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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현존 유일의 3층 목탑식 대웅전 쌍봉사의 에너지를 받으러...
    ♠寺刹巡禮 2011. 11. 25. 18:24

     

    나무도 들녘도 제 가진 것들 모두 떨궈 내고 비워내고 깊은 침묵속 으로 들어갔다.
    앙상한 가지마다 각각 저마다 땅속에서 새 생명을 태동하듯 앙상한 가지만 바람속에 몸을 맡기고 휘바람을 불어 오케스트라의 협연을 하는 11월 하순
    욕심과 욕망속에서 미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말도 욕심도 비워낸 마음자리에선 다시 선명하게 보이게 될지 모를 일이다.

    들녘이 계속 이어질 것 같던 길끝에 쌍봉사(雙峯寺)는 있다. 불현듯 나타나는 쌍봉사(雙峯寺) 전경
    해탈문
    (解脫門)앞이 바로 주차장이다. 절속으로 산속으로 '드는' 맛은 없지만 들녘 가까이 평지에 자리해 있으니 왠지 더 이무롭기도 하다.해탈문(解脫門) 돌층계를 올라서면 대웅전(大雄殿)을 만나게 된다. 
    대웅전(大雄殿)이야?

    목탑이야?
    정면 한칸 측면 한칸에 3층 목탑 모양. 쌍봉사 대웅전(大雄殿)은 법주사(法住寺) 팔상전(捌相殿)과 더불어 보기 드물게  목조탑 형식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목탑의 원형을 가늠하게 하는 귀중한 목조건축물 이었지만 지난 84년 화재로 소실된 뒤 86년 복원됐다.
    화재 이전의 모습은 이제 사진속에서 만 만나볼 수 있다.
    하지만 대웅전(大雄殿) 안에 모셔진 석가삼존과 동국진체풍의 현판글씨는 불속에서 구해내 여전하다.
    불이 났을 당시 마을 할아버지가 삼존불(三尊佛)을 지고 나왔기 때문에 삼존불(三尊佛)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할아버지의 공덕은 대웅전(大雄殿)앞 안내판에도 몇줄로 남아 있다.
    쌍봉사(雙峯寺)에서 나오는 길에 절 아랫마을, 그래서 이곳 사람들이 '절골'이라 부르는 마을에 들렀더니 불길속에서 삼존불(三尊佛)을 구한 할아버지는 벌써 몇 년전 세상을 떴다. 윤야순 할머니(84)는 남편이 저기 있다고 손으로 가리켰다. 할머니가 가리킨 곳은 집앞 밭가의 무덤이다.
    할머니는 "생전에 늘 일하던 곳에 묻혔응께 낯설지도 않고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무덤이 있어 할머니도 혼자 밭에서 일하는 것이 적적하지 않다 했다.
    할아버지가 옮겼던 그 불상이야기를 꺼내자 할머니 말씀하시길, "항, 그것이 평상시엔 들도 못허제...그 무건 것을 어찌고 들엇능가 몰라. 부처님도 얼릉 나오고 싶었던 것이제, 긍께 그것이 욈겨졌제. 안그러문 꼼짝이나 허것는가".

     

    쌍봉사(雙峰寺)는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에 해당하며 철감선사(澈鑑禪師) 도윤이 개창한 절이다. 곡성 태안사에 있는 혜철의 부도비에 의하면 혜철이 신무왕 원년인 839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여름을 보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전에 이미 창건되었을 것이나 855년경에 철감선사(澈鑑禪師) 도윤(道允)이 중국에서 귀국하여 종풍을 떨쳐 사자산문의 일가를 이룬 곳이라 철감선사(澈鑑禪師) 도윤을 개창자라 칭한다. 경문왕은 그를 스승으로 삼았으며 선사가 입적하자 철감(澈鑑)이란 시호를 내리고 부도탑 이름을 징소(澄昭)라 내렸다. 쌍봉사(雙峰寺)라는 절의 이름은 철감선사(澈鑑禪師)의 호에서 따온 것이라 하는데 한편으로는 절 앞, 뒤의 두 봉우리를 빗대어 쌍봉사(雙峰寺)라 불렀다고도 한다.

    부도(浮屠)는 스님의 사리를 안치하는 일종의 탑인데 그 형식에 따라 팔각원당형, 석종형 등으로 구분한다.

    이 부도탑은 팔각원당형에 속하는 신라시대 부도 중 조각 장식이 화려한 최대 걸작품이다.

    상하 각부가 평면 팔각형을 이루고 있음은 당시의 특징이지만 2단으로 이룬 하대석 하단에 운문, 상단에 사자를 조각하고 상대석에는 앙련위에 팔각대석을 놓은 이중으로 된 안상 안에 가릉빈가 1구씩을 새겼고 탑신을 받는 부분에는 연화문이 둘려 있다.

    탑신은 각 우각에 원주형을 세워 그 위에 주두를 얹었으며 각면에는 전후에 문비형,

    그 좌우에 신장상, 남은 2면에 천인상을 조각하였다.

