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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찾아서 개암사開巖寺)로...♠寺刹巡禮 2012. 1. 1. 17:47
임진년 용의 해가 밝았다.
용은 부처님 법을 지키는 수호자로 때로는 해학과 익살스런 모습으로 그려진 신비한 능력의 상상적 동물로 사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법당안의 불단의 닫집, 수미단, 기둥, 대들보, 창문, 공포, 천정, 외벽, 지붕 등을 살펴보면 다양한 형태의 용을 만날 수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634년(무왕 35) 백제의 왕사(王師) 묘련(妙蓮)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이다.
사찰의 이름을 ‘개암(開巖)’이라 부르게 된 배경은 뒷산 정상의 웅장한 ‘우금바위(또는 우금암)’의 전설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즉 마한의 효왕(孝王) 28년에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우(禹)와 진(陳)의 두 장사를 보내어 감독하게 하고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開巖)이라 부르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즉 우금바위에 천연석굴이 있어 그 바위를 개암이라 불렀는데, 바위의 모습이 멀리서 보면 크게 둘로 이루어진 듯하여 ‘바위가 열린 상태’라는 의미에서 ‘開巖’이라 칭했다는 구전도 있다. 대부분의 사찰이 그렇듯이 개암사 창건에 대한 역사기록도 조선후기에 편찬된 사적기(寺蹟記)에 의존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적기는 1658년 金波堂 如如스님이 엮은 『개암사중건사적기(開巖寺重建寺蹟記)』와 1640년 월파자(月坡子) 최경(崔勁)이 지은 『법당중창기문(法堂重創記文)』, 1941년 주봉당(舟峰堂) 상의(尙毅) 스님이 편찬한 『개암사중건연혁기(開巖寺重建沿革記)』 등이 있다. 그 내용을 시기별로 정리하면, 먼저 『법당중창기문』의 「별기(別記)」에 인용된 원효방상량문(元曉房上樑文)에는 백제와 관련된 이 지역의 역사적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백제 멸망 직후 묘련의 제자 도침(道琛)이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과 더불어 이 지역에서 백제부흥운동을 펼쳤고, 개암사는 원효방(元曉房)의 본사로서 백제부흥운동 당시 구심축을 이룬 장소이다. 즉 634년 묘련이 처음 설립한 후 676년에 원효ㆍ의상 스님이 우금암(禹金巖) 아래에 있는 우금굴에 머물면서 암자를 중수했는데, 이 우금굴은 이후 원효방이라 불리면서 조선시대 후기까지 개암사의 산내암자로 자리잡고 있었다. 원효스님의 자취를 지닌 원효방은 이후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시에도 등장하였으며, 7세기 중엽에 존재했다면 당시부터 개암사의 부속암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는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개암사의 부속암자인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에서 참선 득도한 기록이 있다.
황금전(黃金殿)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는 청련각(靑蓮閣), 남쪽에는 청허루(淸虛樓), 북쪽에는 팔상전(八相殿), 서쪽에는 응진당(應眞堂)과 명부전(冥府殿)을 지었으며, 총 30여 동의 건물을 세워 ≪능가경 楞伽經≫을 강의하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하였다.
이 때문에 산의 이름을 ‘능가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1414년(태종 14) 폐허가 된 것을 선탄(禪坦)이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황금전을 제외한 전 당우가 소실되었다.
그 뒤, 1636년(인조 14) 계호(戒浩)가, 1658년 밀영(密英)과 혜징(慧澄)이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며, 1728년(영조 4) 법천(法天)·찬견(贊堅)이 명부전을 중건하고, 1733년 하서암(下西庵)·석주암(石柱庵)·월정암(月精庵)을 중건하였다. 1737년 시왕상과 16나한상을 조성하였으며, 1783년 승담(勝潭)이 중수하였다.
1913년 화은(華隱)이 선당(禪堂)을 짓고, 1960년 대웅보전을 해체 복원하였다. 1993년 응향각을 복원하였고, 이듬해 일주문을 짓고 응진전을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안 개암사 대웅보전(보물 제292호)에서는 언제나 용틀임하는 용들의 야단법석을 볼 수 있다. 법당을 가든 메운 용은 부처님이 탄생할 때 9마리의 용이 물을 뿜어 목욕을 시킨 구룡토수(九龍吐水)에서 유래한다. 이밖에 닫집 밑에도 3마리의 용이 살고 있으니, 이 법당에는 모두 14마리와 밖의 2마리의 용이 맞이 하고 있었다.
화려하지 않아서 또 유명하지 않아서 오히려 부처님의 에너지가 더 느껴지는 사찰입니다.
능가산 일주문에는 출입하는 입구에 6개, 하산하는 문에 6개의 12지신상을 서까래에 조각하여 배치한 형식이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처음 접하는 형식으로서 신비감을 주었다.
울창한 전나무와 적송으로 입구가 형성 형성되어 있었다.
부안 개암사 대웅보전(보물 제292호)에서는 언제나 용틀임하는 용들의 야단법석을 볼 수 있다. 법당을 가든 메운 용은 부처님이 탄생할 때 9마리의 용이 물을 뿜어 목욕을 시킨 구룡토수(九龍吐水)에서 유래한다. 이밖에 닫집 밑에도 3마리의 용이 살고 있으니, 이 법당에는 모두 14마리와 밖의 2마리 2마리의 용이 맞이 하고 있었다.
화려하지 않아서 또 유명하지 않아서 오히려 부처님의 에너지가 더 느껴지는 사찰입니다.
부안 개암사 대웅전(扶安 開岩寺 大雄殿) 보물 제292호
개암사는 백제 무왕 35년(634)에 묘련대사가 세웠다고 전하는 절이다. 개암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공격을 피해 이곳에 성을 쌓을때, 우(禹)장군과 진(陳)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의 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 서쪽을 개암이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1년(1314)에 원감국사가 이곳에 와서 절을 다시 지어 큰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그 뒤에 여러번 수리가 있었다. 석가모니불상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우람한 기둥 덕에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조각기법에서도 세련미가 있는 건물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건축이다. 절 위로는 500여 m 떨어진 곳에 울금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세개의 동굴이 있는데, 그 중 원효방이라는 굴 밑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어 물이 괸다.
금색옷을 입은 목조불상(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배치)
대웅보전 처마밑에는 자그마하고 초라한 대웅보전 현판이 걸려 있었다. 현판 위의 공포 양쪽에 있는 귀면상(또깨비) 2개를 가리지 않기 위해서 작게 만들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닷집에 야단법석인 여의주를 문 용조각
다른사찰에서 찾아 볼수 없는 여의주를 문 용위의 봉황
우물반자
지붕단청
수염난 용과 봉황
산신각안에 모셔진 호랑이를 타고있는 산신령
고목에 남겨진 결실의 흔적(배가 마른 상태로 열려 있음)
개암사 전경
까치밥
대웅보전 현판
주두의 화려한 조각 솜씨(마치 종이를 오려 만든것 처럼 나무를 깍아서 모처리의 예술감 극치를 보여줌)
귀면상(도깨비모양) 다른 사찰에서는 단청으로 문양을 만들어 놓았는데 개암사에서는 나무로 조각하여 대웅보전 위에 배치함.
헤학적이고 서민적인 우리들의 모습과도 같은 16나한상
법당을 가든 메운 용은 부처님이 탄생할 때 9마리의 용이 물을 뿜어 목욕을 시킨 구룡토수(九龍吐水)에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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