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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집의 보물 강진 무위사를 겨울비 따라....
    ♠寺刹巡禮 2011. 11. 19. 16:53
     
    절집의 보물 강진 무위사를 겨울비 따라....

    (천년고찰관음기도도량) 

    삼국통일 후 875년(헌강왕1)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갈옥사(葛屋寺)로 창건한 것이 첫번째 중창이라 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905년(효공왕9)이후 선종인 가지산문(迦智山門)계통의 선각국사(先覺國師先覺國師) 형미(逈微, 864∼917)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무위갑사(無爲岬寺)에 머무르면서 절을 중수하고 널리 교화를 펴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한다. 따라서 무위사는 형미 스님이 주석했던 10세기 초 이전에 무위갑사라는 절로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무위사사적>에 의하면 고려시대인 946년(정종 1)에 형미가 제3창을 하면서 모옥사(茅屋寺)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946년은 이미 형미가 입적한 30년 뒤에 최언위가 지은 <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영탑비>가 세워진 해라서 믿기 어렵다. 이것은 아마 형미가 모옥9茅屋)이던 무위갑사를 왕건의 후원을 받아 크게 중창하면서 교화를 펼쳤던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무위사는 10세기 초 이전에 창건되었고, 형미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가지산문 소속의 선종 사찰이었음은 분명하다.절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가지 활동 기록이 보여지는 등 자못 활기를 띠고 있어 주목된다. 나라에서는 1407년(태종 7) 12월에 각처의 명찰로 여러고을의 자복사(資福寺)를 삼게 하였는데, 이 때 무위사는 천태종 17사 중의 하나로 소속되었다.

    이것은 무위사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선종 사찰에서 천태종 사찰로 그 성격이 변동되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같은 사격의 변동은 고려후기의 천태종 백련결사의 활발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만덕산 중심의 백련결사(白蓮結社)도 천태종의 법화신앙에 입각한 결사운동으로 무위사의 사찰 성격 변동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믿어진다.

    결국 무위사는 천태종 백련결사가 활발했던 고려후기에 이미 천태종 소속의 사찰이 되었다가 조선 초기 사찰통폐합의 2차정리기인 1407년에 천태종 소속의 자복사로 남게 된 듯하다.

    이 무렵의 연혁을 보면 1430년(세종 12)에 극락보전이 건립되었는데 지금 극락보전 안에 모셔진 목조 아미타삼존불도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476년(성종 7)에는 극락보전 후불벽이 만들어졌고 후불벽화가 조성되었음이 <무위사극락보전묵서명(無爲寺極樂殿墨書銘)>으로 확인된다. 이 묵서명을 보면 극락보전 건립에 관직을 부여받은 승려들이 참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는 곧 극락전 건립이 조선 초기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았던 고급 기술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임과 함께 국가적인 사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7 <강진현 불우조>에는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했던 무위사를 이제 중수하고 이로 인해 수륙사(水陸社)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된 것과 극락보전의 건립, 아미타삼존도 · 아미타여래도등의 벽화 조성은 그 조성 시기 및 신앙 배경 등에 있어서 상호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왜냐하면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는 수륙재(水陸齎)를 빈번하게 행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수륙재는 지상에 떠도는 망령을 부처님에 의하여 환생케 하는 재생 의식으로서 적을 포함한 전사자를 위로하는 불교 의식이다. 죽은 영혼을 달래려는 수륙재는 곧 살아 있는 자들의 애도와 복수심가지 포용하려는 차원에서 거행된 불교 의식인 것이다.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에 극락보전이 건립되고 아미타불의 벽화가 조성되는 것은 이와 같은 신앙 구조 속에서 가능한 것이라 여겨진다.
    한편 <무위사사적>에 따르면 1555년9명종 10년)에 태감(太甘) 스님이 4창하고 무위사로 개칭했다 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무위사란 절 이름이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1407(태종 7)에 이미 나타나고 있어 <무위사사적>의 이 부분 역시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임잰왜란 · 병자호란 두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절은 그다지 피해를 입지 않아 절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일도(一道)에 으뜸이었다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점차 법당과 요사가 훼손되어져 몇 개의 전각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1678년(숙종 4)에는 극락보전 앞마당에 있는 괘불석주가 제작되었다. 1739년 (영조 15)에 해초(海超) 스님의 공덕으로 전각이 보수되었는데 당시 미타전· 천불전 · 시왕전이 있었다. 당시의 주지는 극잠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절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극락보전이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
    해방 이후 1956년에 극락보전을 수리 보수하고 1975년 벽화보존각을 세워 그 안에 벽화를 봉안했다. 1975년에는 편광영탑비와 사리탑 등에 대한 정화 불사에 이어 봉향각 · 해탈문 · 명부전 · 천불전을 다시 짓고 1991년에 산신각을 1995년에는 이미 있던 동쪽 요사를 늘려 지었다.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전(국보13호)은 세종 12년(1430)에 지었으며,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에 큰 그림 하나만 남아 있고 나머지 28점은 보존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벽화들에는 전설이 전하는데, 극락전이 완성되고 난 뒤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49일 동안 이 법당 안을 들여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스님이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고 몰래 들여다 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한 마리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림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