    옥개부에는 연목과 기왓골이 횡각되고 옥리에는 각면에 1구씩의 천인상이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이 매우 정교하며 탑신 원주에는 엔터시스 양식을 가미했으며 옥개 추녀 끝막새에 연화문을 새긴 솜씨를 보면 당시 조각공이 신앙심을 가지고 필생의 작업으로 만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부도탑의 높이는 230cm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이 탑의 건립연대는 선사의 입적에서 멀지 않은 시기로 추정된다.

    철감선사(澈鑑禪師)의 이름은 박도윤으로 신라 원성왕 4년 한주 휴암에서 출생,

    귀신사에서 화엄경을 배우고 헌덕왕 17년에 입당하여 남전보원에게 법을 받고 문성왕 9년에 귀국, 풍악산에 잠깐 주석하였다가 화순에 옮겨와 쌍봉사(雙峰寺)에 주지 후 경문왕 8년에 입적하였다.

    신라 구산선문의 종풍으로 크게 진작시킨 분이다.

     

     

    쌍봉사 전경

     

    천왕문(들어갈땐...)

    천왕문 앞의 연못에 돌거북

    사대천왕

     

     

     

     

     

     

    범종각(梵鐘閣)

    쌍봉사(雙峰寺) 대웅전은 우리나라 현존 유일의 3층목탑식 전각이어서 보물 제163호로 지정되어 보호하여 왔으나 1984년 4월 3일 불에 타 1986년 12월에 복원하였다. 대웅전의 목조삼존불좌상은 1984년 불이 났을 때 다행히도 타지 않았다.

    석가여래좌상의 좌우로 아난과 가섭존자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합장하며 시립하고 있는 특이한 삼존형식이다. 대웅전이 화재를 당한 1984년 11월에 개금하여 상태는 아주 양호하다.

    상호는 넓적하여 사각형에 가까우며 조선후기의 불상들이 그러하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머리는 나발이 촘촘하고 육계는 아주 작은 원통형(지름 9㎝, 높이 3.5㎝)으로 처리하였으며 머리 중간에 반월형의 계주(길이 10㎝, 높이 3.5㎝)가 있다. 백호는 이마에서 양미간 사이로 내려와 있으며 아주 작다. 눈은 일자형(一字形)으로 반개하였으며 눈꼬리가 약간 올라가 있다. 코는 반원통형에 가깝고 콧볼의 상단만 약간 파서 형식적으로 처리하였으며 인중은 뚜렷하고 길다. 입은 호형이고 양 입가는 약간 눌러져 있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 하다. 눈썹과 눈은 먹선으로 그렸고 입은 붉은 칠을 하였다.

    콧수염은 두 줄로 옆으로 그었으며 턱밑에도 먹선으로 수염을 그렸다. 턱밑에는 1조의 음각선을 넣어 양감있게 처리하였다. 귀는 크고 두툼하며 귓볼이 뭉퉁하다. 목은 아주 짧으며 삼도가 있다. 법의는 통견이며 두툼하고 衣紋은 간단한 편이다. 왼쪽 어깨에서 내려 온 법의 자락은 수직으로 흘러 손목까지 감싸고 있으며 오른쪽 어깨에서 내려 온 법의자락은 팔굽까지만 내려와 옆으로 흘러 半袒으로 처리하여 팔굽에서 팔목까지는 법의의 의문이 없다. 승각기는 없으며 裙衣는 가슴 밑까지 올라와 있다. 군의의 상단 옷주름은 규칙적으로 주름잡아 仰蓮形으로 장식화한 형식으로 처리하였고 그 밑에 1조선의 가는 의대가 돌려져 있을 뿐 띠매듭은 없다. 복부의 의문은 넓은 U자형이 1조선 양각되었고 발목에서 흘러내린 의문은 양무릎 밑까지 넓게 펴져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다. 오른 손은 손바닥을 펴서 자연스럽게 무릎 안쪽에 올려 놓고 있으며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오른발바닥 위에 놓고 별조하여 손목 속에 끼워 넣었다. 불상의 하면은 목판으로 마무리하였는데 가운데에 가로 19㎝, 세로 10.5㎝ 크기의 장방형 복장공이 뚫려 있다.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2개나 있다. 하나는 불상 조성 발원문이며, 다른 하나는 극락전 본존불의 대좌에 묵서되어 있는 명문이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이 석가불은 좌우에 시립하고 있는 가섭과 아난존자와 함께 1694년(조선 숙종 20)에 조성되었다.

