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한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1250인의 큰 비구 스님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공양 시간이 되자, 가사와 발우를 수하시고 사위성에 들어가시어 차례대로 탁발을 하신 다음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하셨다.
공양을 마치시고는 가사와 발우를 제자리에 놓으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강의]
가만히 이 광경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1250인이라는 대식구가 저마다 보리수 나무 아래 차분히 명상에 들어 있습니다.
아마도 아침 햇살 내리기 전 새벽녘에 밝게 깨어 저마다 좌선에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공양 때가 되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처님을 위시하여 모든 비구스님들께서 가사를 수하고 발우를 들고는 차례로 줄지어 걸으십니다.
1250인이라는 수많은 스님들이 걷고 있지만 그 걸음 걸음에는 한없는 고요와 침묵만이 향기롭게 대열을 감싸고 있습니다.
사위성 큰 마을에 다다르자 스님들은 차례 차례 골목 골목으로 나뉘어 부처님께서 설법해 주신 것처럼 분별심을 놓고 부잣집, 가난한 집을 따질 것 없이 처음 정한 집에서부터 차례로 일곱 집을 걸어 탁발을 하십니다.
어쩌면 부처님께서 사시(巳時) 때 일종식(一種食)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시간에 맞춰 집 앞에서 음식을 준비해서는 부처님과 그의 청정한 제자들이 오기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아직 승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스님들은 저마다의 탁발한 음식이 다름을 보고 분별심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음식의 맛과 양 또 그 종류에 따라 때로는 탐심이 올라오기도 하겠지요. 그렇지만 곧 다른 많은 스님들이 그렇게 하시듯 그 마음을 관찰하고는 분별심을 놓는 연습을 하게 될거예요.
고요히 탁발을 하시고는 다시금 본래 자리로 돌아오셔서 저마다의 자리에 앉아 공양을 하시겠지요. 공양을 하시기 전에 잠시 저마다 침묵으로써 명상을 할 것입니다.
이 음식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수많은 인연, 온 우주 법계의 인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안으로 안으로 은은히 피어오르게 할 것입니다.
행여 몸이 약하거나 병이 들은 도반이 곁에 있다면 내 발우에 담긴 몸에 좋은 음식이나 고기 등을 나누어 줌으로써 약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때때로 맛에 탐착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를 잘 관하며 고요히 공양을 하십니다.
공양이 끝나면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금 고요히 선정에 들 것입니다.
이러한 아난의 묘사에 어디 시끄럽고 복잡스런 느낌이 있겠어요. 이 많은 스님들이 일상을 살아가지마는 어느 한 구석 시끌벅적한 광경이 아닌 한없이 고요하고 여법한 광경입니다.
부처님의 시자 아난은 항상 그림자처럼 부처님 옆에 서 계십니다. 부처님께서 탁발을 나가실 때 한 걸음 뒤에서 조용히 부처님을 따르고, 공양을 하실 때 말 없이 함께 공양하며 항상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한 부처님에 대한 지켜봄이 있었기에 부처님의 일상 그 자체가 얼마나 큰 깨달음의 순간인지를 충분히 알고 계신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보았을 때 시시콜콜해 보이는 이런 사소한 일상까지도 놓치지 않고 경전에서는 소중하게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앞서 말했던 수많은 선사 스님들께서 이 광경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으며 부처님 최상의 가르침이라고 하셨던 연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하루를 돌아보면 어때요? 잠이 안 깨니 자명종도 소리 큰 것을 사다가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출근하기 직전 빠듯할 만한 시간에 맞춰놓고 잠에 들지요. 시끄런 자명종 소리에 일어나지 못해 푹 눌러 놓고는 또 자다보니 이만 저만 늦은 게 아니란 말이예요.
그러니 아침이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정신없이 시계 보면서 씻고 화장하고 대충 밥 먹고, 아니 아마도 아침밥도 굶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그러면서 후다닥 뛰쳐나가 회사로 학교로 출근을 합니다.
