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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고찰 만덕산 백련사를 찾아서....
    ♠寺刹巡禮 2011. 11. 20. 01:58

    천연기념물 제151호인 동백숲과 비자나무, 후박나무군들이 어머니 품과 같이 백련사를 감추어 놓고 수줍게 살포이 보이더니 동백숲의 동박새들이 동박동박하면서 지저귀면서 반갑게 겨울비와 함께 반기네요.

    마치 겨울비와 더불어 겨울 안개는 더더욱 백련사의 신비함을 감추어 주고 있는 미지의 세계 같았답니다.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이며 조선후기에 만덕사로 불리우다가 현재는 백련사로 부르고 있으며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명종(1170년)때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던 도량이며 고종 19년(1232년) 에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겹처마인 다포식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배치 되어야 하는데도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대웅보전안에 걸려있는 백련사 현판은 사뭇 놀라움이였지요.

     만경루(萬景樓) 통로의 도자기풍경

     일주문이나 불이문등이 없이 바로 만경루 도자기 풍경에서 올려다 보면 대웅보전이지요.

     만경루에서 바라본 대웅보전의 현판이 남다르며 고색단아한 모습이 옛선사님들의 호흡을 간직한채 다가 왔다.

     

       백련사 대웅전 (白蓮寺大雄殿.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246)

    만덕산에 위치하는 백련사는 만덕사라고도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 1년(839)에 지은 절이다. 백련사 대웅전은 신라시대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안에는 석가모니불상이 모셔져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을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다.

     방풍판에 설치된 卍자 표시와 연꽃 이미지는 더더욱이 불자들의 발길을 잡아 놓기에는 충분하였다.

    타 사찰에는 원이나 삼원을 많이 표시하는곳이 많으나 특이합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 시골집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대웅보전이 법당이 아니라 옛날 외갓집을 찾아가는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 너무 좋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석 디딤돌과 주초석위에 그랭이질기법으로 기둥을 배치하였읍니다.

     노모의 기도정진

     두마리의 영수(靈獸),봉황과 사자가 해학적으로 조각되어 있고 사람의 다리를 하고 있는 가릉빈가와 도끼를 물고 있는 용, 여의주를 물고 있는 천정 우물반자의 용등이 유독 아름답고 특히하여 발길을 꽁꽁 붙들어 메는 매력이 있었다. 조선사람들은 대웅보전을 반야용선이라 했다. 대웅보전에서 아미타불을 염하면 이 반야용선을 타고 저바다를 건너 극락세계로 간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대웅보전의 그 아름다운 벽화와 조각은 이상향을 향한 옛선조와 이름모를 선사님들의 지극한 신앙심의 발로이기도 하다.

    대웅보전 안과 밖이 보여주는 역사의 박물관이며 벽화의 요람이라고 볼수가 있지요.

     

     연밥으로 장식된 대웅보전 내부 익공

     

     

     

     

     

     

     

    백련사 응진전은 맞배 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 아난 ·가섭 등의 16나한상 및 영산회상도가 있다. 수미단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다문제일의 아난과 두타제일의 가섭이 협시를 이루며, 16나한상 및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있다. 나한은 수행을 통하여 성불자가 되었지만 표현 양식에 있어 제각각 독특한 표정과 자유스러운 자세를 취한 매우 사실적인 수행자의 모습으로 표현된 깨달은 이들의 모습이다. 응진이란 존경받을 만하다 , 공양받을 만하다 라는 의미로 응진당을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한다.

    백련사 명부전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안에는 지장보살님상을 비롯해서 무독귀왕·도명존자 및 시왕 10체와 판관·녹사·인왕상 각2체 그리고 사자상 1체는 지장보살님의 권속으로 봉안되어 있다. 또한 안에는 1775년(영조 51)에 정암 즉원(晶巖卽圓 , 1738~1794) 스님이 지은(시왕전중수기)현판이 있어 연혁을 아는 데 참고가 된다. 안에는 스님과 보살님이 대화를 나누시고 계시기에 조심스러워 그냥 밑에서만 서성인다. 명(冥)이란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명부란 저승세계를 뜻하여, 지옥중생들을 구제하는 지장보살님과 십대왕들을 모시게 된다.