    발원문은 극락전과 삼층전(현재는 대웅전이란 현판이 붙어 있음)의 불상을 동시에 만들고 쓴 발원문이란 점에서 특이하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康熙三十三年甲戌年'으로 조선 숙종 20년(1694) 임을 알 수 있다. 삼층전(현재의 대웅전) 안에 있는 조각상의 명칭은 본존이 석가여래이며 좌우협시는 가섭과 아난존자로 확실히 밝혀져 있다. 뿐만아니라 불상의 조성동기, 불상 조상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어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쌍봉사(雙峰寺) 대웅전의 삼존불은 본존이 좌상이고 좌우의 협시상인 아난과 가섭존자상이 입상이다. 이러한 도상은 흔하지 않은 예로 특이하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이 불상은 사각형에 가까운 상호, 콧볼의 상단만 악간 파서 형식적으로 처리한 코, 오른쪽 팔굽까지만 걸쳐 있는 半袒형식의 법의, 裙衣 상단의 옷주름이 규칙적으로 주름잡힌 앙련형의 형식 등의 양식으로 볼 때 17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어 연대를 알 수 없는 다른 조각상의 표준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도난당하였던 불상의 조상기문(발원문)이 다시 되돌아와 불상의 조성시기와 명칭, 불상 조성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모두 알 수 있어서 그 사료적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스산한 겨울바람에 낙엽마저 떨어져 날아가버리고 주렁주렁 달린 결실의 꼭지가 인연을 기다리다 지쳤나 스스로 땅으로 쳐박히는 사자산문 쌍봉사를 조선시대 선사님의 에너지를 내 가슴에 담으려....

     

     

     

     

     

     

     

     

     

     

     

    호성전(다른사찰에는 조사전이라고 부른다)

    호성전 천정 벽화

     

    나한전

     

    대나무숲과 느타리 버섯 참나무목

     

     

    철감선사(澈鑑禪師) 부도탑

    상대석의 아랫부분은 연꽃이 위로 향하는 앙련이 조각되어 있으며 앙련 위에는 팔각의 면을 만들고 안상(眼象)을 음각한 후 각각의 면에 가릉빈가(伽陵頻迦)가 조각되어 있다. 사람의 얼굴, 새의 몸을 하고 있는 극락조 가릉빈가는 사후 머물게 될 수미산 언덕으로 철감선사를 인도해 갔을 것이다. 이 부도비에 새겨진 가릉빈가는 각각 비파, 피리, 바라 등 여러 악기를 다양하게 연주하는 모습으로 새겨 변화를 꾀했다.

    몸돌 또한 작은 연꽃이 수놓인 굄돌 위에 팔각으로 조성되어 있고 각각의 모서리는 배흘림 둥근 기둥을 마치 나무로 만든 듯 깎아 놓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팔 면 중 앞 뒤 두 면에는 자물통이 달린 문비(門扉)를, 그 좌, 우 네 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나머지 두 면에는 비천상(飛天像)을 새겨놓았다.

    빛난다. 낙수면에는 암키와와 수키와가 이루는 기왓골이 깊고, 처마에는 서까래가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각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까지 만들어져있다. 손톱만 한 크기의 막새기와 표면에 여덟 잎으로 된 꽃잎을 세밀하게 새겨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조각공이 필생의 작업으로 신앙적 발원을 이루려는 정신세계가 함축되어 있다고들 해석하기도 한다. 그만큼 정교하고 보통사람들의 생각과 가능성을 뛰어넘어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한 부도탑인 것이다. 지붕돌의 아래 면에는 비천상이 돌려가며 새겨져 있는데 그 모양 또한 조금씩 틀리다. 탑을 만든 시기는 선사가 입적한 해인 경문왕 8년(868) 즈음일 것으로 추정된다.

    지붕돌에는 정교한 조각 솜씨가 예리하고 돌조각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부도탑 옆에는 사나운 모습을 가진 당당한 모양의 귀부와 이수만 남은 철감선사부도탑비가 있다. 거북의 등 모양에 이미 얼굴이 용의 모양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보아 신라 후기의 것임을 짐작할 수 있고 발의 모양도 발톱이 날카롭게 서 있다. 특히 거북의 오른쪽 앞발이 들려있고 왼쪽 앞발은 땅을 짚고 있으며 꼬리는 옆으로 돌려 들고 있는 모양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거북 몸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 보이는 이수에는 구름 속에 용이 꿈틀거리며 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상부에는 3개의 불꽃 모양 조각이 꽂혀 있었으나 한 개는 소실되고 없다. 아쉬운 것은 이수의 조각수법이 부도탑만큼 정교하거나 깊지 못하고 새겨진 용의 모양이 상대적으로 조악하다.

     

     

     

     

     

     

     

     

     

     

    부도탑과 탑비(비석은 분실되고 없음)

    수년전에는 비자나무 숲옆에 부도탑과 부도탑비가 있었으나 지금은 부도탑과 부도탑비를 대나무숲을 지나 100M 위로 옳겨 놓았는데 너무 인위적인 면이 보였고 역사를 말해주는 비자나무 고목과 그늘에서 다람쥐 보살님이 인사를 했다.

    법명을 알수 없는 친절한 스님의 안내에 더더욱 친근한 쌍봉사의 정기를 가득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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