    이 건물은 곡선재료를 많이 쓰던 고려 후기의 건축에 비해,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짜임새의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조선 초기의 양식을 뛰어나게 갖추고 있는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

     

     

     

    후불벽화(後佛壁畵)로 그려진 아미타삼존도. 흙벽에 채색. 210 × 270 cm. 1476년 작. 후불벽화로 그리기 위하여 따로 세워진 벽면에 그려졌다.

    구도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앞의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뒤쪽으로 6명의 나한(羅漢)을 배치하여 원근감을 표현하였으나 상하로 구분하는 2단구조의 고려 불화나 16세기의 조선 불화와도 다른 것이다.

    아미타불의 뒤에 표시된 광배(光背)의 모양은 키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15세기부터 사용되었다. 착의법(着衣法)은 고려 후기의 단아양식(端雅樣式)을 계승한 것이며, 가슴 아래까지 올라온 군의(裙衣)의 상단을 주름잡아 고정시킨 매듭끈을 대좌(臺座) 좌우로 길게 드리운 것은 조선 초기의 특징이다. 내용상에서도 변화가 있다. 곧 고려시대의 삼존형식에 자주 등장하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대신 지장보살이 배치된 것은 고려 후기의 신앙대상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아산현감을 지낸 강노지(姜老至) 등 수십명의 시주로 혜련(海連) 대선사 등이 그렸다 한다.

    우물반자가 세월을 내귀에 대고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문화재자료 제76호 무위사삼층석탑(無爲寺三層石塔)

    이 석탑은 현재 극락전 오른쪽 선각대사 편광탑비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다. 전형적인 2층 기단의 3층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되고 균제된 양식이다.

    지대석은 수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층기단 중석이 연결되고 있는데, 각구를 2구로 나누고 중앙에는 탱주 1주와 양면에는 모서리 기둥을 모각하였다. 모서리 기둥과 탱주사이에는 안상이 정교하게 조각되었으며 하대갑석은 3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었는데, 하면에 1단 괴임을 상면은 가벼운 경사를 주고 역시 1단의 각형괴임을 조각하였다. 상층 기단중석은 4매 판석으로 각면에는 모서리 기둥이 정연하고 동서면에 벽판석이고 남북면에는 2매 판석으로 결구하였으며, 갑석은 하면에 엷은 1단의 부연을 각출하고 상면도 역시 1단 각형 괴임대를 조각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몸체부는 몸체와 옥개석이 각 1매씩으로 각 몸체의 양면에 모서리 기둥이 목각되고 2∼3층에서는 그 높이와 너비를 줄여 알맞은 체감을 보였다. 옥개석은 상면의 물 흐르는 면이 평박하고 처마의 곡선도 가벼운 반전을 보였다. 처마의 하면은 수평이며 층급받침은 각층 4단이다. 지붕돌 상면의 중앙에서는 1단의 각형 괴임을 각출하여 상층의 몸체를 받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 보륜, 보주가 완전하게 남아있다. 이 탑은 3층 지붕돌과 1층지붕돌 일부에서 약간의 파손을 입었을 뿐 그 외의 부채에서는 완전한 상태로 비교적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충실히 고수하고 있다.