     

     

     

     

     목탁대신 놓인 목조 방망이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벽화

    불설비유경에 나오는 인생에 대한 비유(譬喩)

    옛날 어느 곳에 한 나그네가 있었습니다. 이 나그네는 넓은 벌판을 지나다가 미친 코끼리(위의 벽화에서는 사자)와 갑자기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놀라서 달아나려 했지만 넓은 벌판이기에 숨을 마땅한 곳을 발견하기 힘들었습니다. 다행히 들판 한 복판에 오래된 우물 하나가 있었고, 그 우물 안에는 한 줄기 등나무 덩굴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하늘이 주신 것이라 기뻐하고서 급히 그 등나무 덩굴을 타고 우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코끼리는 긴 상아를 무섭게 내밀었지만 우물을 들여다 볼 뿐 더 이상 공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살았구나 하고 안도의 한 숨을 쉬고 있는데 무서운 큰 뱀이 우물 밑바닥에서 입을 척 벌리고 나그네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닙니까? 놀라서 다른 곳으로 도망가려고 주위를 살펴보니 사방에는 네 마리 독사가 그를 금방 물듯이 노려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목숨을 의지할 곳이라곤 오직 한 가닥 등나무 덩굴뿐인 데 그 덩굴마저 검은 색과 흰 색 쥐 한 마리 씩이 뿌리 앞 쪽을 갈근갈근 이빨로 갉고 있는 게 아닙니까?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고 떨고 있는데 그 때 마침 덩굴 뿌리에 붙어 있는 꿀벌 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한 방울씩 다섯 방울이나 그의 입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꿀맛이 기막히게 맛있었던 탓인지 나그네는 그 때부터 벌써 눈 앞에 닥쳐온 무서움과 위험을 까맣게 잊고 그저 꿀물을 받아먹는 데만 마음이 쏠리게 되었습니다.

    나그네 :  먼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무작정 벌판을 헤매는 나그네는 바로 나(우리)

    벌판 : 태어나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터전.

    미친 코끼리 : 무상(無常)의 풍파

    우물 : 생사의 깊은 못. 물과 같은 우리들의 은신처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 있는 그런 곳

    등 덩굴 : 생명선

    큰 뱀 : 죽음의 그림자

    네  마리 독사 : 우리들 육체를 구성하는 지(地)·수(水)·화(火)·풍(風)의 네 가지 원소

    쥐와 흰 쥐 한 마리 씩 : 밤과 낮에 해당

    다섯 방울의 벌꿀 : 우리들 오욕(五欲). 환락(歡樂)의 근원. 식욕.색욕.수면욕.재산욕.명예욕

     

     

     

     

     

    강진 백련사 사적비 (康津 白蓮寺 事蹟碑.보물 제1396호 )

