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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회인유분
    金剛經 2011. 12. 6. 04:51

    법회인유분
    법회가 열리게 된 연유(緣由)

    [경전]

    法會因由分 第一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 俱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 乞食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1250인의 큰 비구 스님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공양 시간이 되자,
    가사와 발우를 수하시고 사위성에 들어가시어
    차례대로 탁발을 하신 다음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하셨다.

    공양을 마치시고는 가사와 발우를 제자리에 놓으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가부좌를 결하시고 몸을 곧게 세운 뒤 입가에 마음을 집중하시고서.)


    [강의]


    법회를 열게 된 연유(緣由)를 알리는
    바로 이 부분,
    제 1분이 금강경의 서분(序分)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금강경을 주해(註解)하신 많은 선승(禪僧)들께서는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부처님 최상의 설법이며
    32분까지의 모든 가르침이
    사실 이 제 1분에서 다 설해 마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계실만큼
    제 1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언뜻 보면 아무 것도 설한 것이 없고,
    우리가 공부해야 할 만한 그 어떤 가르침도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저 평범한 부처님의 일과를 잠깐 이야기 한 것을 가지고
    그렇게 거창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 수 있을 법도 합니다.

    평범하기 이를데없는 이러한 부처님의 일과를
    단순하게 겉모습만 본다면
    깨달음의 한 줄 작은 빛도 보기 어려울 것이지만,

    마음의 눈으로 이러한 하루 일과를 온전히 살고 계시는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다면
    수많은 선사 스님들의 그러한 고결한 안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마음의 눈을 맑게 씻고
    2500여 년 전 부처님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그 마음을 살짝 들여다 보도록 합시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여시아문(如是我聞)’
    경전을 몇 번이라도 독경하고,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경전의 앞 부분에 늘상 등장하는 이 말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경전이 부처님께서 스스로 쓰신 것이 아니라
    법문을 들은 제자가 부처님께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적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경전은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분이신 아난(阿難)존자에 의해
    쓰여졌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 경 또한 아난존자에 의해 쓰여진 경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성도(成道)하시고
    20여 년 간을 홀로 전법(傳法)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제자에게도 두 사람이 한 길로 가지 말라고 하시며
    전법의 횟불을 높이 드신 것이지요.

    그러나 20여 년이 지나고 나니
    가르침을 배우려는 스님들도 나날이 많아지고,
    또한 부처님의 연령 또한 많아지고 있었기에
    제자들이 시자(侍者)를 둘 것을 간곡히 권유하셨고,
    부처님께서는 이윽고 허락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만히 살펴보니
    아난 존자는 총명하며 기억력도 뛰어나고
    성품도 온화하였으며 외모도 출중하고
    또한 부처님의 사촌동생인지라 부처님을 곁에서 시봉하기에는
    적임자로 판단되어 부처님의 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29세에 출가하시고,
    35세에 성도하셨으며, 55세 즈음에 아난을 시자로 두었으니
    아난은 부처님께서 80세로 열반에 드실때까지
    약 25년 간을 곁에서 시봉하였습니다.

    가장 오랜 기간 부처님 시봉을 하다보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아난이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었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열반을 하시자마자
    가섭존자는 아난과 우파리존자를 위시하여
    500아라한을 모아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때 부처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었던
    아난 존자의 역할이 중요하였을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은 아난 존자가
    가르침 즉, 법을 담당하고,
    출가하기 전에 이발사였던 우파리존자가
    처음 출가하는 수행자들의 머리를 깍아준 인연으로
    율에 대하여 가장 많이 들었기에
    율을 담당하여 결집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경전을 결집할 때는 아난이 먼저 일어나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여러 대중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때 아난은 언제라도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고 시작함으로써
    내 생각대로 부처님 가르침을 함부로 이야기 하지 않고,
    부처님께 들었던 사실만을 온전히 대중에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불교 경전들이 비교적 지금에 이르기까지
    큰 혼란됨 없이 잘 이어져 내려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한 가지 말을 들었을 때,
    백이면 백 다 제각기 자기 색안경으로 걸러 알아듣기 마련입니다.
    자기 판단과 고정관념이 개입되기 쉽고
    그렇게 되면 특히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는 데 있어서
    큰 오류를 범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난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판단이 개입됨이 없이,
    아무런 가감도 없이
    그대로 부처님께 들은 것들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무엇을 말할 때
    대부분 ‘내 말’인 것처럼 이야기 하기 쉽습니다.
    물론 내 말이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말은 사회에서, 학교에서, 책에서,
    스승님들에게서 얻어 들은 말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우린 오직 내 잣대, 색안경에 비추어 걸러내어
    ‘내 식대로’ 조합하는 역할 정도를 할 뿐입니다.
    그리고는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 얻어 들은 것을
    ‘내 생각’이라고 고집하며,
    ‘내 말’인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지요.

    물론 자신 스스로도
    그것이 온전한 내 생각인 줄로 착각하고,
    옳은 생각인 줄로 착각을 하고 삽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
    혹은 부처님 말씀을 누군가에게 들려 줄 때,
    아난 존자의 이런 겸손함과 진실함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야 말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또한 말을 순수하고 참되게 전달할 수 있으며,
    ‘내가 옳다’라는 아상이 비워진
    텅 빈 진실을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이야 그저 입가에 떠오르는 말들을
    아무런 걸러짐 없이 그것도 자기 생각인 양 마구 끄집어 내다 보니
    여러모로 번거롭고 복잡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누군가에게 주워 들은 내용을
    내 말인 양 마구 토해 내다 보니,
    자신 내면에서 침묵과 명상을 통해
    향기롭게 피어오르는 진실을 더욱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버렸습니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팔만대장경이라는 수많은 경전을
    이렇게 생생한 부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었던 데는
    아난의 역할이 가히 절대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가감없고 진실된 아난의 음성은
    이 다음 구절에서부터 더욱 빛을 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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