    조성연대는 옆에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946년)와 같은 시대이거나 아니면 이 연대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고려초기로 추측된다.

     

    보물 제507호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

    비문은 `속년오십유승삼십유오우`라 하였으니 무위갑사에 머무른지 13년후 시작하였다. 또 말미는 `개운삼세차병우오월경인삭이십구일유무오립`이라 기록되어 있다.

    고려 태조 원년(918)에 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탑’이라 하였다. 입비년인 개운삼년은 고려정종원년(946)으로서 대사의 입적 후 28년이 되는 해이다. 비는 극락보전 서방 약 30m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석비는 귀부(龜跌)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이首)를 구비한 전통적 일반형의 것이다. 귀부의 두부(頭部)는 양각(陽刻)을 뚜렷이 조각한 용두(龍頭)로 되었으며 함주구강(含珠口腔)은 투각되어 있다. 배면에는 육각(六角) 갑문(甲文)을 양각하고 비좌(碑座)의 전후 2면에는 보운문(寶雲紋), 양측면에는 안상(眼象)을 각각 조각하였다. 이수에는 삼단의 충급형 받침을 새겨 복련화문(覆蓮華紋)을 장식하였고 이수 주위는 모두 반결운룡문(蟠結雲龍紋)과 반결쌍룡문(蟠結雙龍紋)을 각식하였다. 중앙에는 비의 이름을 새겼던 네모진 공간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그 주위로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비제(碑題)는 "고려국(高麗國) 고무위갑사(故無爲岬寺) 선각대사(禪覺大師) 편광영탑비명(遍光靈塔碑銘) 병서(幷序)"라 시작해서 찬자(撰者) 최언휘(崔彦)와 서자(書者) 유훈률(柳勳律)의 관등(官等) 성명(姓名)을 기록하고 있다.

    각부의 조각기법은 당대의 다른 비석에 비하여 사실(寫實)의 경향을 띠어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의 크기는 2cm이고 해서체(楷書體)이다.

     

    거북이상이 선명이 살아 있어 마치 겨울비가 부슬부술 내리면서 강진 앞바다를 주시하면서 걸어가는 기세이다.

     

     

     

     

     

     

     

    천불전

     

     

     

     

     

    수월관음벽화

    불벽(後佛壁) 뒷면에 그려진 수월관음벽화. 아미타삼존 후불벽화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두광(頭光)과 신광(神光)을 지고 선 수월관음이 관음보살을 예배하는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내려다보고 있다.
    머리에는 아미타불이 묘사된 보관(寶冠)을 썼으며, 왼손에는 정병(淨甁)을 들고 오른손에는 버들가지를 잡고 있다. 얼굴은 넓으며, 목은 굵고, 넓은 어깨가 강건함을 느끼게 한다. 주위에 물결을 묘사하여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으며, 천의(天衣) 자락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이러한 모습이 화면 전체에 표현된 파도의 곡선과 더불어 긴장감과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보통 선재동자의 모습은 작은 동자의 모습이지만 여기에서는 승복을 입은 노비구(老比丘)의 모습이다. 무릎을 꿇고 합장하는 자세에서 구도자의 모습, 간구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후불벽화에 관한전설은 극락보전 건립 후 어느 날 노승 한사람이 사찰을 찾아와 벽화를 그리겠다며 100일동안 법당분을 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99일째 되던 날 궁금증이 많은 한 승려가 창살을 통해 법당안을 들여다보자 한 마리의 새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날아가 버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존 후불벽화 중 가장 오래된 무위사 후불벽화는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그려지지 못한 미완성의 그림으로 남아있다.