    백련사 사적비는 백련사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약 50여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 447㎝ 규모의 전형적인 석비(石碑)이다. 귀부(龜趺), 비수(碑身), 이수(이首)로 구성되어 있는데, 귀부는 고려시대의 조성으로, 비신과 이수는 1681년(조선 숙종 7)에 조성되어 각기 서로 다른 건립연대를 보이고 있다.
    귀부는 지대석(地臺石)과 더불어 화강암 일석(一石)으로 조성되었다. 용두(龍頭)는 목을 움츠리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입은 상·하 7개의 가지런한 이빨로 꽉 다문 모습이며, 하단에는 길게 수염이 흘러 목주름까지 늘어져 있다. 위 입술은 약간 들려 눈은 삼각형의 구도 안에 동그란 눈동자가 볼륨있게 표현되었다. 용두의 뿔은 목 뒤로 흐르며 2조로 갈라지며 비좌(碑座)에 연결되어 있다. 귀부의 등면은 너비 30㎝의 음각선으로 곽을 조성한 후 내부에 당초문(唐草紋)을 양각했다. 귀갑문(龜甲紋)은 6각형으로 내부에는 연화문을 새겼다. 네 발은 모두 5개의 발가락을 지녔으며, 꼬리는 왼쪽으로 틀어 올렸다. 귀부의 중앙 상면에는 비좌가 조성되었는데, 측면에는 초화문(草花紋)이 양각되었고, 상면에는 118㎝×15㎝ 규모의 비신공(碑身孔)이 마련되었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귀부의 크기는 227㎝×190㎝×110㎝이다.
    비신은 2면비로 전·후면에는 비문이, 양 측면에는 초화문을 양각했다. 비신 전면의 상단에는 자경 15㎝ 크기의 전서체로 「만덕산백련사비」라 새겼고, 횡서로 「전라도강진만덕산백련사사적비」라 기록하고 있다. 뒷면에는 당시 불사(佛事)에 참여한 사람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조정저(1631∼1690)가 지었고, 현록대부랑선군 이우(1639∼1693)가 썼는데, 상단의 전서만은 가덕대부랑원군 이간(?∼1699)이 썼다. 말미의 명문으로 보아 1681년(조선 숙종 7)에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수에는 우진각지붕의 형태로 하단에는 목조 건축의 겹처마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정상에는 2마리의 용이 등을 맞대고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있는 형상인 바, 매우 사실적인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비신의 크기는 234㎝×118㎝×29㎝이며, 이수는 170㎝×75㎝이다.
    백련사 사적비는 귀부와 비신의 건립연대가 서로 다른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아 귀부는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조각수법도 뛰어나 고려시대 전기의 작풍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사적비 역시 전형적인 조선시대 석비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양 측면에 양각된 초화문은 이 시대의 석비로서는 특이한 예라 하겠다. 따라서 백련사 사적비는 귀부와 석비가 비록 시대를 달리하고 있지만, 각 부재가 지닌 양식상의 특성으로 보아 가치가 있다.(문화재청 자료)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아우르는 그저 감탄이 터저나오는 백련사....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좋긴 좋아 부린디 뭐라고 말할 수 는 없고 ....

    한번 댕겨 가보면 안당께로

    정말로 분위기 죽여 줍니다.

     

    강진하면 유배의 역사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삼국시대 이후로 국가에 옳은 말을 한 선비들을 유배 보낸곳이 후세에는 유배온 유능한 관리들의 표현이 살아서 서계적인 유물과 후세에 물려줄 유산으로 훌륭하게 남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동백림안의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이름 모를 부도와 8대국사분들과 고승분들이 묵묵히 숲속에 동박새되어 역사를 스토리텔링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고귀하고 소중한 유산이라 생각합니다.

    날씨 탓에 사진이 흔들린것이 많으나 그 또한 나와의 인연으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다음순례를 준비합니다.

    요즈음 새로 개금불사나 철거도 좋지만 그 규모나 형태를 유지했으면 한다.

    중창불사를 한다고 하면서 옛모습은 찾아볼수 없도록 조성하고 화려한 단청으로 인하여 불자들의 혼란만 가중하고 있다.

    즉 정체성을 잃었다고 표현하는게 옳을까?

    곳곳에 정체를 알수 없는 불상과 불탑 최대, 최대규모를 서로 다투어 사찰마다 내걸고 불사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어김없이 불상과 불탑앞에는 화려하게 만들어진 불전함(돈통)이 배치되어 있어 불상과 불탑에 절을 하는것인지 돈통에 절을 하는것인지 아이러니 하기도 하다.

    결국에 공(空)이며 무(無)인것을 실체에 집착하는지 우리나라 기독교나 불교나 다를바가 없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흐르면서 그 누가 이곳을 훼손했다면 우리 후손들이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고마움을 느낄수 있겠는가. 그래서 옛것을 무조건 없애고 새것으로 바꾸는 것도 좋겠지만 그 평가는 후손들이 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중창이나 불사에는 신중을 기하는게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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