하루의 시작이 정신없으니 어찌 하루가 온전할 수 있겠어요.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저녁 때 동료들과 어울려 한 잔 걸치고 집에 들어와서는 쓰러지듯 잠이 든단 말입니다.
다 이렇지는 않겠지만 정신없이 마음 챙기지 못하고 사는 것은 이와 다를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바로 이 금강경 제 일분에 나오는 부처님의 삶은 어떠한가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부처님의 하루 일과는 모든 순간 순간이 그대로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밥먹고, 걷고, 씻고, 앉는 이 모든 일들이 어느 하나 소중한 수행 아닌 것이 없으니 따로이 수행이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는 것이지요.
어느 한 가지 사소하고 덜 중요한 일이 없이 모든 일과가 그대로 소중한 깨어있음의 행이란 말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중요한 일이 있고 사소한 일이 있으며,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사소한 일들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살아요.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지간한 사소한 일이나 과정에서의 소소한 일들은 그냥 흘려 보내기 쉽습니다.
회사에 가야 된다는 목적 때문에 집에서 밥먹고, 버스를 타고, 회사로 걸어가는 그런 일상은 사소하고 귀찮은 일 쯤으로 여겨진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행에 있어 사소하고 중요한 분별은 없습니다. 낱낱의 모든 일상은 그대로 하나의 소중한 깨달음의 향기인 것입니다.
밥 먹는 그 사소한 일상이, 밥 먹는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의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밥 빨리 먹고 나서 좌선에 들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오직 밥 먹는 그것이 그대로 목적인 거예요. 밥 먹는 순간 온전히 밥만 먹는 것입니다.
밥 먹으며 다른 생각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과거를 떠올리며 그렇게 번잡하지 않고, 오직 밥만 드실 뿐인 것입니다.
밥을 먹는 순간, 발을 씻는 순간, 걷는 순간, 탁발을 하는 순간, 매 순간 순간 몸과 마음이 온전히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매 순간 도착해 있는 것이예요. 어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달려 가지 않아요. 이미 도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도착지란 바로 지금 이 순간일 뿐, 또다른 도착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도착하려고 애쓸 것도 없고, 깨달으려고 애쓸 것도 없고, 이 괴로운 세상 잘 살아 보려고 애쓸 것도 없이 매 순간 순간 도착해 마친 것입니다.
그러니 더없이 평화롭고 향기로울 수 있는 거예요. 걷는 순간 오직 걸을 뿐, 탁발을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고, 발을 씻는 순간 오직 씻을 뿐, 빨리 씻고 좌선에 들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낱낱의 모든 움직임이 그대로 좌선이고 깨어있음입니다. 모든 순간 순간 더 이상 도달할 곳이라고는 없어요. 그 순간이 가장 온전한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우리들이 그렇게 찾아 나서던 궁극의 순간인 것입니 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을 돌아보세요. 늘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려 하고, 무엇인가 목적 달성을 위해 애쓰고, 끝이 보이지 않는 욕망과 집착의 사슬에 빠져 한 시도 만족하지 못하며, 한 시도 도착의 평화로움을 맛보지 못합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일깨우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리 자잘한 일과라도 매 순간 순간의 삶이 지금 부처님의 삶에서처럼 온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조스님께서 말씀하셨던 ‘평상심이 도’라는 말 또한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요. 그래서 선사 스님들께서 부처님의 일상을 언급하신 금강경 제 일분을 두고 깨달음 최고의 순간이며 최상의 설법이라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평상시 일과 그 자체가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 똑같은 일상이라도 그 일상이 깨달음의 순간이 될 것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중생들의 평범한 일과가 될 것인가 하는 데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지요.
똑같은 일상이라도 온전히 그 순간 집중을 하여 깨어있게 되면 그것은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과 같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늘상의 일과가 깨어있지 못한 우리들의 안목으로 보았을 때, 금강경의 제 일분이 얼마나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겠어요.
그냥 우리들의 삶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마음의 눈을 맑게 씻고 2500여 년 전 부처님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그 마음을 살짝 엿보게 되면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모든 일과가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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