 베푸는 것이죠. 그야말로 무상(無相), 상(相)없이 주는 것입니다.

    둘째, 무념할 자리에 무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무슨 방면으로든지 남에게 은혜를 준 후에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입은 사람이 혹 나에게 잘 못 할 때에 전날에 은혜 입혔다는 생각이 남아 있어 미움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좋은 인연이 오래가지 못하고 도리어 원진(怨瞋 )으로 변하여 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귐에 있어 우리는 이 이치를 잘 알아서 유념할 자리에는 반드시 유념하고, 무념할 자리에는 반드시 무념하여야 그 좋은 인연이 오래가는 법입니다. 좋은 인연이 오래갈지언정 그 인연이 낮은 인연으로 변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지요? 

    그것이 한 마디로 신의(信義)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인연을 맺고 그 인연이 오래가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조금 밑지고, 내가 먼저 베풀며, 그를 위해 맨발로 뛰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인간관계의 신조(信條)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아무래도 손해만 보는 바보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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