     

    아미타내영도


    무위사 보존각에 보존되어 있는 벽화. 1476년 제작. 흙벽에 채색. 아미타불이 죽은 자를 극락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도상화(圖像化)한 것으로 원래는 극락전 서측 벽면에 있었던 것을 1976년 극락전을 수리할 때 벽채로 떼어내어 보존각에 보존하였다. 내영도는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사자의례(死者儀禮)와 깊이 관련된 것이며, 한국에 전하는 것은 독립적으로 구성된 것은 찾아보기 힘들고 감로탱화(甘露幀畵)라는 불화에서 내영의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감로탱화의 구도는 극락과 지옥을 대비시켜, 상단에는 극락을, 하단에는 지옥을 묘사한다. 그리고 내영의 모습도 아미타불 단독으로 맞이하는 것, 관세음보살 및 대세지보살과 함께 맞이해 가는 것, 아미타불이 25보살과 함께 와서 맞이해 가는 것, 아미타불과 성중(聖衆)이 맞이해 가는 것 등이 있다. 이 내영도는 아미타불이 8보살 및 8비구(比丘)와 함께 와서 맞이하는 극락내영도이다. 본존인 아미타불은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듯 오른손은 앞으로 내밀어 뻗고 왼손은 들어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있다. 둥근 육계(肉)에 중앙의 계주(珠)만 표현한 머리모양, 사각형의 얼굴에 눈꼬리가 길게 올라간 긴 눈, 구불구불한 옷자락의 표현은 고려 말 불화(佛畵)의 특징이며, 군의(裙衣)를 묶은 매듭끈을 법의 자락 앞으로 대칭시켜 늘어뜨린 것은 조선 초의 특징이다. 관음보살상은 보관(寶冠)에 화불(化佛)과 보병(寶甁)을 강조하였으며, 대세지보살은 정병(淨甁)과 경함(經函)을 들었고, 무릎 부근을 구슬로 장식하였다. 그 밖의 보살들도 제각기 특징있는 물건을 들고 있으며, 지장보살의 경우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두건을 쓰고 있는 점 등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벽화의 지장보살과 비슷하게 묘사되었다. 이러한 점은 이들 일련의 작품이 동일 작가에 의하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 보살들 위로 상체만 묘사된 8비구들은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여 전체 화면이 활기를 띤다. 화면 전체적으로 풍기는 밝고 엷은 적색과 녹색은 고려 불화의 양식을 보여주며, 나한(羅漢)의 등장과 세부묘사에서는 조선 초기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겨울비 따라  인위적 조작이 닿지 않은 맨 처음의 진리를 깨달으라는 ‘無爲’의 절이름처럼, 무위사는 월출산 남동쪽 기슭에서 한 점의 허세나 허튼 구석 없이 단정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 하여 주었다. 아침녁의 운무와 함께...

     

    꼭 필요한 부재만 사용하여 검박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맞아주는 조선 초기의 대표적 목조건축인 극락보전, 우리나라 불교벽화 가운데 가장 앞선 시기의 작품들로 흙벽(土壁)에 그려진 수십 점의 벽화들, 여의주를 문 용머리[龍頭] 거북이 비신(碑身)을 받친 채 온전한 모습을 드려내고 있는 선각대사 탑비 등은 무위사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이다.

     

    독특한 건축양식에 심취되어 있는동안 겉옷은 겨울비에 젖고 카메라 렌즈는 앞이 안보일정도로 흐린 아침 면포를 꺼내서 얼른 카메라 렌즈를 닦고 아쉬운 발걸음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극락보전의 선조들과 선사들의 향기와 벽체마다 그려진 벽화들 감탄사가 절로 흘러 나온다.

    안개와 겨울비로 아름다운 모습은 다 못 보고 아쉬움을 간직한채 삼배를 올리고 다음에 날씨가 좋으면 다시 한번 순례하기로 마음 먹고 이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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